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2만 위엔에 팔려 간 삶

2만 위엔에 팔려 간 삶

 

최영림(가명)

1992년생

   양강도 혜산 출신 

2009년 탈북

2011년 한국 입국

 

 


가난과 병마

 

나는 양강도 혜산 시에서 516 건설사업소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함경남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992년에 태어났다. 내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으며, 가족들은 지금도 북에 남아있다.

 

우리 집은 무척이나 가난해서 나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도, 배불리 먹어본 기억도 없다. 어릴 때부터 학교 대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기도 하고 어머니와 과일과 나물 장사를 하기도 했다.

 

2005, 내가 열 살 때, 우리 가족이 살던 하모니카 집 한 가구에서 불이 나서 우리 집까지 타버렸다. 이렇게 집을 잃고 우리 집의 가세는 더욱 기울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직접 벽돌을 모아 집을 세우기 전까지 우리는 남한에서 말하는 노숙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척 집에 얹혀살기도 했는데 툭하면 “집도 없는 것들이”라는 말과 갖은 핍박을 받곤 했다. 동생과 나는 벽돌을 줍기 위해 길거리로 나갔고, 어머니는 건설사업소 사람들에게 술이나 식사를 팔면서 돈을 모으거나 벽돌을 받았다.

 

아버지가 빚까지 지게 되자 우리 집 형편은 더욱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위출혈로 쓰러져 입원했고 어머니도 난소에 문제가 생겼다. 다행히 아버지 건설사무소 동료들이 도와줘서 병원비는 어렵게 마련할 수 있다. 내가 아픈 것은 견딜 수 있겠는데 부모님이 아픈 것은 견딜 수 없었고, 그때의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고 밖에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

 


바늘을 입에 물고 강을 건너다

 

내가 살던 혜산은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이다. 혜산에는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과 돈을 벌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서 빚을 갚고 아픈 부모님을 돕고 싶었다.

 

나는 강둑을 세 번이나 서성거리며 중국으로 갈지를 고민했다. 결심이 섰고 어머니에게 중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내 손을 부여잡으며 “너가 어떻게 그러나..어머니를 떠나지 마라.”라고 눈물 고인 모습으로 말리셨다. 그날 밤 부모님이 “우리 때문에 영림이가 중국을 가려고 한다. 이를 어쩌냐”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뒤에 남겨지는 부모님이 눈에 밟혀 눈물이 왈칵 났다.

 

중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어머니는 내 손을 끌고 자장면 집을 갔다. 난생 처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한껏 먹을 수 있었다. 열심히 음식을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그립다.

 

2009 3, 내가 중국으로 넘어가던 날의 압록강은 얼어 있었다. 중국으로 가기까지의 강의 길이는 짧았지만 행여나 당국에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늘을 입에 물고, 잡히면 그대로 바늘을 삼킬 심정으로 얼은 압록강 위를 뛰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강둑을 넘고 강을 건넜다. 당시 나는 오로지 북한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8살, 나의 몸값은 2만 위엔

 

압록강을 건너자 나를 기다리는 것은 검은색 차량이었다. 40대 중년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공안에게 붙잡히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조선말로 말했다. 의심은 갔지만 북한 땅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가고자하는 마음으로 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남자는 피곤함을 덜어줄 거라고 약도 한 알을 건넸지만, 나는 삼키는 척하고 이빨 사이에 넣었다. 그때 무엇인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차는 나를 태우고 점점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가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몇 시간 쯤 갔을까 남자는 나를 어느 시골 마을의 창고 같이 허름한 집에 내려놓았다. 이곳은 아예 도망 칠 엄두도 내지 못할 시골이었고 사람도 별로 없는 그런 곳이었다. 북한에서는 못 살아도 그래도 시내에서 살았는데 이렇게 허름한 시골 중국집을 보고 놀랐다. 이 한족 집에는 할머니, 고모, 며느리, 30 살 아들, 그리고 두 살 된 아기가 살고 있었다. 나는 중국 돈 2만원에 그 집 식모로 팔려갔던 것이다.

 


도주, 또 도주

 

한족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8개월 동안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그나마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내가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집에서 갇혀서 하루 종일 TV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틀 연이어 TV를 보고 있으면 머리도 아프고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중국에 있으면서 많이 울었다. 가을에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났고, 하늘을 보는 것도 눈물이 났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 보다 심적으로 괴로운 게 더 컸다. 하늘이면 하늘, 달이면 달에게 이 집에서 내보내달라고 빌었다. 단 하루라도 조선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결국 참을 수 없어서 장마당에 가는 길에 도망쳐 나와서 전부터 알던 어느 조선 여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는 북한에서 아들을 하나 데리고 중국으로 온지 얼마 안됐고 나는 그 아들을 돌보면서 두 달간 있었다.

 

두 달 후 모자는 시내에 나갔다가 공안에 붙들리고 말았다. 아들이 공동변소에서 앞에서 놀다가 중국 애들과 시비가 붙어 중국 아이를 때렸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와 중국말로 말을 걸었다. 아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중국인은 공안에 신고를 해버렸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잡히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이를 뒤따라오면서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붙잡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나 주변을 돌았다. 결국 변소 안에 하루 종일 있다가 주변이 조용해질 때까지 있다가 나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나는 (팔려갔던) 한족 집 고모의 친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당시 내가 일하던 집 밑에 살고 있었는데 공중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보고 어디론가 찾아오라고 하는데 당시 중국어를 잘 못하는 나는 그대로 따랐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내가 식모살이하던 집 가까이로 불렀고, 결국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30살 한족가족 아들이었다. 나는 일부러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잡아간 거라고 열심히 변명했지만 한족 가족들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다시 한족 집으로

 

한족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묻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집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온갖 수모를 참았지만 이제는 그런 희망조차 사라졌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 가치 없이 산다는 것이 느껴져서 괴로웠다.

 

거울을 보면서 “어? 내가 살았네. 어떻게 용케도 살아있네”라고 물을 때가 많았다. 정신도, 기억도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북의 친구들과 어머니가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훔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멍하니 아무런 감정조차 없어졌다. 그리운 어머니도 생각나지 않았고 집도 양강도라는 정도만 생각이 났다.

 

“여기가 현실이 맞나. 내가 죽었나? 죽어도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날은 잠도 안 자고 새벽 2-3시에 일어났다. 일도 하기 싫으면 내팽개쳐버렸다. 그러자 그 집 며느리는 내가 밖에서 나쁜 사람에게 맞아서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나를 아껴주던 할머니는 “나쁜 놈들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라며 안쓰러워서 쓰다듬기도 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면 “나쁜 놈들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들은 나를 여전히 괴롭혔다.

 

5 5, 중국의 명절이 되자 시내에서 돈을 벌던 아들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인사도 하지 않자 “왜 그러는가? 한번 도망치니까 또 도망치려고 하는 건가?”라고 비꼬았다. 그 전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괴롭히지 않았는데 이제는 드러내놓고 못되게 구는 것이다. 내게 “또 한 번 가보지?”라며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내 심정 누가 알겠나’라는 마음으로 피했다. 그가 일어나라고 소리쳐도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나를 밀치고 때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자살을 시도하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약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 마침 감기에 걸려서 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한 20분 정도 지나자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쓰러졌다. 할머니가 달려와서 나를 깨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는 놀라서 고모를 불렀고, 곧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위세척을 시켰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째 되자 아들은 내게 미안한지 말을 걸었다.

“동생아 왜 그러냐. 오빠가 그렇게 나쁜 놈인가?

“제발 이 집에서 내보내주세요.” 나는 이틀 동안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일으켜 무릎 꿇고 빌었다.

“보내주면 어디 가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