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정 은 혜
백두한라회 총무/선교부장
탈북여성, 2004년 한국 입국

저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았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북한 당국이 부르짖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에서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고모를 잃고, 보위부의 온갖 핍박과 통제, 감시 속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입니다. 오늘 이 귀한 자리를 통해 단지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제 가족들이 ‘반동’이라는 딱지가 붙어 죄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북한에서의 생활을 증언하려고 합니다.

북한의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는 칠골교회와 봉수교회가 세워져 있고, 형식적인 예배가 열리기도 한다는 것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았던 저는 평양에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탈북하여 중국에 가서야 한국인 목사님들이 쓰신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고 자랑 삼아 말씀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저는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북한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벗겨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우며, 북한 당국의 종교 탄압 때문에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 당국이 ‘우리도 교회가 있고, 예배도 드리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선전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세운 가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고 자랑하시는 분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북한이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면 왜 성경을 보거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붙잡아 죽이거나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는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잘 가꿔지고 정돈된 듯한 평양의 겉모습 이면에 감춰진 진실, 독재의 어두운 그늘 아래 ‘반동분자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신음하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주민들의 신음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여 들어보셨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저와 제 가족들처럼 ‘평양에는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고, 몰래 숨죽여 예배를 드리다 발각되어 이름도 없이 순교당한 북한의 신앙인들을 잠시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셨는지….

 

북한에서는 하나님은 없다고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조선의 하나님’, 김일성?김정일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무신론적 사회 환경과 교육, 끊임없는 반종교 선전에도 불구하고 저희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신실한 신앙심을 지켜가며 북한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써가며 찬양과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몰래 예배를 드리다가 북한 당국에 발각되어 보위부로 끌려가셔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고, 남은 가족들은 대대로 뿌리 내리고 살던 고향에서 연고 하나 없는 다른 도의 척박한 산간지대로 추방되셨습니다.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고 추방되었지만 믿음은 할머니의 굳은 의지로 계속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비밀 예배를 드리던 중에 알게 되어 결혼하셨고, 제 고모와 고모부의 결혼도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으로서 응당히 누려야 할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할머니와 부모님은 제가 믿음 안에서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늘 기도해 주시고, 생활 속에서 믿음의 싹을 심어주셨습니다. 할머니의 기도로 식사를 시작하고, 잠자기 전이면 찬송가를 배워 주셔서 따라 부르다 잠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생활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십일조를 모으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으신 십일조를 먼 곳에서 찾아오셔서 집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가시는 분들이나 마을 사람들 중에 생활이 어려우신 분들께 나눠주시곤 하셨습니다. 저도 할머니와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과 주님의 은혜 가운데 북한의 노래 가사처럼 ‘세상에 부러움 없이’ 행복하게 커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과 행복도 한 개인의 절대적 우상화와 신격화로 독재가 지배하는 땅에서는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을 믿던 분들은 저희 집으로 찾아오셔서 숨소리를 죽여 가며 몰래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다 가곤 하였는데, 독재자의 충실한 심부름꾼들이었던 보위부에서 눈치를 채고 저희 집과 주변에 감시를 붙였고, 그들은 한 순간을 놓칠세라 저희 가족들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도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보위부에 발각되었고, 아버지와 고모는 물론이고 멀리서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분들까지 체포되었습니다. 모두 어디론가 끌려가셨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게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정일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보위부에서 한 무리의 보위원들이 구둣발로 들이닥쳐 집 안팎을 발칵 뒤집었고, 끝내는 대대로 물려받으며 간직해온 성경책마저 빼앗아 가고야 말았습니다.

또한, 남은 가족들이나 친척들을 매일 한 명씩 보위기관에 끌고 가 조사하며, 보위부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온갖 죄명이 붙은 문서에 강압적으로 손을 붙들어 도장을 찍게 하였고, 제대로 살기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반동’이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저희는 증조할아버지 때 추방당해 겨우 자리 잡은 곳에서 네 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깊고 깊은 산골로 다시 한번 추방되었습니다. 또한, 늘 보위지도원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친척들이 일하던 직장에서 반동 가족과 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맡고 있던 직책에서 해임, 철직되었습니다.

남은 저희 가족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나이 어린 사촌동생들까지 무슨 죄가 있다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교원들로부터, 고향에서 함께 나서 자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정말 피눈물 나는 일이었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배치 받았을 때, 저는 사회의 첫 발을 깊은 산골에, 감시와 통제 속에 들여 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확신으로 ‘비록 지금은 핍박과 고통을 받고 살아도 앞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은 벅차올라 모든 고난을 감내할만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지쳐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믿음은 그렇게 점점 더 확고해졌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서 더욱 나빠진 경제사정과 식량부족으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거리에 시체들이 널렸습니다. 추방되기 전에 제가 살던 곳에서도 많은 아사자가 나왔고, 영양실조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앓고 굶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족은 산골로 추방되다 보니 밭에 낟알을 심어 가꾸고, 집짐승도 길러 먹을 수 있었던 덕분에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저희를 못살게 괴롭히기 위해 깊은 산골로 추방시켰던 것이지만, 저는 주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시고 형제를 살리시기 위해 요셉을 애급으로 먼저 보내셨던 것처럼 저희를 살리기 위해서 이끌어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함께 계실 적에 알게 된 중국에 사시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저희를 찾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중국에서 교회를 찾아와 도움을 구하는 탈북자들을 수소문하신 끝에 깊은 산골로 쫓겨났던 저희를 찾아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과 연결되어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들어와 처음 교회에 갔을 때, 저는 북한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머리를 마주하고 앉아 조용히 소리 낮춰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드릴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달랐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교회 가까이에 갔을 때 높이 선 십자가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고, 조금 더 가까이 갔을 때에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박수치며 찬양하는 소리가 교회 안팎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러면 북한 보위부에서 와서 탈북한 사람들 다 붙잡아 가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웃으시며 “여기는 중국 땅이라서 이렇게 예배드려도 된다.”고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함께 교회로 들어서는 순간, 자꾸 눈물이 흘러 그날 저녁 예배를 드리는 내내 계속 울었습니다. 북한에서 숨죽이며 겨우 예배드리던 기억이 자꾸 떠올라 눈물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목사님과 교회의 도움으로 낯설기만 했던 중국에서의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탈북여성들 대부분이 중국에서는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경우가 많고, 한국으로 오기까지는 무려 5~8년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몇 년이 걸려서야 올 수 있는 한국에 북한을 떠난 지 6개월도 안되어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리며, 그동안 받아 안은 사랑을 한국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다른 이웃들과도 나누는 삶을 살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의 또래들에 비해서는 많이 늦기는 했지만, 지금은 늦둥이 대학생이 되어 저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을 믿으며 열심히 배우고,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언젠가는 북한의 닫힌 문을 열어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기도하고, 북한이 자유의 땅으로 열리는 그날에는 저의 고향과 북한 사람들에게 제가 받아 안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평화와 자유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건만, 주님이 오신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억압받고 갇히고 매 맞고 고문당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지 못하고 지하에서 숨을 죽여 가며 찬송을 부르고 눈물로 기도하는 북한의 지하교인들이 있습니다. 고통의 눈물을 가셔줄 태양의 빛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북한 땅의 수많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밥 한 그릇 놓고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항상 잊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갇힌 자를 해방시키고 상처 받은 자를 치유하는 종교의 빛이 북한 땅의 힘없고 고통 받는 주민들에게도 닿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저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