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증언] 인간답게 살고 싶다

[탈북자 증언]

 

 

다음은 2003년 8월 21일 북한인권시민연합 주최 북한인권난민문제 아카데미
제6강의(탈북자와의 대화) 때 탈북자 배승민씨의 증언 녹취록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배 승 민 (요덕정치범수용소 체험자)

저는 1966년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0년간의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1982년 사회에 진출하여 탄광에 배치 받았습니다. 직업도 자기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당에서 보내주는데에 가야만 했습니다. 10여년간 탄광생활 속에서 진저리를 느끼고 직업을 옮기려 하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기에 무단결근을 하고 생활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노동단련대 생활

쏘련의 붕괴로 하여 북한에서는 정치대학 학생들로 비사회주의 그루빠가 형성되어 각 기관 기업소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단결근으로 걸려 1993년 7월 13일 온성군에서 조직된 고빠꾸(노동단련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강제노동대란 강한 노동과 사상학습으로 교양하는 곳인데 실지로 이 기간을 통해 교양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없습니다. 오히려 반발과 중오만 가져다 줍니다. 군당, 군안전부, 군사로청이 합심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실지로 강제노동대 상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들한테 순종하면 좋아하고 그렇게 하지 안으면 우리한테 차려지는 것은 고달픈 매와 벌 뿐이었습니다. 처음 인사는 모포를 뒤집어씌우고 매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기간 한명이 너무 맞아서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후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후에 그 집에서 제기하고 야단을 해도 뾰족한 안면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설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침 4시 30분 기상하여 식전 작업과 대열훈련을 하고 7시경 거리를 구호를 외치며 한바퀴 뛰는데 이때 자기의 죄명에 따라 근절이라고 소리치며 뛰여야 합니다. 돌아와서는 아침을 먹는데, 개죽하고 같습니다. 그릇에 옥수수만 100g 정도에 소금국, 염장무우, 아니면 배추를 말아주고는 10분동안 다 먹어야 합니다. 밥을 먹고 쉬는 시간도 없습니다. 인차 오전 작업을 시작하는데 오전 작업은 블록크 찍는 일이였으며 하루 과제가 있습니다. 무조건 수행해야 합니다. 하루 12시간 정도 일하고 저녁에는 학습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주로 하는데 우리들은 이 원칙 중에 어느 것에 위반되어 교양을 받는다 하며 학습이 끝나면 사상투쟁이 있습니다. 그날 있은 일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를 한 가지씩 비판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비판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앞에 나와 서야 했습니다. 다음은 상무들이 각목을 가지고 순서대로 두들겨 팹니다. 다음은 자체로 투쟁해야 합니다. 이렇게 끝나면 11시가 넘습니다.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이렇게 끝나게 되면 쓰러져 자는데 아침에 눈 뜨기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첫 탈북과 북송

이렇게 있다가 도망하여 잡혀서 죽도록 매를 맞고 다리를 질질 끌며 또 다시 도망하여 1993년 10월 4일 생각하고 생각하던 끝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습니다. 연변과 심양에서 한달 보름간 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1993년 11월 26일 또 다시 북한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중국 단동에서 신의주로 이관되어 신의주 보위부 구류장에 억류되었습니다. 구류장에 들어서면서 이름은 없어지고 번호로 불리웁니다. 마루판에 발을 모아 앉아 손은 무릎에 놓고 눈은 수직으로 앞을 봐야하며 움직이지 못합니다. 움직이면 살창쪽으로 오라하고 사정없이 때립니다. 너무 아파서 피하면 벌을 주는데 거꾸로 세우기 앉았다 일어섰다 몇백번씩 시킵니다.

재외탈북자구호기금을 조성합시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이 재외 탈북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방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조금만 움직이면 매가 따라 다닙니다. 너무 앉아 있으면 다리에 쥐가 오르고 아프고 쑤셔납니다. 참다 못해 움직여가지고 매를 맞는 것이 더 났습니다. 먹는 것도 말할 것이 없고 잠은 살창쪽으로 머리를 돌려놓고 자야하며 감방에 난방시설이 없고 모포 한장 덮고 자는데 추워서 잠이 안옵니다. 이렇게 한달 반 정도 있다가 온성군 동포 보위부 구류장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여기도 한가지라 하지만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역시 번호로 불리우는데 변소를 본다던가, 이잡이를 하려면 돌아앉아 머리를 숙이고 두손 모아 “선생님, 몇호 감방 몇번 변소 볼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봐라 하면 보고 보지 말라 하면 못봅니다. 앉아 있는 것이 너무 고달파 변소 보지 않아도 우정 변소 본다고 화장실에 가서 물을 틀어놓고 앉아 있다가 나옵니다. 그러다가 들키면 또 매를 맞습니다. 먹는 것은 옥수수밥에 소금국에 염장배추 두쪼각 정도 주고, 국물을 다 마시면 밑에 모래가 한 숟가락 정도 깔려 있습니다. 아침에 기상해서 정돈을 잘못해도 맞고, 앉아서 움직인다고 맞고, 밥을 늦게 먹어도 맞고, 조사 나가서 맞고, 하여간 하루에 7~8번 정도 맞으면 어느새 저녁이 옵니다. 아침에 이빨을 닦으라고 소금을 주면 몇알씩 맨 물에 칫솔질 하고 소금은 주머니에 넣었다가 앉아 있다가 한알씩 꺼내 먹으면 소금이 얼마나 단지 정말 꿀맛입니다. 그러다 들키면 소금도 안줍니다. 칫솔은 뒤에 손잡이를 다 끊고 솔에 1cm 정도 길게 자르고 숟가락도 손끝으로 쥘 수 있는 만큼 자릅니다. 아마 자살을 할까봐, 또 자기네들의 신변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조사 받으러 나갈 때는 손, 발에 족쇠를 차고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조사기간 물음에 불성실하면 또 맞아야 합니다.

3월경이었습니다. 감방이 모두 5개인데 한칸에 2명, 3명, 4명씩 넣었고 하루에 7~8명 정도 빈혈로 쓰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며칠 지나서부터 솔잎을 삶아서 그 물을 한사발씩 주었습니다. 무슨 비타민 무엇이 모자란다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고, 고통속에서 매를 달고 있어야 했으며 감방에 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이 잡는 시간이 조금씩 있는데 이 시간이면 이를 잡는데 엄지손가락 손톱이 벌겋게 물듭니다. 그리고 비듬이 한줌씩 떨어집니다. 계호원들은 교대해서 들어오면 공기가 나쁘다며 문을 열어놓으면 우리는 추워서 떨어야 합니다. 때로는 항문 검사도 하는데 여기에 허약 몇급으로 되면 밥에 콩을 넣어줍니다. 정말로 개만도 못한 신세에 인권은 무시당하고 그들의 놀이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옆 감방에 새별군에서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는 50살 넘었고 중국에서 5년 있다가 잡혀왔는데 너무도 고달파 죽겠다며 벽에 머리를 몇번 박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말로 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고 죽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바에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중국에까지 갔지 반역자지, 앞으로 죽겠는지 모르지, 죽으려고 조사 받으러 다니며 손가락 한마디만한 돌들을 몰래 주워 몇개 먹었고 모포에 실을 뜯어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요덕 관리소 생활

이렇게 짐승처럼 살다가 1994년 4월 함경남도 요덕군 대숙리에 있는 정치범숙영소 혁명화 구역으로 차에 실려 옮겨졌습니다. 차에서는 밖에도 내다볼 수 없게 천을 치고 족죄를 채우고 끌려갔습니다. 정말 구류장에 있던 6개월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생각에는 영영 나올 수 없는 종신구역으로 가는구나 했는데 다행이도 3년 혁명화를 하게 되였습니다. 말이 혁명화이지 지옥과도 같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1997년 4월 말 석방되어 사회로 나왔습니다.

두번째 탈북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굶어서 돌아가시고 동생은 집을 떠나 어디론가 행방불명이었으며 지금도 소식을 모릅니다. 사회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배급도 끊기고 기업소는 거의 죽어 있고 사람들은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 다니면서 엄청나게도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하다 못해 또다시 탈북하여 중국에서 5년간 있다가 2003년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같이하게 된 것은 내가 말하고 여러분들은 듣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며 북한의 어둠 속에서 헤메이는 영혼들도 하루 빨리 인간다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작은 힘들이나마 보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이 자리를 빌어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