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⑬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⑬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멀쩡한 기계로 강냉이 바꿔 먹기

1996년 3월.

식량 사정이 계속 어려워지자 파고철을 가져오면 강냉이와 교환해 준다는 말에 작업반에서도 삽과 곡괭이를 들고 하천이며 철길이며 그밖에 철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모조리 파헤치고 다녔다. 약 일주일간 수집한 결과 파철 6t을 수집할 수 있었다. 파철 1t이면 강냉이 300kg이니 정말 해볼 만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집에 있는 철근과 쇠붙이도 몽땅 내왔다.

자동차에 파철을 싣고 흥남항에 가면 차에 파철을 실은 채로 저울에 단다. 그 다음에 파철을 차에서 내려 놓고 식량을 받으러 부두로 가는데 어찌나 차가 많은지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 곳에서는 배안에서 기중기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쌀을 4t씩 부두로 옮긴다. 그 쌀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마대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쌀바가지가 내려오면 외국인이 보건 말건 상관없이 남의 차에라도 올라가서 쌀을 퍼담는다.

그러면 차를 타고 식량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자기네 차에 올라탄 사람들을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사람들은 머리에서 피가 마구 흘러내려도 아랑곳 않고 식량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뛴다. 세상에 아무리 식량에 기갈이 들었다지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완전히 무정부 상태요, 힘센 놈만 먹는 세상이다.

철통같이 경비를 선 덕택으로 나는 쌀을 받을 수 있었다. 차에 쌀을 싣고 공장에 도착하니 후방부에서 나와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당비서 몇십kg, 지배인 몇십kg, 기사장 얼마, 부비서 얼마, 공장 공사장에 일하는 사람들 얼마 , 이런 식으로 떼고 나면 실제로 파고철을 갖다 바친 사람들은 불과 20여kg밖에 받지 못한다. 매번 작업반에 식량을 싣고 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간부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많은 곡식들을 차지하고 있다.

파철 수집이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공장 작업반 안에 있는 기계 부속품들을 파철로 갖다 바치기까지 하여 멀쩡한 기계가 고물이 되어 쓰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같은 현상은 전동기공장 뿐 아니라 군 공장은 물론이고 함흥 지방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모두 같은 형편에 놓여 었다. 자재가 있다 하더라도 기계가 모두 고물이 되었으니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리가 만무하다.

화전농사 헛농사

농장원들은 이른 봄부터 화전을 일구어 옥수수와 콩을 심는다. 그 일은 농장일 때문에 낮에는 할 수 없고 농장일이 끝난 저녁이나 출근하기 전에 화전에 가서 손발톱이 닮도록 피나게 일을 한다. 그러나 가을에 농장에서 분배할 때는 분배받는 몫 가운데 화전에서 수확한 양만큼을 제하고 주므로 농장에서 일한 품삯은 거의 받지 못하는 형편들이다. 이 경우에도 농장관리위원장이 화전의 소출량을 마음대로 조정하며 그의 눈에 밉보이는 사람들에게 주로 적용한다.

처음 화전 농사를 시작할 때 국가에서는 “식량난이 왔으니 농장원들은 농장일에 지장을 주지 않게 주의하여 화전을 일구어 개인이 먹는 것은 관여치 않겠다.”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 이전에는 화전 농사를 국가에서 철저히 반대했으므로 산 속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다가 들키는 날에는 당원은 출당되고, 일반 주민들은 산림을 훼손한 죄로 벌을 받았다. 그래서 산골 농장에서는 땅을 비워 두고도 숱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왔다. 이런 사정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 화전 농사를 해도 좋다는 김정일의 승인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후부터 농장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산속으로 들어가 밭을 일구었다.

이리하여 몇년 동안 별 탈 없이 화전 농사를 지어 강냉이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을 정도가 되었는데, 갑작스럽게 1996년에 화전도 모두 국가의 땅이라면서 개인이 일궈 놓은 화전을 모조리 농장에 귀속시켜 버렸다. 예고도 없이 추수한 것을 관리위원회로 가져오라고 하니 어느 누가 힘들게 지은 곡식을 농장관리위원회에 바치겠는가? 아무런 응답이 없자 강압적으로 텃밭을 재어 그 밭에서 가능한 소출량을 뽑아 놓고는 나중에 분배할 때 그 양을 제하고 주었으며, 빼앗은 곡식은 모두 나라 창고에 넣어 버렸다. 그러니 결국 농장원들만 녹아난 셈이었다.

농사 계획이 없을 때는 정량에서 40~50%씩 덜 받게 되므로 일년에 4~5개월은 식량이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그 모자라는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산골 농민들은 이를 악물고 노는 땅이나 곡식이 자랄 만한 곳을 찾아 화전을 일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부터 불어닥친 식량난에 함주군 홍봉리에서도 숱한 아사자가 발생했다.

무상치료·무료교육의 진실

북한에서는 세금도 일절 없고, 무상치료에 무료교육을 한다고 늘 선전하고 있지만 그것도 역시 속 빈 강정이다.

세금이 없다면서 그러면 전기세, 수도세, 지세(땅세)는 세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수도사용료니 전기사용료니 하고 말만 바꿨을 뿐이지 실지로는 다 거두어 간다. 노동자가 한달 내내 일해도 80~90원을 받는데 그 기본 노임에서도 세금을 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장 총수입에서도 국가에 수십만 원씩 바치고 있으니 그것은 세금이 아니고 무엇인가?

무료교육을 한다고 말은 허울좋게 하지만 학교에서 유리창 하나 깨져도 학급에서 돈을 모아서 갈아 끼우고, 책걸상이 망가져도 학생들에게 돈을 거두어 간다. 그리고 인민학교 3학년부터 대학생까지 농번기만 되면 모내기다 김매기다 하며 농사일을 2개월간 시키고 있고, 특히 대학생들은 가을걷이 전까지 석달 동안 노력봉사라고 하는 농사일을 해야 한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추수할 때 또다시 학생들을 동원한다. 그들의 노동력을 돈으로 따진다면 등록금과 학비를 모두 내고도 남을 것이다.

무상치료란 말도 역시 빛 좋은 개살구다. 자기 주머니에 돈이 없거나 약이 없으면 병이 나도 고칠 수 없다. 속병을 앓는 환자는 식사 조절로 병을 고치라고 하고, 상처가 심한 환자는 하루에 한차례 소독만 해주는데 그나마도 정전일 때는 그 한번의 소독도 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때는 병원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1996년부터는 입원 환자들에게도 식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다. 양정사업소에 가면 창고마다 쌀과 강냉이가 그득한데도 인민들에게는 한 톨도 주지 않고 오직 군대 트럭만이 와서 적재함이 넘치도록 실어갈 뿐이다.

병원에서 식사가 나오지 않자 입원환자들은 집에서 밥을 날라다 먹는데, 집이 먼 환자들은 보호자가 따라와서 풍로에 나무를 때서 밥을 해 먹인다. 겨울에는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서 환자들은 무척 고생들을 한다. 집에서 이불을 두세 채씩 가져와서 덮고 옷도 밤낮으로 있는 대로 다 꺼내 껴입고 추위를 견디어 낸다.

간부들의 전용인 특별호동에는 개별적으로 경유를 때는 난로가 있지만 그 외에는 따뜻한 곳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다. 의사실에는 의사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으로 구멍탄(구공탄) 온돌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는데 그런 곳도 각 과별로 한 군데씩 있을 뿐이다.

약이 없는 병원에서 치료를 한들 얼마나 잘하겠는가. 견디다못한 환자들은 죽어도 집에 가서 죽겠다고 모두 퇴원해 버린다. 이와 같은 현실이 북한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무상치료의 실체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