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⑩

[탈북자 수기]

 

 

나의 북한생활 30년 ⑩

다음은 납북어부 출신 이재근시가 월간조선사에서 간행한 <엽기공화국 30년 체험>을
간추린 글로, 필자의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싣는다.

 

 

이 재 근 (납북어부 출신 탈북자)

제1호 행사 방해죄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방송을 타고 흘러나오자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완전히 희비의 갈림길에 놓였다. 모든 당지도부·보위부·안전부·검찰소·군대 간부들과 그 가족들은 원통하다고 땅을 치고 돌아갔으나, 일반 주민들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별로 신경들도 쓰지 않았다. 당 간부들은 인민들에게 많이 울라고 성화들을 했지만 눈물이야 억지로 나오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는 예를 갖춘다며 15일장을 했으면서 일반 주민들이 사망하면 3일장도 치르지 못하게 한다. 안타깝고 무정한 심정을 가눌 길 없지만 상주들은 당국의 지시를 어길 수 없어서 당일장을 강행해야만 한다.

자기 아버지가 중하면 백성의 아버지도 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품격인데도, 아무리 한 나라의 수령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으면 사라지게 마련인 것이 인간인데도,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는 영생해야 하고 주민들은 죽은 당일로 묻어 버리라고 하니 도대체 이해도 가질 않고 앞뒤도 맞지 않는다.

혼인 잔치도 김일성의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금지시키고 있다. 전동기공장 자재과장은 아버지 칠순 진갑(필자 注:북한에서는 만 61세가 아니라 70세를 진갑이라고 한다) 때 축하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그 즉시 출당·철직(해직)된 바도 있다.

김정일은 자기가 내린 지시에 어긋나는 사람은 밤새 누가 물어갔는지 그 행방조차 알 수 없게 추방해 버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그 한 실례를 들어본다.

이 사람은 김일성종합대학 열공학과를 졸업한 후 안전부 초안과에 근무했다. 이 사람의 아내도 좋은 직장에 다녔고, 아들 역시 종합대생이며 딸도 예술대학생으로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어느날. 그는 안전부 검열관으로서 소좌 계급장을 달고 한 기업소에서 보일러 검열을 끝낸 후 그 곳에서 술을 한잔 먹고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지나가는 차가 있기에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차가 그의 옆에 멎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차의 운전사가 그만 기절초풍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이 차에 타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안전부 소좌의 입은 바늘로 꿰맨듯 딱붙어 버렸다. 오직 차렷 자세를 고수할 뿐이었다. 비록 늦었더라도 “지도자 동지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라고 했다거나 하다못해 만세라도 불렀더라면 무사히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상태로 꼼짝도 않고 50초 이상을 흘려보내 버렸다. 김정일이 탄 차는 지나가고 그 다음 오는 차가 그를 싣고 갔다.

그날 저녁.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어떤 사람이 오더니 짐을 꾸리라고 지시하였고, 영문도 모른채 그와 그 가족은 북창탄광으로 추방되었다. 북창탄광은 지주나 자본가, 지주들이 광복이 된 후에 공산국가의 계급정책에 따라 추방되어 일하는 관리소이다.

평양에서 추방된 안전부 소좌의 죄명은 ‘제1호 행사 방해죄’였다. 그 죄목으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은 모두 탄광행 직행열차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추방된지 일년만에 소좌는 죽었고, 그 가족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정보는 그곳에서 20여년동안 안전원으로 지내다가 제대하고 함주에 온 심철웅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심철웅은 담배공장 자재 인수원을 하던 김성호와는 외사촌간으로, 함주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옮겨 왔다. 그는 북창탄광에 있으면서 죄인 아닌 죄인들을 경비하며 많은 돈을 모았다는데 은사발이며 밥그릇, 은수저, 숟가락 등도 옛날에 잘살던 지주에게서 회수한 것이라고 했다.

꽁꽁 얼어불은 한겨울에도 잉어가 먹고 싶다느니 산천어가 먹고 싶다느니 말만 떨어지면 죄수 아닌 죄수들은 시간을 좀달라고 해놓고는 밖으로 나가 저녁 식사전까지는 반드시 물고기를 들고 왔다고 한다. 그들은 그런 심부름을 무척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고기가 많이 잡히는 날은 자기집에도 떨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철웅은 북창에서 함주로 올때 재산이 상당히 많았다. 이불장 4조에다 강냉이 국수 10마대, 통강냉이 다섯가마, 고열탄 20t, 50ℓ짜리 술 세병, 지주들에게 빼앗은 병풍 2조, 그밖에 고급가구도 많았는데 모두 관리소에서 관리하는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물건들이라고 했다. 김성호와 나는 그의 집에 자주 놀러갔었는데 우선 술 얻어먹는 재미에다 또 나이 많은 지주들을 일 시켜 먹던 이야기 등 별의별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어서였다.

“정치하는 놈들이 옆에 있다면 창자를 꺼내 씹어먹겠다”

1994년 7월 23일.

김일성의 발인날 함주 공설운동장은 대만원이었다. 함주군 공장 노동자, 사무원, 각 학교 학생들, 그리고 협동농장 농민들까지 다들 한자리에 모여 정말 대단했다. 분위기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인민군 대표로부터 시작해서 안전부 대표, 노동자 대표, 농민 대표, 학생 대표, 여맹(여성동맹) 대표, 직맹(조선직업총동맹) 대표도 모두 모였다. 행사는 약 2시간 30분동안 계속되었는데 졸도하는 사람들이 50명도 더 되었다. 그중에 4명은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또 안전부와 보위부에서는 이날 길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그 이유는 ‘군에서 회의를 하는데 당신들은 수령의 발인날도 모르고 사적인 일로 길을 가고 있으니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생존시 인민들이 굶어죽는다는 보고를 받으면 깜짝 놀라는 기색이라도 보였지만, 김정일은 그런 보고를 받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런 위인이 북한 백성들을 어떻게 보살펴 주겠는가? 김정일은 군대와 간부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오산이다.

김정일도 하루에 한끼씩은 죽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중앙당 간부들도 한끼는 굶고, 먹을 경우에는 강냉이죽을 먹는다고들 하는데 역시 그것도 거짓말이다. 인민군들이 한끼 죽을 먹는다는 것은 내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로, 운수대대에서 물 때문에 가끔 부대에 들어가면 죽그릇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함주읍에서 몇년 간 수백 명이 초모(招募:징집)되어 군에 입대했는데, 그 중에 100여 명이 영양실조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부모들은 입대할 때는 건강해서 집을 나간 아들이 병신이 되어 돌아왔다며 아들을 붙들고 땅을 치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했다. 그들이 집에 와서 2~3개월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면 소속 군부대에서 다시 데리고 갔다.

배급이 완전히 끊어지자 인민들은 살아 남겠다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풀을 뜯고, 그리고 집에 있는 가재도구 등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모조리 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잠시 동안은 버틸 수 있을 뿐, 그 후부터는 하나씩, 둘씩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해 우리 작업반에서도 10여 명이 굶어 죽었고, 인민반에서도 10여 명의 늙은이들이 시체가 되어 나갔다.

처음에는 사람이 죽으면 호상(護喪)도 하고 관도 만들어 주었는데 너무 많이 죽다 보니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공장에서도 손을 들었다. 도시 경영사업소(필자 注:북한의 환경보호는 내각의 국토환경보호성이 관장한다. 내각의 전신은 정무원이다)에서도 관을 해결할 수 없다고 외면해 버리자, 상주가 직접 부모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끌고 가는데 시신의 다리가 땅바닥에 닿아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장사가 끝난 후 상주에게 부모의 시신을 리어카로 끌고 갈 때의 심경을 물어보았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정치하는 놈들이 옆에 있다면 당장에 칼로 목을 베고 창자를 꺼내 씹어먹겠다.”

다행히 이 소리는 당의 귀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는 무사했다.

함흥시에서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쇠로 관을 만들어 그 속에다 시신을 담고 장지까지 가서 시신을 땅에 묻고는 다시 그 철관을 가지고 와서 또 사용한다고 했다. 시신을 관도 없이 그냥 싣고 가는 것보다는 한결 나은 생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