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간의 추억

16년간의 추억

고 선 영 · 만 22세
탈북여성·북한 평양
입국일자: 2002년 11월

 

저는 비록 16살 때 고향을 떠나왔지만, 제 추억의 전부인 학교생활을 되새겨보려 합니다. 가끔은 친구들과 고기 잡으러 강에서 뛰어다니고 얼어붙은 논밭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이 그리습니다. 식량이라도 보태고자 일하는 도중에도 짬짬이 나물들을 캐서 바지주머니에 넣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저려옵니다.

1. 성장환경

평양시 사동구역이 저의 고향입니다. 1983년 3월 군인이셨던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고 저보다 3살 어린 여동생과 6살 어린 남동생, 이렇게 저의 가족은 5명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심히 정직하게만 생활한 덕분에 일찍 로동당에 입당하시고 제가 태어날 당시 소좌(소령)였던 아버지와 음식솜씨가 좋으신 어머니 덕분에 평양에서 생활할 때는 다른 곳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못하고 부족한 것 없이 잘 살았습니다.

1) 유치원 생활

집 가까이에 있던 군부대 유치원에 1년 간 다니면서 노래와 춤도 배우고 글도 배웠습니다. 유치원에서부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가르치고 우리나라가 제일이라는 교육을 받게 되는데 물론 노래와 춤, 글도 다 그 내용들입니다. 유치원 생활 중에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정말 싫어서 집으로 몇 번 달아났다가 혼난 것과 김일성주석 탄생일인 4월 15일 선물을 타게 되었는데 인사도 안하고 사탕을 빼먹었다가 어머니한테 야단맞고 다시 초상화 앞에서 선물을 받쳐 들고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서야 마음 놓고 먹었던 기억뿐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생일과 김정일 생일에 사탕, 과자, 껌, 강정, 카라멜 등을 넣은 선물을 주는데 보통 때는 먹지 못하는 것들이라 그날들이 무척 기다려진답니다.

2) 인민학교 생활

7살 때 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어린 처녀 선생님이셨습니다. 고향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전근을 하지 않는 한 졸업할 때까지 담임을 하게 됩니다. 인민학교는 담임 선생님이 모든 과목을 가르치기도 하고요. 한 반 학생수가 40명쯤 되는데 저희 반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짝꿍이 되어서 짝꿍이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함께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집으로 같이 가서 모르는 문제는 설명을 해 주면서 짝꿍이 숙제를 다 끝내야만 마음 놓고 놀 수 있었답니다. 그게 제일 싫었어요. 놀고 싶어도 짝꿍 때문에 놀지 못하고 짝꿍은 모르는 문제를 어디 가서 물어보고 풀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음날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되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 짝꿍을 미워하게 되고 화가 나면 막 때리기도 했는데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2학년 때 아버지가 학교일을 잘 도와준다는 이유로 학기말 시험성적이 1등과 2등이 바뀐 적이 있었고 3학년 때 여자애들 몇 명이서 ‘도시처녀 시집와요’라는 노래를 불렀다가 선생님한테 맞은 적이 있었는데 이유는 어린 여자애들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은 성인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TV에서도 나오는데 말이죠. 선생님은 부모님보다도 무섭고 위대한 존재였기에 잘못했다고 빌고 나서 다시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배운 노래 외에는 다른 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았답니다.

집이 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학교학생들은 거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를 다녔었는데 인민학교를 다닐 때 반 40명 중 부모님이 농사꾼이신 친구 두 명은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2학년 때부터 도시락을 싸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밥 한 숟갈, 반찬 조금씩 다 모아서 도시락을 마련해 주곤 했었는데 가끔 몇몇 친구들은 왜 너네는 도시락을 한번도 싸오지 않느냐면서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싸움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 두 명은 반에서 공부도 제일 못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농사철 때는 오전에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농사일을 하기도 했고 가을걷이가 끝난 직후에는 아예 공부는 안하고 하루 종일 이삭줍기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모내기는 두 세 번 밖에 안나갔지만 이삭줍기를 한 적은 인민학교 때부터 많았습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식용비둘기 먹인다고 메뚜기를 2m 정도 실에 꿰서 잡아 오라고 하기도 했죠. 통통한 메뚜기 몸 직경이 1센티미터라고 하면 200마리 넘게 잡아야 했어요. 그때는 메뚜기잡기가 숙제이기 때문에 아예 집에 가자마자 가방을 벗어놓고 저녁 늦게까지 메뚜기 잡았고 학교 앞뜰에 꽃을 심는다고 꽃씨를 가져가기도 했고. 꼬마과제라고 해서 일년에 토끼가죽 4~5매에, 파지, 파동, 파철, 유리 등 한조 친구들이 과제를 못하면 다 남아서 그 과제를 완수해야만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과제를 못한 친구들은 조에서 미움을 받게 되고 매를 맞기도 합니다.
2학년 때 소년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2.16(김정일 탄생일), 4.15(김일성 탄생일), 6.6(조선소년단 창립일) 3차에 걸쳐 공부를 잘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2월 16일 1차로 가입하고 그 다음이 2차, 공부를 못하고 입단선서를 다 외우지 못해 자격미달이라고 해도 의무적으로 마지막은 3차로 다 들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든 학생들은 같은 소년단원이라고 해도 무시를 당하는 편이구요.

위의 예들 중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늘 욕먹고 매 맞고 친구들한테 무시당하는 친구들은 고정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학부형회의 때 농사를 짓느라 공장에서 일하느라 못 오시는 부모님들 자식들이라는 점도 공통됩니다. 도시락 못 싸오고 공부 못하고 옷에 때도 많고 위생점검 시간에 걸리고 부모님 도움을 받지 못하니 꼬마과제도 완수 못하고, 4년 동안 내내 선생님에게서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한달에 한번 하는 생활총화시간에 분단위원장 보고서에서 늘 비판대상이 됩니다. 한 명씩 교탁에 나가 한달 동안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보며 토론한 다음 호상비판 시간이 있는데 호상비판을 받은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호상비판을 받는 학생도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한번 생활총화를 할 때 10번도 넘게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힘이 센 친구들이 모든 생활을 잘 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비판하면 맞으니까 못하는 겁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라 자칭하는 고향에서는 나라의 기둥이라고 하는 청소년들의 인권은 부모님의 위치나 출생신분에 따라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3) 고등중학교 시절

북한은 유치원 1년,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을 포함해 11년제 의무교육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의무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고등중학교에서도 여전히 파동, 파철, 파지 등등 과제는 여전하고 집단체조를 위한 율동체조, 태권도, 곤봉, 이본, 룬(훌라후프) 연습은 물론, 행사 때마다 반별로 집단행진 연습이 더 강화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학생의 기본의무인 공부가 아닌 것들로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고등중학교 4학년 때부터는 모내기 때 한달, 가을걷이 때 한달 동안 농촌동원을 하고, 여름에는 오후시간에 김매기를 비롯한 다른 농사일도 도우러 다닙니다. 고등중학교 학생들은 앞으로 대학을 갈 수 있는 신분의 학생들 외에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김일성주석의 사망이었죠. 기절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교내에서는 웃음소리, 노랫소리, 운동은 절대 금지였고 만약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치다가 들키면 엄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됐던 사건일 것입니다.

고등중학교는 과목마다 선생님이 계셨는데 인민학교 교장선생님 따님이 수학선생님이셨어요. 수학을 잘 가르치셨고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셨는데 제가 이사를 갈 무렵 교장선생님 형님분이 죄를 지어서 가족이 평양에서 함경북도 어느 촌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저희 학교에 결혼을 약속한 남자 수학선생님도 계셨는데 생이별을 당하고 가던 중 큰아버지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내가 이런 고통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마지막 한 담긴 한마디를 적어놓으시고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져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괜찮지만 전에는 친척 중 한명이 정치범이 되면 4촌이나 8촌까지도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사건이 14살이었던 저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평양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중국에 삼촌이 계시고 처가친척들도 중국에 많다는 이유로 승진의 제한을 받게 된 아버지가 제대를 하셨고 친가와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함경북도 회령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4) 생소했던 내 나라

95년, 평양에서 오후 5시쯤 떠난 기차는 다음날 오후 2시쯤에 회령에 도착했습니다. 외할머니네 집으로 갔는데 입쌀 하나 섞이지 않은 노란 옥수수밥을 내놓으셨어요. 죽을 쑤어먹는데 오늘은 너희가 온다고 밥을 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저희는 어떻게 저걸 먹냐고 했죠. 어릴 때 한번 와본 후로 처음 할머니네 집에 온다고 들떠있던 저는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저는 평양에 있을 때처럼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시장에 나가보니 일명 꽃제비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남의 손에 들려있는 돈과 음식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달아나고 있었고, 몸이 불편하거나 힘이 없는 아이들은 땅에 흘려져 있는 국수오라기를 새까만 손으로 주워 먹고 있었고, 먹지 못해 퉁퉁 부은 몸으로 입구에 쪼그려 앉아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하도 굶어서 눈이 안 보인다는 한 아버지는 5살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나와 군인아저씨에게 자신의 딸을 건네주고 있었습니다. 운신조차 못하는 아내가 딸까지 굶겨죽일 수는 없다고 다른 사람한테 주자고 했다며 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어느 아줌마가 쥐어준 호빵 두개를 가지고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담담하게 걸어가던 그 여자애의 모습은 아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어린 자식을 남의 집 마당에 버리는 어머니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누굴 탓해야 합니까.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에 나오니 배급을 안 주더라구요. 농사지을 땅도 없고 돈도 없고 평양에서 올 때 가지고 온 낟알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그냥 살았던 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없었겠지요.

남의 나라인지 내 나라인지 혼돈되지만 지금은 고난의 시기이고 꼭 장군님께서 이밥에 고깃국 먹는 인민으로 만들어주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잘 이겨내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평양학생들과는 달리 회령학생들은 자유로운 것 같았습니다. 평양에서는 운동회나 작업시간 외에는 꼭 교복을 입고 있어야 하고 여자들은 겨울에도 치마를 입고 다녀야 했지만 회령에서는 자유복장을 하고 있었고 장사를 하느라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학생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2. 탈북

1년 뒤 중국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러 중국으로 몰래 갔다 온 아빠의 결심으로 97년 탈북을 하게 되고 가족 5명 모두가 무사히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회령으로 이사갔을 때보다 더 한 충격을 받게 되었고 한겨울에도 푸르싱싱한 채소들과 과일들이 가득한 시장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습니다.

1) 북송과 그 후 지옥에서의 1년

그렇게 한달을 보낸 후, 친척집을 감시 중이던 중국경찰에 어머니와 제가 붙잡히게 되고 일주일 후 회령교두를 거쳐 보위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15살이었던 저는 하룻밤을 보위부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외할머니네 집으로 보내졌고 그날부터 저에 대한 감시가 철저해졌습니다. 하루라도 학교에 가지 않으면 3~4명의 친구들이 저를 데리러 왔고 학교에서 벌레 보는 듯한 따가운 눈총들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있는 아버지와 동생들은 잘 있는지, 어머니 생사조차 모르고 우리 가족 때문에 보위부에 시달린 친척들의 눈치를 보면서 15년 동안 저를 속인 지옥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몰랐을 때는 천국이었던 고향이지만 1달 동안의 중국생활을 거쳐 김정일 정권은 우리 모두를 속인 악당인 것을 알았는데 어찌 눈앞에 서있는 친척이나 친구들, 선생님들이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 사람들이 저를 인간취급도 해주지 않지만 말입니다. 한번은 학교에 아파서 못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모가 친구에게 쪽지를 써서 보냈었습니다. 정말 아팠거든요. 다음날 학교에 나갔더니 단임 선생님이 반친구들 앞에서 ‘너는 아플 자격도 없다’, ‘너 같은 애가 뭐가 잘났다고 아프다고 학교를 안 나오냐’고 하더라구요. 수업시간 선생님들이 ‘여기 그런 애 있다며? 얼굴 좀 보자’하고, ‘조국과 인민의 배반자’라는 딱지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부모형제 생사도 모르는 제 처지가 저를 더 힘들게 했기에 누가 무어라 하든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2) 재탈북과 한국입국

그렇게 반년이 지나 어머니가 정치범수용소에서 나오셨는데 한여름에 털옷을 입고 올만큼 몸이 야위었고 혼자서는 걷지를 못하셨습니다. 중국친척들의 도움으로 몸이 회복되고 우리 집에 대한 감시가 약해졌을 즈음인 98년 2월 다시 재탈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다시 다섯 식구가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한족들만 사는 곳으로 가서 조선족이라 얘기하고 중국말도 배우고 일도 하면서 살게 되었고 그렇게 여기저기서 5년 동안 살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삶도 쉽지만은 않았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언제 잡혀나갈지 모르는 불안감입니다. 경찰만 봐도 숨고 싶고 싸이렌 소리만 들려도 손이 떨리는 극도의 불안감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2002년 11월 한국에 입국하기 전까지 한 순간도 맘 편히 산 적이 없었죠.

16살에 고등중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온 저는 20살에 여기서 중학교 2학년을 다닐 수 있는 학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결국은 검정고시로 고등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지금은 수시합격으로 서강대학교에 합격한 05학번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입니다. 한국에서 일반학교를 다니지 못한 저에게 대학생활은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포함한 학교생활의 모든 추억을 만들 장소이기에 누구보다 설레이고 떨립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을 남한친구들과의 경쟁이 두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힘겨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저의 끈기와 공부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저의 삶을 통해 배웠기에 잘 할 수 있으리라 제 자신을 믿으면서 대학생활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