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⑫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⑫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인민들-


대형사고는 입소문으로만 전해지고(속)

이 날 열차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만 해도 수백명은 되었을 것이다. 사고를 당한 가족들이 길주역에 가서 역장을 붙들고 고함을 치며 항의를 했다.

“인명 피해가 났는데 침묵만 지키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나 역장의 대답이란 무책임 그대로였다.

“누가 타라고 했나? 지붕 꼭대기는 위험하니까 타지 말라고 했고, 특히 겨울에는 고드름이 달리기 때문에 위험한데 자기들이 죽으려고 타놓고 괜히 역에 와서 항의를 한다.”

역장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딴청을 피웠다.

‘공화국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고 노래처럼 외우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사람 죽는 것을 파리 한마리 때려잡는 것보다 쉽게 생각들을 하고 있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1973년 11월. 함주 전동기 공장 공무작업반 전공 ○○○는 군대에 들어가서 평양 근무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평양에서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본인도 그 가족들도 상당히 반가워했다. 그러나 그 반가운 것도 잠시뿐, 그의 근무지는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내려가 굴 뚫는 작업장, 즉 전쟁준비를 위한 평양 지하철 공사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 공사의 기본 굴진이 거의 끝나고 내부 작업을 할 무렵에 그의 부대는 본평양에서 동평양으로 넘어가는 대동강 밑 지하통로를 뚫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일을 시작할 단계에는 암반도 좋지 않고 100m 지하라고는 하지만 위험하다는 말이 오가면서 공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런 와중에 열성 사로청원들이 “당에서 바라고 있는데 조선의 청년들 앞에 못할 것이 무엇인가.”하며 궐기대회를 벌이는 바람에 대동강 밑 터널을 뚫기로 결론을 내렸다.(필자 注:이 문제는 높은 간부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일년간은 별 탈없이 일이 잘 진척되어 대동강의 3분의 1 정도를 뚫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동평양으로 가는 굴 입구에 문을 만들어 달아놓고 그 문만 내리면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도 갖추었다. 공사를 하는 중간에 굴이 무너져 물이 들어오게 되면 전쟁준비를 위해 10여년을 고생하면서 뚫어놓은 굴이 폐갱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물을 퍼낸다고 해도 몇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사전대책을 철저히 세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굴진하던 곳에서 갑자기 물이 터져 나왔다. 수습할 수도 없을만큼 큰 물이 천장에서 터졌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굴 속에는 한개 중대병력과 기술중대, 그리고 연구소의 연구사들과 도면작성자 등 300여명이 있었으나 출입문 부근에서 일하던 몇명만 살아나왔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굴속에 갇혀 사망했다.

1976년에도 17호공장(화학제조공장) 폭발사고로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바도 있다.

함경남도 신상역을 출발한 평양 온성행 열차가 정평역 길목에 위치한 철교 위를 지날 때 기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철교가 그만 무너져 내렸다. 기관차와 수화물차만 무사하고 그 뒤에 연결되어 오던 객차는 차례로 다리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열차 지붕 위에 앉아가던 사람들과 승강대에 매달려 가던 사람들은 거의가 다 죽었고,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도 상당수 죽었다. 사망자들을 사고 현장에 눕혀놓았는데 700~800구도 더 되었으며, 부상자들도 1000여명에 달했다. 정평군 병원이 넘쳐서 부상자들을 함주병원으로 운반했는데 함주병원에서도 병원 바닥에조차 눕힐 자리가 없어서 함흥의대 병원으로 나머지 환자들을 후송했다.

사망자들에게 보상은 거의 없었다. 죽은 사람이 남자일 경우에는 여자 재킷 하나, 여자일 경우에는 남자 양복지 한벌을 주었고, 무연고자는 그냥 묻어 버렸다. 사고 당시에 평양에서 헬기 한대가 날아오자 사람들은 구호약품을 실어왔나 보다 하고 기대들을 했는데 그 헬기는 중앙텔레비전 방송원만 달랑 태우고 평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반 주민들은 죽어도 괜찮다는 중앙당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부상자들은 치료할 약이 없어서 숱하게 죽었는데도 정부나 중앙당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개고개 열차사건 또한 유명하다. 그때도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만포에서 출발한 여객열차는 강계를 떠나 개고개를 넘다가 연결고리가 빠지는 바람에 수백명이 죽는 등 일대 혼잡을 초래하였으나 이 역시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다.

개성~평양간 고속도로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도 수천명의 젊은 청년들이 희생된 대형사고였다. 여름에 다리 공사를 하다가 너무 더워서 건설 중이던 다리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다리가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젊은 군인들은 모두 황천객이 되었다.

크고 작은 사고들을 일일이 들자면 끝이 없다. 일단 사고가 났다 하면 수천명이 희생되는 대형사고이지만 신문이나 방송으로 공개된 것은 단 한건도 없고 오직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한입 두입 건너 나중에는 전국민이 다 알게 된다.

북한 정부의 깜짝쇼

북에서는 일단 정치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면 쇼를 벌인다.

1997년 9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검열을 온다고 하여 공장, 기업소, 인민반 그리고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대청소를시켰다.

양정사업소(필자 注:북한은 협동농장에서 생산된 양곡을 주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각 시와 군에 양정사업소를 두고 있다)에서도 리어카를 끌고 모두 공장으로 출근했다. 10대의 리어카에 각 리어카마다 한두 가마니씩의 강냉이(옥수수)를 실어놓고 유엔에서 파견된 검열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장부도 들고와서 종업원들은 모두 한가마니 혹은 반 가마니씩의 식량이 배급된다고 각자 자기 이름 밑에다 적었다. 그런데 집에 가져 간 식량은 한톨도 축내서는 안되고 저녁 5시부터는 그 식량을 도로 창고 안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탄 차가 오는지를 감시하고 있던 사람이 저만치 그들이 탄 지프가 나타나자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고, 이쪽에서 그 신호를 받은 사람은 또 양정사업소 정문으로 신호를 보내고, 그 즉시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들은 정문에서 리어카를 끌고 나왔다.

유엔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은 사진도 찍고, 비디오 촬영도 하고, 직접 분배하는 현장에도 가보았다. “강○○ 두가마니”, “김○○ 두가마니”하고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하고, 식량을 받아서 싣고 떠나는 장면까지 모두 촬영했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한듯 “오케이”하고 떠나갔다.

오후 5시부터 종업원 약 1000여명은 집으로 가져갔던 식량을 다시 공장으로 가져와 일일이 저울에 달고 나서 반납했다. 만일 가져간 것에서 조금이라도 축날 경우에는 문초를 당하고, 그 부족한 만큼 뒷거래 가격으로 변상을 시켰다.

아이에게 준 과자봉지를 되뺐는 나라

한번은 이런 쇼도 벌였다.

등소평이 북한을 방문하여 함흥 2·8 비날론공장(필자注:2·8 비날론공장은 부지면적 50만여㎡에 종업원 수가 1만명이 넘는 특급 기업소이다. 비날론과 염화비닐, 가성소다, 카바이드, 에틸렌 등을 생산하고 있다)과 흥남비료연합사업소에 들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때도 건강한 청춘남녀 50여쌍을 철길 건널목과 연구실 부근에 미리 배치시켜 놓고 등소평이 온다는 신호가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청춘남녀들로 하여금 거리를 거닐게 했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이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선덕비행장에 내려 자동차로 함주읍을 경유하여 흥남지방으로 간다는 것으로 계획이 짜여 있어서 중앙당에서 사전에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북한에도 자유가 있고 생활도 넉넉하다는 것을 중국 지도부에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쇼를 벌인 적도 있다.

1997년 4월, 전동기공장의 탁아소와 유치원에도 유엔아동기구(UNICEF)에서 검열을 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유치원생들에게 미리 과자가 든 노란 봉지를 나누어 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깡총깡총 뛰었다. 유엔에서 파견된 검열원들이 카메라와 비디오에 그 모습을 모두 담아 갔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봉지를 모두 회수해가 버렸다. 과자를 빼앗긴 아이들은 울먹울먹 하다가 한 아이가 “내것 달라.”면서 울기 시작하자 40여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큰 소리로 울어댔다.

옆에 있던 아이의 부모가 의아해서 그 까닭을 알아보니,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과자를 다시 빼앗아 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들은 우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주지도 않을 것을 왜 주어서 울게 만드는가”하고 항의를 했더니 원장이 나와서 우는 아이들에게 사과 반쪽씩을 주며 달래어 돌려보냈다. 이 사과 반쪽이란 아이들이 학습 중에 자꾸 도망을 치니까 오후 5시경 하학 때까지 붙잡아 두기 위해 집에 갈 때 나누어 주던 것으로 그 사과 반쪽을 얻어먹기 위해 아이들은 춥고 힘들어도 그때까지 참고 견딘다고 하였다.

아아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광대뼈가 튀어나오는데도 군 간부들은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집에 쌓아놓고 먹고 있다. 간부집에는 개도 쌀밥을 먹는다고 하니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회주의가 어떠한 실정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