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⑪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⑪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굶어 죽고 총 맞아 죽고

 

1996년 가을.

 

가을이 왔는데도 먹을 것은 없고 배는 고프고……, 이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밤에 고기를 잡는다는 구실로 체를 들고 논두렁으로 갔다. 눈속임을 위해 논두렁에 체를 대놓고는 부지런히 여물지 않은 벼이삭을 잘라서 마대에 넣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벼이삭을 솥에 넣고 장작불로 쪄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새벽에 건조시킨 다음 절구에 넣고 찧었더니 찐쌀이 되었다. 이같은 방법으로 식량을 구해 20여 일을 버티었다. 이 해는 나같은 벼 도둑질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이 함주군만 해도 500여 세대는 더 되었을 것이다.

 

추수 때가 가까워질수록 말리려고 세워놓은 볏단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기승을 부렸다. 그 넓은 함주벌에 농민들의 한해 수고도 헛되이 이삭을 잃어버린 볏단들이 온 들판에 차고 넘쳤다. 때문에 농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농장보다 먼저 가을걷이를 했다. 그래도 이 해는 가난한 집이어도 대개 벼 한두 가마니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농장에서 추수를 해본 결과, 수확량이 1정보당 1t 내지 800kg 밖에 안되었다. 그러자 이듬해부터는 군대가 동원되어 배낭을 메고 농촌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조리 검열을 했다. 밤에는 논두렁에서 벼를 지켰고, 배추밭·무밭·고추밭, 그리고 과수원에도 실탄을 장탄한 총을 들고 군인들이 보초를 섰다.

 

이듬해 1997년 6월, 함주군 협동농장 남새작업반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이 농장에 침입한 군인 세명을 현장에서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 군인이 남새밭(채소밭)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그 부근에 있던 병사 5명이 농장에 침투해서 무와 배추를 뽑아서 한마대씩 어깨에 둘러메고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정지! 누구얏?”

 

“우리들은 김정일 장군님 전사들인데 농장 남새좀 먹었다고 한들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도둑질한 병사들은 별게 다 설친다는 투로 보초병을 흘낏 쳐다보더니 유유히 걸어갔다. 그러자 보초병이 소리쳤다.

 

“서지 않으면 쏜다!”

 

그러나 배추도둑은 코방귀도 안뀌고 그냥 걸어갔다. 순간 보초병의 손에서는 불을 뿜었고, 이어 도둑질한 군인 가운데 세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두명은 중상을 입었다.

 

농장에 군인들이 처음 보초를 서던 해는 군인도 시민들도 숱하게 개죽음을 당했다.

 

운봉리에서는 농기계 작업소 노동자가 배고픔을 참다 못해 강냉이밭(옥수수밭)에 들어가 강냉이 송치(필자 注:옥수수 이삭의 속) 하나를 따서 앉은 자리에서 날로 먹고 있다가 그만 보초를 서던 군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노동자가 강냉이밭 속으로 냅다 뛰기 시작하자 그순간 군인은 도망가는 노동자의 뒤통수에다 대고 32발이 든 탄창 하나로 콩 볶듯이 마구 쏘아댔다. 나중에 보니 그 노동자의 몸뚱이는 완전히 벌집이 되어 있었다.

 

총 가진 군대와 맨주먹인 백성과의 전쟁으로 인해 남새밭이며 강냉이밭이며 논이며 과수원이며 온 들판은 굶주린 백성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포성 없는 전쟁으로 굶어 죽는 사람, 배고픈게 죄가 되어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포성 없는 전쟁이 포성 있는 전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 1억 달러 어치의 식량만 들여와도 이처럼 비참한 현실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북한 정부는 어디에다 정신을 팔고 있는지…….

 

수백만의 아사자와 수천명의 처단자를 양산했지만 김정일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북한은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의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북한 인민군은 인민을 위한 군대가 아니라 인민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은 마적의 무리들이오, 인민들 위에 군림하여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집단이다. 군대라고 해서 모두가 다 약탈자이고 깡패란 말은 좀 지나칠지 모르지만 거의 대부분의 군대가 깡패요 마적단의 졸병들이다.

 

포성 없는 전쟁

 

1996년도부터 북한 전역을 휩쓴 식량 대란은 평민들에게는 포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봄에 새싹이 돋아나면 그것이 독풀이건 아니건 모조리 뜯어다 삶아 먹는다. 소금·된장·간장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북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때는 많지는 않지만 1인당 몇백g씩 된장과 간장을 배급했고, 소금도 분기별로 얼마씩은 주었다. 그러나 1995년 후반부터 식료상점에서는 물건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 대신에 장마당(농민시장)이 생겨서 간장·된장·김치·파·무·나물 등 필요한 것은 죄다 팔고 있다. 시장에 가면 외제옷 파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싸전은 싸전대로 형성이 되어 있고, 또 빵 장수, 국수 장수, 담배 장수들은 자기네들끼리 한데 모여서 물건들을 팔고 있다. 또 시장에는 소금 장수가 줄을 서있지만 그 흔한 소금마저도 없어서 애를 태우는 집이 수두룩하다.

 

탄이 공급되지 않자 간부를 제외한 일반 주민의 약 80% 이상이 탄구를 헐어버리고 나무 아궁이로 고쳐서 모두들 나무를 때어 밥을 짓고 있다. 때문에 나무 장수들도 얼마나 많은지 리어카에 싣고오는 사람, 소달구지에 끌고오는 사람, 머리에 이고오는 여자들 등 가지각색이다. 이들은 대개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또 시장에는 이불솜·김장독·헌옷·그릇·닭·달걀·찰떡·시루떡 등도 팔고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로 돼지 새끼, 토끼 새끼, 병아리 등 가축 새끼들도 나와 있는데 이들은 전문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집에서 기르던 가축이 낳은 새끼들이다.

 

매일 서는 장에는 보통 500~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열흘에 한번 서는 장에는 함주군민 전체가 장을 보러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은 약 4만~5만의 인구가 이동하는 셈이다. 물건 사러 나온 간부 부인들은 장을 한바퀴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이불솜이나 이불(특히 중국제가 인기가 있다)을 점찍어 두고 와서는 제삼자를 시켜서 사오게 한다.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인민들 - 대형사고는 입소문으로만 전해지고

 

북한의 계급정책에서 독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주로 월남자(越南者) 또는 치안대를 하다가 남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의 가족들인데 이들은 천대를 받는다. 또 옛날 지주나 선주(先主)의 자녀들과 북한 정권에 의해 처단된 자의 가족들도 독재의 대상이며, 그밖에 노동자와 농민의 후예들도 여기에 속한다. 중국·일본·한국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독재의 대상은 아니지만 감시대상에 해당되는 부류이다.

 

1995년 4월 22일, 함주군에 주둔한 어느 군부대에서 밥을 적게 준다고 중대원들이 모여 이렇게 적은 밥을 먹고는 군무(軍務)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이것이 즉각 평양에 직보되어 5시간 만에 평양에서 특수 병종(兵種)의 김정일 친위부대(필자 注:인민군 호위총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경호하는 부대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와는 별도로 김위원장을 밀착 경호하는 2000명의 최정예 친위부대가 있다고 한다)가 내려와서 이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들이 끝끝내 말을 듣지않자 1개 중대병력을 동원하여 그 자리에서 모조리 쏘아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해서 상당히 말들이 많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97년 10월, 함경남도 도당책임비서 현철규가 도당의 몇몇 간부들과 함께 부전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 동행한 여자가 조선예술영화 ‘민족과 운명’(필자 注:북한 영화계에서 최대 히트작으로 꼽히는 다부작 예술영화)에 나오는 박정희(朴正熙)가 부른 노래인 ‘낙화유수’, ‘홍도야 우지 마라’ 등 한국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서 현철규 도당책임비서가 앙코르를 시켰다. 그런데 그날로 이 일이 중앙당에 직보되어 도당책임비서는 출당·철직되었다.

 

도당책임비서 현철규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어머니가 김일성이 1945년 귀국한 직후에 식모 노릇까지 해주면서 김일성에게 점수를 딴 결과, 그 아들 현철규는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 사로청 위원장으로 있다가 차츰 지위가 올라 도당책임비서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한국노래를 제창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북에서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더 하찮게 여기고 있다. 그 숱한 대형사고에도 피해자들은 보상은 커녕 치료도 제대로 못받고 있는 형편이다.

 

1996년 1월, 나는 혜산시에서 금(金) 장사나 해볼까 하고 아들과 함께 함주를 떠났다. 간신히 혜산에 도착하여 아는 집을 겨우 찾았으나 그는 벌써 5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가져간 금을 저울에 달아보니 금 함유량은 고작 5%에 불과했다. 장사는 고사하고 손해만 잔뜩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둑에 올라가서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혜산역에서 평양행 열차를 기다리는데 아침에 떠난다는 열차는 정오가 넘어서야 출발했다.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열차 지붕 위에도 앉을 틈이 없었다. 아들을 겨우 창문으로 밀어넣고 나는 열차 지붕 위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1월의 강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백암역을 지나면 굴을 통과해야 하는데 굴을 통과할 때마다 대여섯 명씩 사라졌다. 수십 개의 굴을 지나 열차는 길주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더니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열차가 굴속을 통과하게 되면 떨어져 죽게되므로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열차에서 뛰어 내리는 편을 택한 것이었다. 굴속에 물이 새 나오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고드름이 천장에 길다랗게 달리게 된다. 어떤 고드름은 사람 허벅지보다 굵은 것도 있다. 멋모르고 열차 지붕에 앉아 굴을 통과하면 고드름에 부딪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김없이 열차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