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⑭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⑭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골수염

1997년 12월.

손가락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골수염이라고 했다. 그냥 두면 뼈 전체가 썩는다는 의사의 말에 겁이 더럭 났다. 군당 6과 지도원을 내세워 함주 군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하는 날은 지독히 추웠다. 수술실에 가지 않고 외래 환자들이 치료받는 침대에 누워 있는데, 외과과장이 와서 마취도 하지 않고 대뜸 내 가운데 손가락을 칼로 째는 것이었다.

“너무 아프니 제발 좀 살살 해주시오.”

“뼈가 썩으면 팔 전체를 잘라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약간 아픈게 낫지 않겠소.”

의사는 내 가운데 손가락 뼈를 도려내고 있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으나 항생제가 없어서 약도 못먹고 주사도 못맞았다. 사흘이 경과하자 손등이 붓고 아프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뽕나무가 상처에 좋다는 말에 아내와 둘이서 산에 가서 뽕나무를 구해와서 불에 태워 숯을 만든 다음 그 숯을 우려낸 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더니 조금은 시원해졌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후, 다시 함흥의대병원 정형외과에 입원을 했으며, 입원한지 일주일만에 내 수술 차례가 되어 수술실에 들어갔다. 이번 수술은 손바닥까지 모두 째는 수술인데도 의사는 또 마취도 않고 수술을 하는 것이었다. 생살을 째는 고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실습생 학생들이 주사 놓는 연습을 한답시고 내 몸이 모르모트라도 되는지 계속 주사 바늘을 찔러대는 것이었다.

“이년들아, 사람 죽겠다!”

너무 아파서 고함을 질렀더니 더이상 주사 바늘은 찌르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입원실에 갔더니 군인 두명이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그들은 병실이 너무 추우니까 차로 장작을 싣고 와서 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그 덕에 몸도 녹이고 눈도 좀 붙일 수 있었다.

한시간쯤 자고 나서 저녁을 먹으려고 풍로에 나무를 때서 냄비에 통강냉이 한줌을 넣고 끓여 한숟갈 입에 물자 강냉이가 설익어서 목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픈 몸에 굶을 수는 없고 그것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누워서 잠을 청했으나 통증이 너무나 심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두 모자의 피눈물 나는 대탈출, 그 첫번째

그때 아내와 아들은 혜산으로 해서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두번째의 혜산행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두 모자가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 즉 첫번째 중국행을 시도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97년 5월 14일.

두 모자는 새벽녁에 무사히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변에 있는 중국인 집으로 가서 30여분간 문을 두드렸더니 그제야 중국인 노인이 나타나는데 대문도 열지 않고 큰 빵 두개만 대문 위로 내미는 것이었다. 아내가 중국말로 사정 이야기를 했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강을 건너오다 보니 옷이 몽땅 젖어서 좀 말리려는 것입니다.”

“당신들 북조선 사람이 아니오?”

“그래요. 북에서 왔어요. 나는 40여년전에 중국에서 살다가 북조선으로 갔는데 이제 고향을 찾아오는 길이랍니다.”

아내의 말에 집주인은 얼른 대문을 열어 주면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집에서 두 모자는 속옷과 겉옷을 한벌씩 얻어 입고 아침도 얻어먹었다. 노인은 이곳이 강이 가깝기 때문에 공안국에서 매일 한차례식 온다면서 빨리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 즉시 둘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중국 쪽은 산림이 우거져 숲속에 잠적하기만 하면 찾기가 힘들었다. 두 모자는 30여리를 내륙 쪽으로 걸어 들어가 장백현 18도구에 다다랐다.

소로에서 두 모자는 잠이 들었는데 누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떠보니 18도구에 살고 있는 중국 조선족 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 산속에도 공안원들이 자주 다녀서 잘못하면 잡힌다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는 말에 두 모자는 그 노인을 따라 그의 집에 갔다. 그날 노인이 산에 온 이유는 집에서 키우는 소 네마리 가운데 한마리가 없어져서 소를 찾기 위해 산속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 집에서 그 동네 장씨라는 의사의 도움으로 아내는 심양의 오빠와 흑룡강성의 언니에게 무사히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열흘이면 답장이 올텐데 20일이 경과해도 언니에게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고 조바심만 났다. 그 집도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려 불안해서 낮에는 그 집 창고의 큰 궤짝 안에 숨어 있었다. 점심은 주인이 몰래 갖다 주어서 해결하고 저녁 늦게 주위가 조용해지면 창고에서 나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결국 두 모자는 그 집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아침을 먹고 나서 집주인에게 누룽지를 조금 얻어 배낭에 넣고 길을 떠났다. 사흘동안 산속을 헤매면서 서쪽으로 간다고 한 것이 장백현에서 100리도 가지 못했다. 날이 저물면 낙엽을 긁어모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얻어온 누룽지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잠을 청했다. 나중에는 그 누룽지마저도 떨어져서 배도 무척 고팠다. 산길을 계속 가다가 동네가 보이기에 밥이나 좀 얻어먹으려고 마을의 한 집에 들어갔더니 주인은 없고 환자 혼자서 살고 있었다. 그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변방 규찰대가 와서 끌고 갔다.

“배가 고픈가?”

“예.”

그들은 두 모자에게 빵 두개를 갖다 주었다. 그 빵을 다 먹기도 전에 공안국 순찰차가 와서 가자는 것이었다. 그 후엔 장백현 공안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감방에 사흘동안 갇혀 있었다. 감방 안에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14명이나 더 있었다.

장백현에서 혜산 보위부로 송환되는 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14명 모두를 태운 차가 혜산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다리에 이르자 중국 공안국에서 이들을 모두 혜산 보위부에 넘겼고, 혜산 보위부에서 나온 보위원(보위부 비밀정보원) 한 사람이 14명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손을 비닐 끈으로 묶은 다음 혜산 시내로 끌고 갔다.

이들은 손을 묶인채 무리를 지어 걸어 들어가던 도중에 처와 같이 묶여 있던 여자가 손으로 끈을 풀고 보위원이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정신없이 뛰어 달아났다. 앞서가던 보위원들이 뒤돌아 보다가 달아나는 그 여자를 발견하자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을 부탁해 놓고서는 그 여자 뒤를 쫓아갔다. 순간, 아내는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끌려가던 나머지 13명도 모조리 달아나 버렸다.

저녁을 사먹으려고 아내가 시장에 갔다가 같이 묶여 있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고 그 후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무사했습니까?”

“보위부에 잡혀가서 실컷 얻어맞고는 풀려났어요. 우리 집은 함경남도 함흥시이고 집에는 자식과 남편도 있지만 중국에 건너온 이유는 식량 때문이야요. 중국에서는 돈 많은 중국 남자와 살고 있었디요. 중국 남편이 외출하면서 꼼짝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했는데 잠시 후에 공안국에서 오더니 가자고 해서 편지라도 남겨두려고 종이를 찾다가 텔레비전 함 뒤에서 중국돈 2만원(元)을 발견하여 그 돈을 가지고 장벽 공안국에 끌려갔다가 혜산으로 송환된 것이야요. 만약에 또 붙자히더라도 강을 건너 중국 남편에게 꼭 가고야 말 겝니다. 오늘 저녁에 가려고 하니 아주머니도 나하고 같이 가십시다.”

그런데 아내는 그만 시장 인파에 묻혀 그녀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모자는 다시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강 근처에 접근했다. 이날은 보천보전투(필자 주:김일성 부대가 양강도 보천군에서 김일성에 맞서는 경찰관 몇명을 쏴 죽인 사건을 말한다) 승리기념일이어서 평양에서 많은 간부들이 혜산에 왔다. 경비는 철통같고 밤새껏 불빛은 꺼질줄 몰랐다.

두 모자는 밤을 꼬박 밝히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혜산역 대합실로 돌아왔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거듭한 끝에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준비를 해가지고 오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집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두 모자의 피눈물 나는 대탈출, 그 두번째

1998년 3월 1일.

집에 돌아온 후 또다시 혜산으로 해서 두번째 중국행을 결심하고 두 모자는 길을 떠났다. 그래도 강이 얼어있을 때는 얼음을 타고 건너기 때문에 한결 수월하지만 두 모자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얼음이 다 녹아내려 강물만이 흐르고 있었으며, 3월이라지만 아직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중국으로 가려면 일단 강을 건너야겠기에 압록강 둑 밑을 걸어가는데 군인이 뒤에서 불렀다. 못들은 척하고 계속 앞만 보고 재게 걸었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섯!”

군인이 총을 쏘며 뛰어왔다. 군인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초소 지휘부에 가서 몸수색을 했다. 배낭 속도 모두 검열했는데 100년 묵은 산삼 한 뿌리와 200년이 묵은 고서 한권이 나왔다.

“중국에 가려고 준비했지? 너희들 보위부에 보내면 어떻게 되는줄 알지? 빨리 대답해.”

“중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국경에 장사차 온 상인들이오.”

아내가 적당히 둘러댔다.

“장사하는 사람이면 왜 돈이 없어?”

“산삼과 고서를 팔아서 물건을 사려고 합니다.”

그들은 더이상은 묻지 않고 사흘동안 밥 한끼 안주더니 두 모자를 풀어 주었다. 그들이 두 모자를 보위부에 보내지 않고 풀어준 까닭은 산삼과 고서를 자기네들이 먹기 위해서였다. 만약 사람만 보내면 조사를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값진 산삼과 고서를 상부에 올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중국에 간들 또 잡혀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두 모자는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채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