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18호 관리소에서 28년간의 삶 – 1

18호 관리소에서 28년간의 삶

 

(편집자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 시절, 13살에 영문도 모른 채 들어간 18호 관리소에서 처참한 삶을 보낸 김혜숙씨정치범 수용소인 18호 관리소에서 사람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28년간 힘겨운 탄광노동잔혹한 고문과 기근에 시달렸다그러나 결국 해제민(형을 마친 상태이지만 관리소 지역 외에는 다른 살 곳이 없어서 그냥 남아있는 사람들)이 된 그녀는 사회에 나와서야 할아버지가 오래 전 월남했다는 이유 때문에 28년간 그 지옥같은 곳에서 지내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해제민이 된 후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그녀는 중국에서도 기구한 삶을 살고서야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갖은 고생 끝에 한국에 도착해 이제껏 꽃피는 봄이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는 그녀지금은 국내·외에서 참혹한 정치범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고발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김혜숙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정치범수용소(관리소)로 보내지다

 

평양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 나도 모르는 일이 일어나 1970년에 부모님이 먼저 관리소로 끌려가셨고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5년을 더 있다가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1975년 2내가 13살 때였고이후 28년을 관리소에서 살았다고모를 따라 간 18호 관리소 초소에서 16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5년 전 헤어졌던 어머니는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야위어 계셨다어렸던 나는 왜 이곳에 와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어머니를 따라서 말없이 30리 길을 걸어 가족들이 지내고 있던 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그 곳에 가서도 5년 전 헤어졌던 아버지는 만날 수 없었다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사이 동생들도 태어나 있었다그 날 저녁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나물옥수수가루 한 줌이 전부였다평양에서는 그래도 입쌀에 밀가루 섞은 밥을 먹었기에배는 고팠지만 쓰고 애려서(애리다 과일이 덜 익어서 신맛도 쓴맛도 아닌 중간 맛도저히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관리소에서의 삶

 

아버지가 1974년 12월 7일에 관리소 내에 있는 보위부로 잡혀가신 후어머니는 농장 일을 하시며 가족을 부양하셨다보통 농장이나 산또는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본인만 한 달에 15일분의 식량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탄광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5일분의 식량을 받는다세대주는 10일분의 식량을 배급 받았다당시 우리 집은 5형제할머니어머니이렇게 총 7명이어서 6~7kg의 통강냉이를 받을 수 있었다강냉이를 집에서 직접 말리면4~4.5kg 정도 나오는데 이것을 15일 동안 먹었다그마저도 하루에 한 끼두 끼 정도를 먹으면 잘 먹는 것이다강냉이를 15일 동안 먹자니 풀과 나물이 없으면 먹을 수조차 없다그래야 조금이나마 기력이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 걸어 다닐 수조차 없다그곳 사람들은 그저 형체만 있지 뼈만 보이고, 9살 아이들도 한국의 5살 아이들에 비해 살도 없다불쌍한 일이다내가 중학교 5학년을 졸업할 때쯤 어머니가 산나물을 캐다가 벼랑에서 떨어져1979년 5월 30일에 사망했다그 때 나는 8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시자오형제와 할머니가 내 손에 맡겨졌다어머니가 계실 때는 그나마 배급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5월에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졸업하고 1979년 9월부터는 탄광에 들어가서 일했다곧 할머니가 돌아가셨다할머니가 집에 있을 때는 별 일이 없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들을 빼앗아갔다그나마 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해서 탄광 일을 시작한 후에는 배급량도 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그러던 중 21살 된 둘째 남동생을 탄광사고로 잃었고 시체도 못 찾았다관리소 내 탄광은 위험했지만 개조비용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광사고가 잦았던 것이다하지만 관리소에서는 이주민(이주민수용소 수감자를 일컫는 북한 말)들이 죽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결혼 생활과 남편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