40일간의 지옥생활

다음은 한 재중 탈북여성이 인편을 통해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전해온 글이다. 북한사투리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싣는다.

 

40일간의 지옥생활

박 O O(탈북여성)

 

남편과 나는 결혼후 남들 못지 않게 행복하고 보람찬 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열성껏 일하며 애써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근 10년 이래는 둘다 출근하여도 배급과 로임을 주지 않았으며 공장은 아예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당 조직이나 정부에서는 실속 없는 구호만 외치고 우리들의 생사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저 눈을 뻔히 뜨고 앉아 굶어죽을 수가 없어 남들처럼 1996년도부터 수남지시장에 다니면서 되거리 장사를 하였고 남편은 외지를 다니며 방랑생활 하면서 한푼두푼 모두어 들이는 돈으로 죽물이나 겨우 먹으며 이럭저럭 연명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마저도 처음으로 하여보는 장사인지라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힘겨웠습니다. 자칫하면 쌍욕 소릴 듣고 안전원들에게 이 구실, 저 구실로 단속당하고 망나니들한테 몰매 맞고 물건을 강탈 당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원래 장사할 재주도 없거니와 공포와 불안 속에서 하는 일이라 잘 되지 않아서 이 방도로써는 다섯식솔의 주린배를 달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살아보려고 두만강 연안의 중국땅에 가서 삯일을 하면서 얼마간의 돈을 벌 수 있다기에 친구들과 함께 세차례나 도강하여 삯일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간이 함께 나와서 일하는 기간에 집에 있는 세 철부지 자식들이 마구 돌아디니며 꽃제비로 되는 참상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으며 부모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밤마다 속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변경으로 자주 드나드는 것도 후과가 상상하기 어렵고 거주지에서 장사하자 하여도 마땅치 못했는데 하늘에 대고 하소연 하여도 땅을 치며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혼해서부터 사랑과 화기 넘치는 단란한 가정생활을 꿈꾸며 참된 삶을 누리려 하였는데 사회의 현실은 그 소박한 꿈마저 아득한 환상으로 만들어 버렸고 인간 세상에 갖고 온 단 한번 밖에 없는 생명 마저도 보존하기 어려우니 어디 사람이 살 세상입니까?

이 생각, 저 궁리 하여도 별로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 국내는 어디로 가든지 마찬가지였고 그것도 홀몸이면 몰라도 한 집안식구에 어린아이 셋이나 되는데 어딜가서 무엇을 하면 생각처럼 되겠습니까?

중국 변경 땅에서 듣고 본것이 있었고 그때로부터 이곳에 와 단 하루라도 인간다운 참된 생활을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고 어린아이들 손목을 잡고 추위를 무릅쓰고 발가락이 나오는 다 꿰진 신발에 양말도 신지 못한채 이렇게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만 되는 처지를 생각하며 서럽게 눈물 흘리면서 1999년 2월 8일에 탈북에 성공하여 무사히 개산툰진의 어느 한 농가에 찾아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부근의 삯일 해주던 동포의 집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는데 매우 반겨주면서 춘절 명절도 제집에서 제대로 쇠지 못하고 이 추운 겨울날에 이런 고생을 하니 매우 가슴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이 집에서 여러날 있는 기간에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자급자족하려는 심리와 송구스러워하는 심정을 헤아리고 이 부부 내외는 가까운 한 친척이 연길에서 식당을 꾸려 수입도 괜찮고 안면도 좋고 인품도 좋다면서 이미 전화로 다 말하고 토론하였으나 우리의 의향이 어떠한가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 집안 식구처럼 대해주고 또 앞날까지 념려해주니 대단히 고마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음날 개산툰을 떠나 연길시에 자그마한 세집을 맡고 다섯 식솔이 이 식당에서 살면서 여러가지 일을 방조해주며 근근히 살아갔습니다.

하늘에는 예측키 어려운 풍운이 있다더니 금년 4월 2일 8시쯤 되어 파출소 공안일군 세명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아이들과 나를 차에 떠밀어 싣고서는 당지의 파출소에 구류하였습니다. 그때 남편은 변소로 나가고 없었기에 액운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소연 하였으나 파출소에서는 인정사정이 없었으며 이튿날에는 룡정변방 대대로 나를 이송하였습니다.

이 소식에 접한 식당 주인 부부간은 무진 애를 썼으나 세 아이들만 내놓고 나는 그냥 20여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회령시 집결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난생 처음 짐승보다 못한 죄수생활을 체험하게 되었고 소위 ‘사회주의 사회’의 무지막지한 인권유린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체험하였습니다.

조선에 호송되어 회령시 보위부를 걸쳐 다시 “집결소 대상”으로 인정받고 회령시 집결소 마당에 들어가기 바쁘게 한 무리의 안전원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마구 짓밟고 차고 때리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처음 당하는 곤경이라 입에서는 연신 신음소리와 비명이 나왔고 그럴수록 더 혹독하게 때리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조국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몽둥이 세례와 주먹질, 발길질, 입에 담지 못할 비인간적인 쌍욕질 대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에 우리 녀성들은 모두 열다섯명이었는데 20세부터 50세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봉폐된 방안에 몰아넣더니 안전원 세명이 들어와서 “모두들 옷을 몽땅 벗으라”하고 호통질했습니다.

하느님 맙시사. 이전에 집결소 구류소에 들어가면 여차여차하게 매맞고 시달림 받는다는 말을 무심하게 들어온 일은 있으나 오늘 이렇게 직접 당하고 보니 너무나도 놀라움에 정신이 아찔해나는데 남성 안전원 앞에서 옷을 홀딱 벗어 버리고 서 있으라니 시퍼런 대낮에 무슨 형벌을 이렇게 하는가고 생각하며 모두들 쑥스럽고 어이 없어 하는데 앞에 서고 있던 안전원이 손에 든 몽둥이로 번갈아 가면서 머리, 배, 가슴, 허리 가리지 않고 마구 두들겨 패는 바람에 모두들 눈앞의 매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홀딱 벗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강요하고 난 안전원들은 호주머니와 속옷들까지 샅샅이 뒤지어서는 소지품을 몽땅 털어냈는데 그 중에는 미처 감추지 못하였거나 옷섶에 음폐적으로 감추느라 한 것이 드러난 중국돈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이미 전에 들은바 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몸에 지니고 있는 돈들을 사전에 감추느라고 하였으나 몽땅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구류장에 끌려가기 전에 몇몇 녀인들과 중국구류소에서 피땀으로 번 돈을 비닐 쪼박에 싸서 삼켜 버리는 것을 보고 나도 중국돈 100원 짜리를 비닐에 싸서 입안에 넣고 삼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먹어버린 돈을 후에 변소에 가서 대변본 후에 찾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형기가 찬 후에 생활에 쓰거나 구류소의 당지 안전원에게 고여서 형기를 단축하거나 형벌을 경감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돈이 생명 못지 않게 귀중하기에 모두들 빼앗기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보관하는 것입니다.

안전원들은 소지품이나 돈만 아니라 옷, 신발, 혁띠까지도 빼앗아 내는데 남성들은 심지어 속벌까지도 빼앗겼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빼앗은 물건을 가지고 나가는 안전원은 득의양양해서 그 누가 숨긴 물건을 내놓지 않고 후에 발각되면 용서없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어안이 벙벙하였던 나는 한참 지나서야 제정신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죽을 죄를 진 죄수라고 남자 앞에서 홀딱 벗는 것을 강요 당하다니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 나고 온몸이 오싹오삭해 납니다. 그들은 그래 어머니도 없고 누이도 없고 안해도 없는 인간들이란 말인가?

소지품이나 돈을 빼앗긴 사람마다 한숨 짓지 않으면 멍해졌으며 나같이 요행 돈을 삼킨 사람들은 간이 콩알만해져서 무슨 형벌을 당할까봐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매일을 보냈습니다. 감방에서 주는 식사는 통강냉이를 삶아서 한줌 정도씩 주는데 다 낡아 밑굽이 구멍 뚫린 늄그릇에 담아 들여보내면 몇일동안 씻지도 못한 어지러운 손으로 쥐여 먹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정한 시간내에 먹어치워야 하는데 통강냉이를 대충 삶아놓은 것이어서 이빨이 없거나 나쁜 사람은 미처 먹지 못하고 호주머니에 쏟아 넣어서 후에 가만히 먹군 합니다.

변소도 개별적으로는 보내지 않고 정한 시간내에 보게 하는데 감시하기 위하여 문도 닫지 못하게 합니다. 긴장과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내서인지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나는 감방 생활 5일 만에야 비로서 대변이 있게 되었고 몰래 삼켰던 돈 100원을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4월 초순이라 날씨는 아직도 한기가 써늘하였는데 음침하고 햇빛이 들지 않는 구류소 안은 악취가 풍기어 구역질이 나며 몸 가리울 것이 없어 그대로 차디찬 콩크리트 바닥에 누워서 쪽잠을 청해야 했는데 자신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내느라고 모두들 저녁이면 옹송그리고 앉아 이를 쪼았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와 빈대가 성가시게 굴어서 아무리 잠을 청하려 해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네면의 벽체는 온통 이와 빈대를 죽인 피자욱으로 하여 진붉은 색을 칠해놓은 것만 알았습니다. 감방 안에서 이와 빈대에게 당하는 시달림은 안전원들에게서 당하는 고통과 추위에 못지 않게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환경도 이렇거니와 위생시설과 보장은 근본상 없습니다. 한달이고 반년이고 세수 한번 할 수 없고, 치솔질도 못하고 수염도 깎지 못하여 남성들은 나이를 분별할 수 없이 모두가 텁수룩 하였습니다. 강제로동 시에는 큰짐이나 작은짐을 지고 메였던지간에 달려 다니게 하며 조금이라도 굼뜨면 매질을 해댔습니다. 안전원들은 이른바 죄인들을 여러가지 온갖 방법으로 육체상 정신상 고통을 주고 괴롭히며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종신 병신도 만들고 죽음에로도 내몹니다. 그들은 감방 수인들을 종래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짐승 개보다 더 못하게 대합니다. 나는 이번 감방 생활을 통하여 세상에 이런 인간 지옥이 정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습니다.

탈북하여 중국에서 이미 5년간이나 생활했었다는 58세인 황 로인은 탈북전에는 청진시 어느 구역 병원에서 동의사로 일하였다기에 나는 같은 청진시 사람이라 자꾸 중시하여 보았고 다른 사람을 통하여 그에 대한 몇마디 말도 들었댔습니다. 그는 죄범 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중의 한분이었는데 고생도 다른 사람 못지 않게 많이 하였습니다. 중국에 일가친적 다 있는 그는 재수없이 생일 쇠는 날 저녁에 잡히어서 룡정변방대대에 갇히었다는데 로인이 류창한 한족말로 당시의 공안 일군들에게 항의하고 질책하자 술이 거나하게 취한 한족들이서 사정없이 치고 밟고 때리고도 성차지 않아 로인이 소리를 지른다고 입에다 넓은 비닐반창고를 붙여 소리를 못치게 하고 옷을 벗겨 콘크리트 바닥에 엎디게 하고는 전기곤봉으로 매질하여 온 몸이 성한데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곳 집결소에 이송되어 온 후 얻어맞은 어혈 때문인지 행동이 좀 굼뜨다고 매번마다 욕지거리와 매를 맞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고도 의사품정이 다분한 점잖은 로인이 며칠 안되는 사이에 멍청하여져서 아예 딴 사람으로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한 아주머니가 속탈이 생겨 변소에 가겠다고 새벽부터 신청했으나 안전원이 집체로 변소갈 때 함께 가라면서 보내주지 않아 그 아주머니는 참다못해 바지에다가 똥물을 싸고야 말았습니다. 똥물이 바지가랭이 아래로 흘려내려 오면서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기게 되자 이 광경을 본 안전원은 큰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기다렸다는듯이 즉시 그 아주머니에게 겉바지를 벗게 하고 땅을 짚고 꿇어 엎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황의사를 불러 땅에 꿇고 엎딘 그 아주머니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엎디여 있게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거나 간격 차이를 두면 몽둥이 찜질을 해댔는데 그는 이렇게 온 하루 저녁때까지 이 참혹한 형벌을 당했습니다.

나는 아직 세상 풍파 다 겪어보지 못해서인지 이런 비루하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형벌을 듣지 못했으며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이 아주머니는 집이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들 격분에 치가 떨리고 증오심이 끓어 번졌으나 대항해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대항해 나서다 자신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부모형제나 자식들이 하루밤 사이에 이름모를 그 어느 고장에 가서 한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저 그런대로 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가족은 물론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는 친척들도 련루되어 가거나 입당, 취직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제한을 받고 시기를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봉건사회의 형벌을 대물린 보배로 간주하면서 인민들의 반항이나 탄압에 아직까지도 적용하고 있는 조선입니다. 이 일이 있은 이틀 후에 28세의 최○○라는 남자가 비인간적인 고통을 받기가 더는 힘들어 기회를 타서 철근담장 사이를 빠져나가 탈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찾기 위하여 죄범 중에서 임명한 6명과 안전원 두명이 선정되었고 안전원 두명은 죄범 6명에게 속히 잡아오지 못하면 너희들도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을러메며 구류소 밖을 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최○○를 붙들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는 키도 크고 체구도 좋았으나 잘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한데다 시달림 받을 대로 받아 얼마 뛰지 못하고 도로 잡히었던 것입니다.

안전원이 그 여섯명을 보고 “너희들이 이놈을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하자 6명의 죄인들이 우루루 달려와 당장에서 그를 넘어뜨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데 없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반나절이나 매질 해대니 비명도 못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구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결소의 백여명의 죄수들을 불러내다 열을 지어 서게 한 다음 모두들 두눈을 똑바로 뜨고 탈주범의 참상을 보라고 하면서 전신이 피투성 되고 멍이 들고 머리카락도 피에 한데 엉켜진 최○○를 보고 모두의 앞에 바로 서라고 소리 질러댔습니다. 그는 안깐힘을 다하여 일어서려 했으나 절반도 서지 못한채 앞으로 푹 꼬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쪽 다리가 절골되어 몸을 유지하고 설 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악착스런 안전원은 그가 엄살을 부린다고 몽둥이로 호되게 때리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죄수들이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는데 한쪽 다리만 땅을 딛고 다른쪽 다리는 땅을 딛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쪽 다리로 잠시나마 서있던 그는 동통과 현훈증으로 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안전원은 “이제 다시 탈출자가 생기면 또 이 모양이 될 줄 알라”고 엄포를 놓고 다른 죄인들을 시켜 그를 감방에 끌어가게 하였는데 병치료는 고사하고 더욱 심한 고통만 주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녀성감방의 34세 나는 리○○ 녀성은 며칠전 농장밭에 나가서 큰 돌을 나르다가 그만 발을 곱디디어 발목이 퉁퉁 부어 사람의 목만큼 되었는데도 치료를 받게 하기는 커녕 매일 강제로동에 내몰아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억울함, 분노로 하여 눈물이 마를새 없었습니다. 그는 저녁이면 동통으로 하여 신음소리를 내는데 모두 그런 액운이 차례지지 말았으면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신음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우리의 초조하고 공포에 떠는 마음을 더욱 죄어들게 했으며 자신들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군 하였습니다.

처참한 상황은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머리 뒤에 두손을 모두어 쥐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뽐프”를 500번씩 해야 하는데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을 받아야하군 하였습니다. 이 형벌은 잘하나 못하나 눈에 거슬리거나 안거슬리나 당해야 하는데 매맞기 보다 못지않은 형벌입니다. 건장한 남자들이 하자 하여도 매우 힘든데 우리같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쪽잠도 제대로 자지못한 고역에 매일 시달리는 감방 수인으로 놓고 말하면 너무도 지독한 형벌입니다. 특히 몸에 병이 있고 임신되어 만삭이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하여야 하니 동작이 좀 굼뜨고 서툴면 구두발로 차고 몽둥이질을 해 댑니다. 감방 수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켜 놓고서는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트집 걸고 리유 달아서 행패질 하는 자들이야 말로 인간 백정이 아니겠습니까?

그 매가 무서워서 모두 이를 악물고 도정신을 하고 500개를 채우려 하나 도저히 그 개수를 채울 수 없어 애매한 매를 면치 못하군 합니다. 감방은 죄수들을 잘 다스리고 감화교양을 잘해서 새사람으로 만드는 곳인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어서 얼빠지게 하고 한계 없는 고통을 주며 비인간적으로 대하여 하루빨리 죽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인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와 한 감방에 갇혀 있는 녀인들 중에는 20여세의 두여인이 만삭이 되어 당금 해산할 형편이 되었는데 안전원 관리일군들은 처음부터 이 두녀성을 더 가혹하게 굴면서 인신박해를 가했습니다. 쩍하면 투박한 몽둥이로 두녀인의 배를 꾹꾹 지르거나 두드려 대면서 “이년아, 네년들이 배고 있는 것은 중국종자이니 나오기 전에 죽여 버려라”하고 울러메군 하였습니다. 어느 하루는 임신된 녀인들을 끌어내다 앉히고는 찬물을 몸과 얼굴에 끼얹어 놀라게 함으로써 저절로 아이가 떨어지게 하도록 하는 폭행을 가했습니다. 안전원들의 속심을 모르는 산모들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배속의 아이를 보호했습니다.

옷이 흠뻑 젖었기에 밤에는 우리들이 서로 옷을 벗어주어 그들이 추위에 적게 떨게 하였는데 얇은 옷 한벌씩 입은 이들은 몇 일간이나 추위와 이악스레 박투하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기보다 살길을 찾아 이국 타향살이 하면서 산 사람이 나라를 배반한 역적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배속에 밴 아기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와 혈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련루되어 멸시와 학대를 받아야 하니 수인의 배속의 아기 마저도 빼어놓지 않고 같은 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녀인은 4월말 전으로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한녀인이 먼저 4월 15일경에 당장 해산하게 되어서 감방 안의 나이 많은 녀인들이 해산 방조하여 무사히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들의 호주머니 천을 떼 내고 속옷을 뜯어 호상련계하여 자그마한 포대기를 만들어 애기 몸을 감싸주고 자신의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습니다. 감방 안에는 입은 옷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에 이렇게 마음상으로 밖에 동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애와 산모가 무사하니 그래도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차디찬 방안의 어둑시그레한 곳에서 그들을 조용히 축복해 주었습니다.

나젊은 애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옷섶에 싼 자신의 피덩이 아기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나서 가슴에 꾹 싸안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이 세상에 새 생명이 고고성을 울리게 한 녀성으로써, 어머니로써 이런 환경에서 천대 받으며 아이를 낳아야 하는 설음이 북받쳐 올라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나와 함께 들어왔던 다른 한명의 임신부도 몇일 후에 해산하게 되어 우리는 전과 같이 해산방조를 하여 무사히 아이를 낳았습니다. 초산이다 보니 산모가 몹시 힘들어 했으나 감방안의 녀인들과 산모의 인내성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해산하였습니다. 우리가 다음날에 몇일전 아이와 같은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되어서 손에 땀을 쥐고 한숨만 짓는데 안전원이 와서 산모의 소속 군에서 호송원이 왔기에 나오라고 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안으려 하자 “빨리 아이를 버리고 혼자 나오지 못하겠느냐”하면서 소리 지르는데 그래도 아기 엄마는 아기와 떨어지기 고통스러워 걸음을 떼지 않자 옆에 있던 안전원들이 그를 막무가내로 잡아 끌어 내가는 것이었습니다. 감방 복도에는 녀인의 몸부림 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울리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 모성애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어머니로써의 사랑도 부여하지 못하고 생리별해야 하고 햇빛도 보지 못한 아기를 죽음에로 몰아야 하니 어머니로써 어찌 속에 피눈물이 흐르지 않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죄수라고 갓 태어난 아기가 살권리 없고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니 그 어머니의 칼로 에이는듯한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호송차가 떠난 후에 안전원이 들어와서 “빨리 이 중국 종자를 검질 못하겠느냐”고 을러메는 바람에 모두들 한쪽 구석에 몰려서서 후들후들 떨고 있으니 몽둥이를 들고와 마구 두들겨대고 손발로 강타를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번 아이를 안아 내가던 아주머니가 머리를 딴데 돌리고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갓난애기의 목을 조여 죽게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무고하고 가엽은 생명입니다. 태어나자 마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다른 인간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왔는데 몇시간도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생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 이처럼 무참히 짓밟히고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 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살인광들이 있다니 너무나도 통분하고 치가 떨립니다. 조선의 살인 백정들의 이런 비인간적인 야만적 행위는 세계 문명에 대한 로골적인 도발로써 꼭 력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감방에는 발진티프스 때문에 비참히 죽는 사람도 있지만 기타의 질병 원인으로도 갑자기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 4월 중순경에 한 중년 남자가 발진티프스에 걸리지 않았는데 밤 사이에 갑작스레 죽었습니다. 안전원들은 고문에 반항하여 자결한 놈이겠다고 하면서 쇠쪽박이나 유리쪼박을 먹고 죽은 것이 아닌가 하여 시체 해부를 하였습니다. 죽은시체를 양 사양장에 들어넣고 투박한 도끼로써 가슴팍과 배를 찍어 가르고서 위와 밸을 마구 주물면서 무슨 물건을 삼켰는가 검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오르내리며 뒤번졌으나 쇠붙이나 유리쪼각 따위는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투박한 도끼로 죄수의 배를 찍어 가르는 그 참상은 마치도 짐승잡이에 이골 난 백정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실로 집결소 감방 생활의 모든 면을 다 말하기에는 저의 필력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나는 4월말경에 해당구역에서 호송하러 왔기에 11명의 죄인들을 제각기 손목에 포승을 걸었습니다. 우리를 인계해 주는 집결소 안전원은 하나의 포승줄로 련결하라고 일러주었으나 호송안전원은 괜찮다고 하면서 그냥 가자고 하였습니다. 호송 도중 20대의 남자 한명이 불의에 달아나기 시작하였는데 갑작스런 정황에 부닥친 안전원은 그를 따라가 잡으려 할때 모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제각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나는 우연히 호송 도중에 탈출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나는 소중히 간수하였던 돈 100원을 가지고 고향 청진에 있는 친척들을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인민폐 100원을 조선돈 2450원으로 교환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친척을 위해 2000원을 내놓고 나머지 450원을 가지고 다시 중국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우리 가정이 탈북한 것으로 하여 친척들도 감시를 받고 있었기에 더 있을 수 없어 친한 동무네 집으로 찾아가니 그는 나를 보자 너무나도 반가워 얼싸안고 돌아가며 눈물부터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온 몸이 피투성이 상처가 난 것을 보며 가슴 아파 눈물 흘리며 자기가 그동안 살아온 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에 자식을 잃고 남편마저 차사고로 돌아갔다며 꼭 나를 따라 그 어디든 가겠다며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더 뿌리치지 않고 삶의 희망을 안고 두만강가에 도달하였으며 5월 17일 어둠을 리용하여 검푸른 두만강에 들어섰습니다. 두만강 물결이 어찌나 센지 물살에 밀리고 밀리며 물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가라앉으며 헤염도 칠줄 모르면서 한시간 반이나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 거렸습니다. 중국땅에 도착한줄도 모르고 계속 물속인가 하여 허우적 거리다가 한참만에야 정신 차려보니 강 기슭에서도 함참되는 거리에 나와 있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인간지옥에서 벗어났는데 두만강 물귀신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철석같은 신념으로 하여, 무사히 중국땅을 밟았다는 기쁨과 희열로 하여 우리 둘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강건너 지옥에서 근 40일간의 그 무시무시한 광경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마음과 발걸음은 더욱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덕에 요행 되살아 나게된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북조선의 하늘에 덮힌 저 먹장구름을 하루빨리 제거해 버리기를 충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2000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