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16)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16)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씨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나의 피눈물 나는 脫北記

1998년 8월 18일.

아침이 밝았다. 결심한 대로 중국으로 떠나기로 작정하고 구두 수리 공구가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나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집이며 포도나무며 텃밭은 그간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을이면 포도나무엔 주렁주렁 포도가 익어 가고, 텃밭에는 무와 머루가 탐스럽게 자라 우리 식구들의 겨울 반찬의 반 이상을 담당해 주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발걸음을 돌리자니 가슴이 사뭇 저려 왔다.

걸어서 함홍까지 오니 오전 11시경이 되었다. 함흥역에 들어가서 오늘 차가 있는지 확인해 보니 혜산행이 낮 12시에 있고 그 뒤로 온성행이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 플랫폼으로 가는데 안전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어델 가오?”

“흥원군에 가서 돈도 벌고 생선 고기도 좀 먹자고 가는 길입니다.”

“배낭 안에 든 것을 모두 꺼내보시오.”

꺼내봤자 구두수리 공구밖에 나온 게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혜산행 열차가 들어왔는데 사흘 만에 오는 차인지라 그야말로 벌떼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 정거장이라도 함흥지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열차에 올라타 보려고도 했으나 도저히 발을 붙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기차 대가리는 물론이고 기차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로 꽉 찼다. 30분 후, 그 열차는 나를 플랫폼에 남겨 둔 채 무정하게도 그냥 떠나고 말았다.

다음 열차는 오후 3시에 왔다. 맨 앞으로 가서 기관차 바로 뒤칸에 얼른 올라탔다. 앞서 간 열차보다는 손님이 좀 적은 것 같았다. 열차가 신포를 지나고 양화역에 도착하자 안전원 50여 명이 다가와서 창문에 매달린 사람과 지붕 위에 올라앉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 내렸다. 그리고 맨 앞 승강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권총을 뽑아 흔들어대며 욕설을 퍼부었다.

“귀가 먹었어? 말이 들리지 않아? 이 새끼 !”

나는 얼른 일어나 기관차 위로 올라가려는데 기관차 조수가 여기는 손님들이 타는 곳이 아니라면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나는 북청까지 가는 사람인데 돈 200원을 주겠으니 강산리만 좀 통과하게 해주시오.”

내가 사정을 하자 조수는 200원을 챙기면서 마지못한 듯이 허락을 했다.

열차가 강산리를 통과할 때 안전원들이 열차 지붕 위 또는 승강대에 매달린 사람들을 끌어내리는 데는 다 이유가 었다. 강산리에 건설 중인 원자력발전소에 와 있는 한국 기술자들이 지나가는 기차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서 한국으로 보내기 때문에 나라 망신이라는 것이다. 망할 대로 다 망한 나라가 망신은 무슨 놈의 망신인지.

무사히 강산리를 통과한 후에 기관차에서 내려와 먼저 앉아 있던 승강대로 다시 갔다. 열차는 함흥을 떠난 지 3일 만에 청진에 도착했으며, 거기서 유개(有蓋) 화물차(필자 注지붕이 있는 화물차) 다섯 차량을 앞쪽에 더 붙였다. 나는 다시 첫 번째 화물차 승강대의 좁은 복도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잠시 후 군복 차림에 계급장은 없고 하족을 단단히 맨 군인이 내가 타고 있는 화차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질문을 퍼부었다.

“아바이는 어데 가오?”

“온성에 갑니다.”

“온성에는 누가 있는 거요?”

“예, 나의 먼 친척이 온성 안전부 부장으로 있는데 그 집에 가서 돈버는 일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몇 개월 동안 지내려고 갑니다.”

“뭘 해서 돈 벌 생각이오?”

“이것으로 벌지요.”

나는 배낭 끈을 풀고 그 속에 든 오리발이며 바늘, 실, 고무풀 등 각종 도구를 보여 주었다.

“아, 그래요? 나도 온성에 가는데 같이 갑세다.”

그가 고급담배 한 가치를 주는데 받아 보니 중국산 나비표였다. 나는 속으로 이놈이 냄새를 맡고 내 뒤를 밟는 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지나갔다. 왜냐 하면 북에서 한 갑에 50원이나 하는 비싼 중국 담배는 간부들이나 즐겨 피우기 때문이었다. 10여 분 후에 그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나가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놈은 보위부 놈이 분명했다.

내가 함주 집에 열쇠를 채워 놓고 떠난 사실을 나중에 함주 보위부에서 알고는 함북 보위부에다 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나의 가족 사항에는 처와 아들만 있을 뿐 친척은 없다. 그러나 내가 옹성군 안전부장이 먼 친척이 된다고 한 데다 또 구두 수리공으로 위장까지 했으니 그는 나를 몰라보고 그냥 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함주를 떠나올 때 세포비서에게 가서 당비를 물면서 영원군에 장사하러 간다고 미리 손을 썼고, 옆집 사람에게도 영원군에 장사를 가는데 15일 이상은 걸릴거라고 말해 놓고 왔던 것이다.

열차는 회령을 지나고 얼마 있지 않아 남양에 도착했다. 역에는 안전부 요원과 보위부 요원이 좍 깔려 있었다. 열차가 종착역인 온정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열차에서 내려 많은 승객들 틈에 섞여 역사로 가는데 그 옆으로 관상용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나는 역원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재빨리 나무들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안전은 한데 비가 와서 굵은 빗방울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속에서 2시간 가량 기다렸다가 오후 4시경에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새벽이 되어서 그런지 역 주변은 조용했다. 역사(驛舍)로 가려면 벽돌담을 넘어야 하는데 담 가까이 가보았더니 너무 높아서 그냥은 넘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 옆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역사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옷이며 배낭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역 대합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신문지를 깔고 코를 골면서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젖은 옷을 대충 짜서 입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추워서 잠도 오지 않았다. 수중에 있던 300원은 기관차에 타느라 200원을 써버렸고 또 사흘간 먹었으니 돈은 바닥이 나 있었다. 날은 밝았으나 돈은 없고 배는 고프고 게다가 춥기까지 했다. 거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중국으로 가려면 월경(越境)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두만강 가로 가서 정찰을 해야 했다.

강가에는 군인들이 중간 중간에 이동보초를 서고 있었다. 강물도 엄청나게 불어나 강폭이 30m 정도는 되어 보였으며, 물살도 빨라 시속 10마일은 될 것 같았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보아 전과는 사정이 달랐다. 우선 내 건강이 나빠진 것이 문제이고, 또 물살이 빨라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남양으로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슬픈 왜가리

남양을 향해 도보로 큰길을 따라 2시간 정도 걸었더니 야산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농장원들이 모두 강냉이 경비에 동원되어 있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경비도 없고 조용했다. 얼른 밭에 들어가 겁도 없이 양손에 강냉이 한 움큼씩을 따서 배낭 속에 쑤셔 넣었다. 그 밭은 국경경비대에서 관리하는 밭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고갯길은 구불구불 뻗어 있었다. 공연히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지름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다가 군대 막사가 보이기에 그 아래에서 보초서고 있는 병사에게 소리쳐 물어보았다.

“이 길이 남양가는 길인가요?”

“여보시오, 저람 위수구역에 들어왔으니 빨리 내려오시오.”

내려가 보니 그 곳은 국경 초소 소대지휘부였다. 그 곳에서는 중앙당 부장도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고 신분이 확인된 후에야 움직일 수 있는, 초소 중에서도 가장 엄중하게 단속하는 초소였다.

“당신 간첩 아니야? 왜 남의 위수구역에 들어온 거야?”

“길을 몰라서 그랬습니다. 나는 구두 수리공인데 함흥지방에서 살다가 남양이 돈벌이가 좋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신분중 좀 봅시다.”

공민증을 보여 주었더니 배낭 속도 보자고 했다. 배낭 속의 구두 수리 공구를 본 뒤에는 자기네들도 수리할 것이 있다면서 구두 2컬레를 가져왔다. 그것을 수리해 주고 나서, 남양까지 자동차도 얻어 타고 아침 밥도 좀 달라고 했다.

“아침밥은 다 먹고 없는데 누룽지라도 먹겠소?”

“괜찮습니다. 아무거나 좀 주시오.”

그들은 누릉지 한 사발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데 남양 가는 짐차(트럭)가 들어오기에 얼른 집어탔다. 가는 길에 온성에서 두만강이 불어난 까닭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도문시를 끼고 흐르는 강은 물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강물이 두만강과 합류해서 흐르다 보니 온성에 와서는 물도 불어나고 물살도 빨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짐차는 남양역 앞에서 멎었다. 차에서 내려 해관 쪽을 보니 세관 정문으로 남녀 30여 명이 수갑을 찬 채 끌려오는데, 여자들은 모두 배가 남산 만했다. 그들은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 송환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었다. 혹시 저 대열 속에 내 가족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다. 보위부 임시 사무실 앞에 가서 아들의 이름을 대여섯번 크게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기에 겨우 마음을 놓았다.

남양에 오긴 했으나 잠자리며 먹는 것이 걱정되어 수습에 나섰다. 우산을 장터에 내다 팔아서 그 돈으로 잠잘 집을 얻어 보려 했으나 모조리 거절당했다. 남양에서의 하룻밤 숙식비는 15원이었다. 할 수 없이 시장에 가서 앉아 있는데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합숙(합숙소)에 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나서자 자기 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집은 합숙을 하지 않는 집인데 갑자기 돈이 필요해서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30원을 먼저 달라고 했다.

“당신을 어떻게 믿겠소?”

“그럼, 우산이라도 맡기겠습니다.”

그는 내게 우산을 내밀었다. 30원을 주었더니 한 시간쯤 후에 그가 돌아왔다. 내가 준 30원으로 술을 마시다가 돈이 떨어져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 청년은 회령 김정숙사범대학 2학년생인데, 아버지는 남양역에서 중국어 통역을 하고 있고 동생은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다가 보위부 단속에 걸려 6개월 간의 강제노동을 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지금은 남자 셋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은 그들이 먹는대로 내내 죽만 먹었다.

1998년 8월 25일.

낮에 세관 옆 강둑에 가보았더니 중국 친척을 찾아서 온 북한 주민들이 700800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이들은 중국에 소식을 보내 놓고 이제나 저제나 목을 길게 빼고 중국 쪽만 바라보고 있어서 남양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왜가리’라고 불렀다.

친척을 기다리느라 한결같이 중국 쪽만 바라보고 있어서 외롭고 슬픈 왜가리가 되었나 보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중국에서 친척이 나오는 비율은 한 달에 겨우 10건 미만으로 정말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고 한다.

떠다니는 시체들

1998년 9월 1일.

오늘은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강을 건너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중국에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다는 길주에서 온 아바이에게 길을 물어 보았더니 그는 100달러만 주면 길을 안내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50달러에 흥정이 되어 그 날 저녁에 떠나기로 그와 약속을 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시장에 갔더니 78세쯤 되는 아이들이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서 남양에 왔으나 일 년이 넘도록 기다리는 친척은 오지 않고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울어대니 어쩔 수 없이 농장이나 개인 밭에 들어가서 강냉이를 훔쳐와 삶아서 아이들에게 준다고 했다. 지금은 밭에 강냉이라도 있으니까 먹여 살리지만 가을이 지나면 그마저도 없어서 모두 굶어죽을 것이라고 걱정들이 태산 같았다. 시장 주위에도 중국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100명도 더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노인도, 어린아이를 업은 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여름 장마로 두만강은 상당히 불어 있었다. 강폭은 약 20m이고, 수심은 사람 키의 1.5배 정도이며 물살이 무척 빨라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부력을 타지 않고서는 70~80% 정도가 익사하고 만다. 헤엄이라면 두려울 게 없는 나도 옷을 입고 신발도 신은 채로 강을 건너려니 처음 계획했던 위치에서 40여m나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니 헤엄을 못치는 사람들은 물귀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만강에는 탈북자들의 시체가 상당히 많이 떠다니는데 남자 시체는 가끔씩 보일 뿐 대부분이 여자들의 시체라고 한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시체를 꺼내어 묻어 주는 사람도 없다. 나도 강물에 떠내려가던 시체가 물풀에 걸려 더 가지는 못하고 중국 쪽에 한 구, 북한쪽에 한 구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두만강뿐 아니라 압록강도 장마철이 아니더라도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기 때문에 여자들은 많이 빠져죽는다. 아내도 혜산에서 장백으로 넘어갈 때 시체 2구를 보았고, 둑 밑에서 열 살 정도의 핏자국이 있는 아이 시체를 보았다고 했다. 아마 그 아이는 변방 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해질녘에 길을 안내하겠다던 사람(필자 注그는 길주에 살고 있는데 하얼빈에 있는 중국 친척을 찾아갔다가 중국 돈과 헌옷 세 마대를 얻어 강을 건너와 옷을 팔고 있다가 보위부에 잡혀 물건들은 몽땅 빼앗기고 지금은 엽초를 썰어서 파는 담배 장사를 하고 있었다)이 와서 그와 함께 강냉이밭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한참을 앞서 가던 그가 나에게 위치를 일러 주고는 돌아가 버렸다.

“큰길을 건너면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가면 탑이 있다. 그 탑 뒤로 10m를 가면 두만강 둑이 나온다. 가다가 경비병이 오면 숨어 있다가 지나간 다음에 다시 출발하라.”

담배 장수가 일러 주는 대로 갔더니 탑이 나왔다. 탑 뒤에 숨어서 동정을 살펴보았으나 군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안심하고 두만강 둑을 넘었다. 그 다음에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펄을 지나서 물 있는 데까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밤중인지라 물소리가 더 크게 났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상류 쪽 보초소에서 보초가 전지를 들고 뛰어오고, 하류 쪽에서도 전짓불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강물 속에서 두손을 모아 기도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둑밑에 바짝 붙어서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짓불을 들고 사방을 비춰 보던 보초가 다시 초소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강물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배 아래에 차던 물은 가슴, 목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몸은 자연히 물살에 떠밀리면서 둥둥뜨기 시작했다. 20m쯤 그렇게 헤엄을 쳤더니 중국쪽에 닿을 수 있었다.

드디어 나도 귀향을 위한 중간 경유지인 중국 땅을 밟은 것이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맥이 빠져서 강가에서 꼼짝않고 10여분 정도 드러누워 있었다. 옷을 모두 벗어서 대충 물기를 짜 입고 방향을 어느쪽으로 정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문 시내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시내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니 변방 경비사령부가 보였다. 한참 동정을 살피고 나서 배짱 좋게 그 앞을 유유히 걸어갔다. 다행히 단속은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