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18호 관리소에서 28년 간의 삶

                  18호 관리소에서 28년 간의 삶

김혜숙(2009년 탈북 및 입국)

평양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 나도 모르는 일이 일어나 1970년에 부모님이 먼저 관리소로 끌려가셨고,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5년을 더 있다가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1975년 2월, 내가 13살 때였고, 이후 28년을 관리소에서 살았다.
고모를 따라 간 18호 관리소 초소에서 16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5년 전 헤어졌던 어머니는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야위어 계셨다. 어렸던 나는 왜 이곳에 와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어머니를 따라서 말없이 30리 길을 걸어 가족들이 지내고 있던 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 곳에 가서도 5년 전 헤어졌던 아버지는 만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사이 동생들도 태어나 있었다.
그 날 저녁,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나물, 풀, 옥수수가루 한 줌이 전부였다. 평양에서는 그래도 입쌀에 밀가루 섞은 밥을 먹었기에, 배는 고팠지만 쓰고 애려서(애리다 : 과일이 덜 익어서 신맛도 쓴맛도 아닌 중간 맛) 도저히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아버지가 1974년 12월 7일에 관리소 내에 있는 보위부로 잡혀가신 후, 어머니는 농장 일을 하시며 가족을 부양하셨다. 보통 농장이나 산, 또는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본인만 한 달에 15일분의 식량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탄광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5일분의 식량을 받는다. 세대주는 10일분의식량을 배급 받았다. 당시 우리 집은 5형제, 할머니, 어머니, 이렇게 총 7명이어서 6~7kg의 통강냉이를 받을 수 있었다. 강냉이를 집에서 직접 말리면4~4.5kg 정도 나오는데 이것을 15일 동안 먹었다. 그마저도 하루에 한 끼, 두 끼 정도를 먹으면 잘 먹는 것이다. 강냉이를 15일 동안 먹자니 풀과 나물이 없으면 먹을 수조차 없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기력이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걸어 다닐 수조차 없다. 그곳 사람들은 그저 형체만 있지 뼈만 보이고, 9살 아이들도 한국의 5살 아이들에 비해 살도 없다. 불쌍한 일이다.
내가 중학교 5학년을 졸업할 때쯤 어머니가 산나물을 캐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1979년 5월 30일에 사망했다. 그 때 나는 8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오형제와 할머니가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그나마 배급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5월에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졸업하고 1979년 9월부터는 탄광에 들어가서 일했다. 곧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집에 있을 때는 별 일이 없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들을 빼앗아갔다. 그나마 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해서 탄광 일을 시작한 후에는 배급량도 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던 중, 21살 된 둘째 남동생을 탄광사고로 잃었고 시체도 못 찾았다. 관리소 내 탄광은 위험했지만 개조비용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광사고가 잦았던 것이다. 하지만 관리소에서는 이주민(이주민 : 수용소 수감자를 일컫는 북한 말)들이 죽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18호 관리소에서는 일을 잘한 경우에 한해서 결혼이 가능했다. 결혼식장에서 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관리소에 가서 허락을 받으면 결혼한 것이 되는 식이었다. 나도 30살이 되어서 할 수 없이 관리소에 혼자 몸으로 혁명화(혁명화 : 처벌 형태의 일종)로 들어왔던 사람과 결혼했다. 든든한 남자가 집안에 들어오니까 다른 사람들이 채가는 건 없었다. 동생들을 돌보면서 살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여동생도 성인이 되어 시집을 보냈다. 가족 입을 하나 줄이면 형편이 나아진다. 그래서 여동생 둘 다 짝을 지어 내보냈다.
나는 두 명의 아기를 낳았다. 18호 관리소에는 산전·산후휴가가 있었다. 우리 엄마가 내 동생들을 낳으셨던 때에는 90일을 줬는데, 1980년대부터는 관리소 내에 인구가 부족하니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했고, 두 번째 아이부터는 150일 휴가를 줬다. 휴가와 함께 매달 280원씩 다섯 달 동안 돈도 받았다.하지만 아가씨들이 몰래 임신하는 것은 안 되고 결혼증이 있어야 한다. 병원에 가려면 결혼증을 가져가야 하니까.
남편은 탄광사고로 죽었다. 1개 초소에 7명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사고로 모두 죽었다. 그래서 죽은 남편을 대신해서 내가 나가서 일해야 했다. 탄광에서 13년을 일한 탓에 지금도 폐가 나쁘다.

18호 관리소, 인권의 사각지대
내가 관리소에서 나오던 2001년 당시, 관리소 총 인원은 약 2만 명 정도였다. 이주민들은 대략 1만 7천에서 8천 명이었고, 관리일꾼, 보위부, 안전부 가족들은 약 3천명 정도였다. 수용소는 대동강 하나를 두고 한 쪽은 보위부, 다른 쪽은 관리소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 관리소로 보내졌을 때에는 경비초소 가까이(지도상의 왼쪽)에서 살았고, 어머니가 농장일 하면서 옮겨간 곳이 심산이다. 나는 1975년 2월부터 1989년 9월까지 심산에서 살았다. 1989년, 봉창리 12호 관리소가 어디론가 이전했고 18호 관리소 구역이 되었다. 18호 관리소 이주민들은 이곳으로 이주되었고, 예전 18호 관리소가 있었던 자리는 해제민 구역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2001년 2월 16일 해제될 때까지는, 더 정확히 말하면 2002년 8월 13일에 관리소 지역을 완전히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갈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관리소의 이주민들은 인권이라는 말은 모르고, 개보다도 못한 삶을 산다. 관리소는 4m 높이의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람들은 보위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생활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을 외우면서 생활총화도 했다. 관리소는 산골이고, 포장된 도로는 없었다. 악독한 보위부 지도원이나 안전원들은 저 멀리서 이주민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이면 미리부터 가래를 입 안에 문 상태에서 자신들 앞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이주민이 그 앞으로 뛰어가서 무릎 꿇고 앉으면,“  벌리라” 라고 한 뒤에 입 안으로 가래침을 뱉는다. 나도 28년 동안 관리소에 살면서 세 번이나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그 순간에는 도저히 가래침을 넘기기 어렵다. 하지만 삼키지 않으면 일생 동안 맞을 매를 한 번에 다 맞는다고 할 정도로 심하게 팬다. 넘기면 목으로 며칠 동안 그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기 때문에, 당할 때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관리소 내에서는 누구든 일거수일투족을 서로 감시하게 한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도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보위원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그렇게 끈질기게 버텼다.
나도 하루 16~18시간동안 탄광소에서 일하다 탄가루를 많이 마셔서 기관지가 약해졌고, 폐종양에 걸리게 되었다. 작업반 15명 중 여자가 7명, 나머지는 남자들이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일하는 양이나 시간은 같았다. 하지만 어디서라도 자기 일만 열심히 한다면 매 맞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관리소에서 크면서 나는 말을 잘 듣고 열심히 할 일 했기 때문에 추천을 받아서 야간 전문학교도 다녔다. 들은 이야기로는 안전원이 여자를 불러다 강간하고 비누 같은 것을 주기도 한다고 했다. 갱장(갱장 : 탄관장을 일컫는 말)들도 여자들을 많이 강간했다.
18호 관리소는 다 탄광이다. 관리소 여자들은 주로 채탄장에서부터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보내는 일을 했는데, 진폐증5)에 걸려 죽거나 팔다리가 잘리는 사고도 많았다.
탄광에서는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이 주어졌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갈 시간은 따로 없었다. 1교대 마다 8시간씩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딱 그 정도로 8시간만 일하면 그나마 다른 생활을 챙겨볼 시간이 있겠지만, 한 교대씩 더 맡아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했다. 16시간 동안 일하고 나면 사람이 맥이 풀리고 자리에 누우면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이 정말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탄광에서 일하다가 여러 번 다쳤는데 아주 작은 방 한 칸짜리 진료소가 있다. 거기서 진단서도 써주는데 길어보아야 3일 진단서를 떼어 준다. 다리가 잘리거나 하면 30리나 떨어져 있는 더 큰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수송수단이 없어서 걸어가야 한다. 탄광병원들에는 다리 잘린 사람들이 많다. 내가 그런 곳에서 28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고, 그저 ‘기적’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관리소에서는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다. 굶어 죽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시체를 너무 많이 보다 보니 무섭지도 않았다. 특히, 1990년대 말이 가장 심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훔쳐 먹을 것도 특별히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다른 이주민의 집으로 들어가 무엇이든 훔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정도였다.
4월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는데 사람들은 주변에 널려있는 풀뿌리를 먹거나 강냉이를 갈아 죽을 쑤는데, 7-9kg강냉이를 집에서 말리면 2-4kg정도는 건질 수 있기 때문에 그걸로 1개월 정도는 버틴다. 도토리나무 잎사귀도 부드러워서 먹기 좋다. 그걸 다 뜯어다가 삶으면 진한 물이 우러나는데 소금물만 있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봄과 가을의 상황이 겨울보다는 낫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강냉이 가루와 물을 섞은 죽 밖에 먹지 못한 채로 탄광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량은 몇 달에 한 번씩 주는 소금, 된장이 전부였다. 된장은 약 5개월에 한 번씩 3kg을 준다. 양이 너무 적다 보니 된장국을 끓여먹어 본 적은 없다. 이주민들은 소금을 거의 못 먹기 때문에 모두 기운이 없다. 항상 소금기가 모자랐기 때문에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부족한 소금 대신 된장을 핥아 먹었다.
돼지도 길러야 했는데, 변소에서 인분을 끓여서 돼지를 먹였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키운 돼지를 한 점도 먹어보지 못하고 모두 관리일꾼들에게 갖다 바쳐야 했다. 돼지 6마리, 개 12마리, 토끼 60마리를 모조리 바쳤다.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태어나자 마자 부터‘ 수령님, 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하는 말부터 배우는데,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다. 관리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저 강냉이 밥이라도 한 번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다. 우리 아이들도 9~10살 정도였는데 내가 밥 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직접 밥을 해 먹곤 했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리 힘들어도 곧장 눕지 않고 돌멩이로 1~2시간 동안 강냉이를 갈았다. 방앗간에 강냉이를 빻아달라고 맡기면 돌려받는 양이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돌멩이로 강냉이를 빻았다. 딸이 밥상을 차릴 때면, 늘“ 이건 어머니 밥, 이건 내 밥” 하면서 그릇을 내놓았다. 하지만 딸이 너무 빨리 밥을 먹는 것이 이상하다 싶어서 하루는 내가 내 밥그릇과 딸의 밥그릇과 바꿔보았다. 그러고 보았더니 딸의 밥의 양이 상당히 적었던 것이었다. 그 동안 내가 모르게 자기 밥 그릇 속에는 작은 그릇을 하나 더 얹어 그 위에 얼마 안 되는 밥만 살짝 올려놓고 태연한 척했던 것이었다. 우리 아이 마음씨가 그렇게 고왔다. 목이 메어서 음식이 차마 넘어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화병이 오는 것도 같았다.

학교생활
관리소에서는 아이들이 배움보다 노동을 훨씬 더 많이 한다.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을 때는 무조건 일해야 한다.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잡아가고, 학교에 가지 않아도 잡아간다. 아이들은 행정일꾼들이 사는 마을에 나무를 해주고 강냉이를 조금 받을 수 있었다. 조금의 자유 시간이라도 주면 관리소를 도주할 궁리를 한다고 해서 자유 시간도 주지 않는다.
관리소 청사 옆에 학교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 인민학교, 중학교가 있었다. 보안원 자녀, 이주민 자녀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을 구분해 따로따로 다니게 했다. 간부 자녀들을 위해서는 교원들도 배치되고 좋은 교육을 받아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고, 해제민(해제민 : 형을 마친 상태이지만 관리소 지역 외에는 다른 살 곳이 없어서 그냥 남아있는 사람들) 자녀들은 간부집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이주민의 아이들에게는 대학을 졸업한 교원들은 배치되지 않았고, 관리원들이 가르쳤기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는 것은 별로 없다. 인민학교 1학년 때부터 대충 기초를 배우는데, 김일성 수령 혁명사상을 제일 처음 배우고, 글자를 알게 한 다음에는 셈법과 그림 그리기를 배운다. 인민학교는 4학년까지 다니고, 중학교는 5학년까지였는데, 최근에는 중학교를 6학년까지 다니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주민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탄광으로 보내진다.
학생들에게 교복을 주는 것은 인민학교 4년, 중학교 5년 전체 기간에 각각 한 번씩 뿐이었다. 내가 관리소로 끌려가 그곳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열 세 살이었는데 아이들이 다 헤진 교복을 꿰매어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따로 신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맨발로 등교하다가 겨울에 동상에 걸려 발을 잘라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맨발로 다니는 것이 모두 단련된 모양인지 아프지도 않은 듯했다. 나는 겨울에는 이불솜을 뜯어서 발을 싸매고 새끼줄로 여며서 다녔다.

공개총살
이주민들은 보위원에게 도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끌려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을 물어보면, 어디서 반항하려는 것이냐며 바로 죽여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난 부모 따라 이유도 모르고 잡혀왔고, 내 부모가 죽은 지 오래 됐는데도, 어째서 해제가 안 됩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지금 관리소 규정을 반신반의 하는 거냐?”면서“ 넌 무조건 총살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총살을 안 하면 이주민 관리를 하지 못한다”고 겁을 주곤 했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도 왜 18호에 들어갔는지 모르셨다.
1997년 심화조 사건(심화조 사건 : 김일성 사망 이후인 1997년 북한 고위급 관리 2만 명이 숙청된 사건) 때는 김정일 반대파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고 18호 관리소로 끌려왔는데, 그 때는 정말 굉장했다. 강원도당 책임비서 등 수많은 사람들이 비공개로 총살을 당하거나 탄광소로 보내졌다. 인간이 인간 취급을 당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관리소로 끌려오다 보니 사람들은 넘쳐나고 살 곳은 없었다. 내 집에까지 다 왔다. 그 사람들이 들어온 후로는 관리소 분위기가 살벌해져서 사는 것이 끔찍했다. 총살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총살을 집행할 때는‘ 공개공판’이라고 그 전날 써놓는다. 공개총살과 교수형은 공장 옆에서 집행하는데, 14호 관리소 보위부 사람들까지 다 건너와서 본다. 총살은 밖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미 반 쯤 죽여 놓은 산송장 같은 사람을 질질 끌어다 세워 총살했다. 일 년에 몇 백 번쯤 총살이 있었던 것 같다. 옆의 14호 관리소 지역으로 넘어가서 강냉이 가루 같은 것을 훔쳐 먹다가 붙잡히면 대부분 죽였고, 심화조 사건 때도 많이 죽였다. 미신 같은 것을 믿은 죄로도 많이 죽였다. 내 친구 어머니는 53세였는데 미신을 믿었다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의무적으로 보도록 되어 있다.

관리소에서의 해제
나와 내 가족들은 2001년 2월 16일, 18호 관리소에서 해제(해제 : 풀려나다)를 받았다. 하지만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는 아직 풀려나지 못했다. 이주민들이 해제되는 날은 주로, 2월 16일(북한의 ‘민족최대의 명절’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인데, 2월 16일은 김정일의 생일이다), 4월 15일(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일이다), 노동당 창건 50돌(10월 10일은 조선조동당 창건 기념일이다. 이 날은 1945년 10월 10일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을 창당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법정 공휴일이다) 같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우리와 함께 해제 받았던 사람들이 총 일곱 가정이었다. 해제 받는 날에는 이주민들을 모아 놓고 해제 받는 사람들을 앞에 앉힌 다음, 간부들도 앉고“ 너네 일을 잘하면 이주민들도 해제시켜준다” 라고 선전한다. 부럽게 바라보던 수많은 다른 이주민들은 해제민들이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갈 때, 꽃잎을 뿌리며 축하해준다. 해제된 후에는 18호 관리소에 있었다거나 듣고 본 것을 일체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온다. 관리소에서는 해제민 구역이라는 또 다른 지역에서 살도록 집을 지정해주지만, 원하면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있고, 장사도 할 수 있다.
내가 해제된 후, 안전부에 우리 친척들에 대해 물어봐서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큰 아버지를 찾고 나서야 내가 왜 28년 동안 관리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큰아버지 말로는 아주 오래 전 할아버지가 월남했던 것 때문이라는데, 장남인 그조차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친할머니를 우리 아버지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죄 없는 우리 가족들까지 모두 관리소로 잡혀간 것이었다. 만약 할머니가 큰아버지와 살았다면 큰아버지 가족들이 관리소로 끌려갔을 일이지만, 큰아버지는 농촌 여자
를 만나 따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국 와서 국정원에서 두 달 조사받을 때 할아버지 이름을 댔지만, 아직까지는 마땅한 소식이 없다.
해제를 받고 난 이후, 내가 살 마땅한 곳은 없었고, 장사라도 해 볼 밑천도 없었다. 그러다가 2002년에 평성에서 동무를 만나 순천에 있는 한 집을 소개받았다. 집주인은 할머니였는데, 60만원에 집을 팔고 싶어 했다. 돈을 모두 모을 때까지는 그 할머니와 한 집에서 살기로 하고 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맡겨놓고 청진으로 장사를 갔다 왔는데 이미 집이 홍수로 떠내려간 뒤였다. 12살 딸과 9살 아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잃고 시신조차 못 찾았다. 그 뒤로는 내 옆으로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모두 다 마치 죽은 내 아이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북한을 넘나들며
2003년도 아이들이 모두 죽고, 나는 병에 걸려서 청진에서 장사하면서 치료받았다. 장사하다가 청진에 와서 치료 받아야 했는데 비싸서 개인 집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하룻밤 누워있는 데에만 500원, 약값 800원, 치료비 500원,밥한 끼 500원을 매일 내야 했다. 돈이 없어서 공원에 누워있고는 했다. 그렇게 3개월을 치료받으니까 그 동안 모아뒀던 돈이 다 없어졌다. 그 때 어떤 아주머니가 중국은 먹고 살기 좋다고 하면서 나보고 중국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가다가 죽건, 이렇게 앉아서 죽건 마찬가지니 일단 떠나보
자고 결심했다.
무산에 도착하니 국경경비대원들이 두만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줬다. 강을 건너자, 조선족이 경비대에게 얼마인지 모르는 돈을 건네주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조선족에게 넘겨져서 연길에서 화룡에 있는 한 식당으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나와 함께 넘어왔던 24살, 27살의 젊은 여자들이 있었는데, 곧 모두 어디론가 팔려갔고, 나는 43살로 나이가 많고 관리소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몸이 상한 탓인지 가격흥정이 안 되어 팔려가지 않았다. 2007년 11월, 식당에서 일하다가 북한에 건너가서 돼지를 사오라고 해서 넘어갔다가 잡히고 말았다. 다행히 중국 땅이 아닌 북한 내에서 체포되어 호송되었기 때문에 보위부로 보내지지 않았고, 안전부에서 20일 동안 취조 받고 청진시 비법 월경자 도집결소로 보내졌고, 그 곳에 3개월 정도 갇혀 있었다.

인육사건
안전부에 20일 붙잡혀 있는 동안 자식을 잡아먹은 여자 둘을 봤다. 한 여자는 서른아홉이었고, 아홉 살 난 딸이 있었다고 했다. 거기서 나와 하룻밤 자고 그 여자는 살인자니까 교화소로 보내려는지 죽이려는지 어디로 끌고 갔다. 나도 내 새끼 잡아먹을 생각은 차마 못했다고 말했더니, 이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아파서 산에 올라가 나물도 못 캘 정도가 되어 굶었다. 딸이 병에 걸리고 열이 나서 아파서 울었는데 도저히 나도 더는 못 참겠더라. 나도 너무 굶었더니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고기를 실컷 먹어보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돼지고기보다 사람 고기가 맛있다고들 하니, 어차피 이렇게 앉아서 모두 굶어 죽을 바에는 애를 잡아서 먹고 나도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아이가 얼마나 어렸으면 가마에 쏙 들어갔는데 엉덩이가 제일 빨리 익었다고 했다. 그걸 잘라서 소금을 찍어 먹고 있다가 들어온 인민반장에게 들켜 붙잡혔다고 했다.
다른 여자는 내가 아는 여자였다. 여자의 남편은 탄광사고로 죽고, 아이를 데리고 살았는데 16살이었다고 한다. 여자가 강냉이 2kg을 간신히 마련해놓고 잠시 밖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아들이 강냉이를 모두 먹어 치우자 너무 화가 나 아이를 그만 죽여버렸고, 돼지고기로 속여 강냉이로 바꾸어 먹었다는 기막힌 사연이었다.
내가 안전부 분주소 화장실에 구금되어 있을 때, 아이의 시체를 직접 목격했다. 안전원들은 사건들이 계속 터져서 분주소를 드나들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비닐 주머니를 던져주면서“ 야! 이 간나야! 풀어!” 라고 했다. 비닐을 푸는 순간, 머리카락이 보였다. 어머니가 얼마나 악착같이 살을 베었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얼굴 살도 다 베어낸 상태였다. 시체의 눈알은툭 튀어나와 대롱 대롱거렸다. 손목과 발목이 알아볼 수 있는 16살 아이 시체의 거의 전부였는데 그걸 꺼내놓고 안전원은 사진을 찍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내가 오죽하면 제 새끼를 잡아먹겠는가? 내가 곁에 있어도 애가 그 모양이었는데, 내가 죽고 없으면 애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나 있었겠나? 그럴 바에 내가 애를 실컷 먹고, 나도 죽어버리는 게 낫지!” 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저 한 번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살인자니까 총살했을 것이다.
최근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많이 오는데, 다른 마을에도 이렇게 인육을 먹는 사례들이 많다고 들었다. 김정은이 배급을 안주니까 아이를 밤길에 내놓지 말라는 얘기도 나온다. 도로에 나가면 널려 있는 시체들도 많고, 시체처리반도 흔히 볼 수 있다.

중국으로의 재탈출
나는 안전부에 있다가 노동단련대로 옮겨졌다. 10일 정도 단련대에 있다가 도망쳤는데, 18호 관리소에서 28년간 살았으니 길은 잘 알고 있었다. 대동강을 따라서 도망치다가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틀간 그 집에서 머물렀다. 지인은 자기 딸도 도망쳐야 할 사정이 있으니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했다. 그래서 지인의 딸과 나는 무산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오후 3시경, 나는 두만강을 넘었다. 경비대 교대 시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 건넜다. 무산에서 중국 측과 이미 연락을 한 상태였고, 살기 위해서는 중국인에게 팔려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중국 도문의 어느한족에게 2,500원에 팔려가게 되었는데, 그는 53세 의사였다. 남편이 의사였기 때문에 도문 변방대원들이 집에 와서 자주 치료를 받곤 했고, 그래서 내가 북한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잡아가지 않았다. 일 년에 몇 번씩 공안들이 지역을 바꿔 단속하는데, 그때마다 공안들은 며칠 산으로 도망가 있으라고 알려줬고, 나는 숨어있다 나오곤 했다.
현재 54살인 한족 남편은 아직까지 연락이 온다. 나에게 다시 중국으로 오라고 하지만, 북송 될 수 위험이 있기에 갈 생각이 없다.“ 한국 국적을 얻어서 12년 이상 살면 중국에서 북송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후에나 중국에 갈 수 있을까?

제3국을 통한 한국 행
중국에 있을 때, 한국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중국에 남아 있던 한족 가족 모두를 데려간 여성을 보았다. 탈북자가 한국에 들어가면 집도 주고,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국으로 떠나자는 결심을 했다.
중국에는 탈북자에게 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고 돈을 받는 브로커들이 있다. 한국 행을 원하는 16명이 모여서 나도 장춘, 산동, 곤명을 통해 국경을 넘어가는 길을 안내 받았다. 라오스에서는 2시간 반을 산길을 따라 걷기도 하면서 위험하고 힘든 여정을 거쳐야 했다.
한 번은 라오스에서 우리 일행이 배 3척을 나눠 타고 새벽에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라오스 경찰 8명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었다. 달리던 배를 쏘겠다니까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라오스 경찰을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 옆에서 감촉이 났다. 악어였다. 내 옆에는 한 아주머니가 타고 있었는데, 더우니까 손을 물에 담갔다가 악어에게 물려 가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라오스 사람들은 우리를 내려놓고 잽싸게 되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가 갈 길을 찾아야 했지만, 언어적 장벽에 부딪쳤다. 그래도 내 수중에는 한족 남편이 차비로 준 만원이 있었고, 이 돈으로 우리는 태국 경찰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덕분에 방콕 이민국 수용소에 이틀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태국의 이민국 수용소는 보통 한 방에 540명씩 같이 생활한다고 들었지만 내가 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있었을 때는 자릿세라는 것을 내야 하는 것도 없었고, 자리가 없어서 서서 자거나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민국 수용소에서는 한국으로 보낼 사람들을 20명씩 뽑았는데, 내 차례 때는 40명씩 뽑아서 나는 20일 만에 한국으로 입국했다.

남한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봄
한국 와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자유북한방송과 같은 많은 단체들에서 북한으로 삐라를 많이 보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삐라에 중국 돈을 붙여서 보내주기도 한다. 나는 이 방법이 북한주민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들도 삐라를 보고, 이를 볼 때면 속으로라도‘ 이런 게 있구나!’ 알게 되고 머리가 트이게 된다.
북한에 있을 때는“ 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는 아예 몰랐다. 북한에서는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했지 “한국”이라 하면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남조선에 가면 다 목을 잘라 죽인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강요와 설교를 당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북한주민도 남한에 대해 많이 안다. “겨울연가”, “가요무대”,“ 동반자”와 같은 프로그램의 알판(씨디-롬 디스크)을 계속 듣고 있고, “겨울연가”를 보고 붙잡혀간 아이들도 많다. 무산 지역에서는“ 망해가는 21세기 빨리 망하라!”라는 슬로건도 나왔다. 이제 북한 주민들이 한국에 대한 환상도 가지고 있고, 북한을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을 못한다.
나는 한국에서 세 번째 봄을 맞는다. 봄이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 적십자에서도 나를 많이 도와주고 외로울까 봐 컴퓨터도 들여줬다. 한국 사람들의 인사성을 보면서 내 자신도 많이 고쳐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28년간 관리소 생활을 하며 웃어 볼 날도 없었는데, 악의에 차 살았기 때문에 별로 웃지 않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살갑다. 버스 기사가“ 어서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라고 상냥하게 인사한다.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 가방을 치면, 북한 같으면 때렸겠지만 여기서는“죄송합니다 아주머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병원에 가도 간호사들이나 의사들이 얼마나 상냥한지 모른다. 북한사회와 비교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를 여기 와서 알았다. 북한에서‘ 남조선은 병든 자본주의 사회’라고 배웠고, 나도 그런 인식을 가지고 왔었지만, 인민들끼리 서로 돕는 것을 보며 ‘자본주의가 더 좋구나!’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