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12살의 절망!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죽고 사는 순간을 선택해야하는 꽃제비 생활

[증언]

12살의 절망!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편집자) 1987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성주 군은 김일성 호위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와 부채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 어머니 사이에 외동으로 부럼 없이 살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정치적 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1997년 봄 평양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추방되어, 그때부터 고난의 날이 시작되었고, 북한에는 평양과 그 외의 두 개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가 행방불명되었고, 이성주군은 혼자 남아 주먹을 키우며 꽃제비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보낸 사람과 함께 2002년 11월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학교에서 왕따도 당하고, 주먹질로 정학을 당하면서,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진행하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한겨레 계절학교, 리더십캠프, L4축구팀에 참여하며 점차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한다. 자신은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아닌 한반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찾기까지 혼돈의 청소년기를 보낸 이성주 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통일의 역할을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서강대를 졸업하고, 9월 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길에 오른 이성주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은 청년의 이야기를 담아본다.

편집: 차미리<교육훈련팀 간사>

삽화: 강춘혁<탈북화가>

12살의 절망

독특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들었다. 10대 초반에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고민했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미래과학자, 대통령을 꿈꾸는 대신 장마당(시장)에서 꽃제비(거지)생활을 했다. 나의 꿈은 하루에 한 끼라도 거르지 않고 밥이든 죽이든 먹는 것.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꿈이었다.

나는 1987년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일성호위국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부채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 호위국이 해산 또는 합병 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정치적 과오를 범해 1997년 봄에 평양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추방되었다. 이 후 아버지는 먹을 것을 구하러 매일 산으로 출근 하셨고 주로 느릅나무껍질, 소나무껍질, 칡뿌리, 산나물, 등을 채집해 오셨다. 운이 좋은 날은 뱀도 잡아 오셨다.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아버지가 산에서 캐온 약초를 팔았다. 나는 들에 나가 민들레 반쪼개(북한말) 능쟁이 등을 뜯어 오거나 개울에 나가 개구리나 민물고기를 잡아 왔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1년을 경성에서 버텼고 그해 겨울에는 밥을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1998년 2월 아버지가 가족회의를 열었고 당신은 식량을 구해서 일주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말을 하고 다음날 집을 나갔다. 그 후 한 달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그해 6월 어머니마저 집을 나갔다. 그 당시 나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생각해 보니 이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영양실조가 걸려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나를 위한 당신들의 피눈물의 선택이었다. 내 친구 용범이 부모는 그가 보는 앞에서 죽어갔다. 그에 비하면 나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꽃제비

1998년 6월부터 나는 꽃제비가 되었다. 시장에 나가 구걸로 끼니를 해결하고 잠은 역 대합실에서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잤었다. 구걸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다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덥쳐 먹기 시작했다. 덥쳐 먹거나 또는 훔쳐 먹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나와 친구들은 소매치기가 되었고 추운 겨울에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줄타기(빨래도둑)가 되었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도둑질과 싸움에 전문가가 되었다. 처음에 도둑질 할 때는 손이 떨려 할 수 없었지만,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 반복될수록 도둑질이 생업이 되어갔다.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도둑질과 싸움은 나의 생업이 되었다. 나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만 했고 나의 구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한 나만의 발버둥이었다. 윤리적인 생각은 배부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었다. 나는 이런 노래를 부를 여유가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나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만 했고 선택할 때 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무거움 보다 굶으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에 최선을 다해 싸움과 도둑질을 했다. 나는 12살부터 16살까지 4년간 꽃제비로 길거리에서 살았다. 이 기간 나는 두 명의 친구를 내 손으로 묻었다. 한명은 김책시에, 다른 한명은 경성군에... 나는 꽃제비였다는 사실을 평생 숨기고 싶었다. 왜냐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힘든 시간이었고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근 10년이 걸렸고 지금 그 악몽의 시간들에게 오히려 감사한다. 왜냐면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삶의 소중함, 의리, 그리고 탁월한 적응력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기쁨과 혼란의 변주곡

나는 16살 되던 해, 2002년 2월에 외할아버지를 역에서 만났다. 내 삶의 첫 번째 기적이었다. 그 후 나는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일, 염소방목, 약초채취 등을 했다. 그러던 그해 10월 한국에 먼저 도착하신 아버지가 할아버지 집으로 브로커를 보냈고 나는 그와 함께 2002년 10월 23일 두만강을 건너 탈북 했다.

중국에서 1주일간 시간을 보내고 위조여권을 가지고 중국 대련공항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002년 11월 1일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또는 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남조선인줄 몰랐다. 연변처럼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중국의 한 도시인줄 알았다. 그러나 인천공항에서 만난 국정원요원을 통해 남조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북한에 다시 보내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 사실, 나에게 남조선은 온갖 부패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사람살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남조선은 우리가 해방시켜야할 미국의 식민지이었고 상상의 공간이었지 현실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남조선에 와 있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국정원산하 대성공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와 헤어 지낸지 4년이 흘렀기 때문에 아버지를 처음 보는 순간 ‘아버지’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냥 선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먼저 다가오더니 꼭 안아주면서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라고 했다. 면회실은 이산가족 상봉장이었고 아버지와 나는 힘들었던 4년의 시간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짱이 되다

조사와 정착교육을 마치고 아버지가 살고 있었던 경기도 평택으로 갔다. 당시 내가 한국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공부이었다. 기초지식은 없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과 의욕은 대단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매우 만족했다. 나는 2003년 3월부터 평택교육청에서 지정해주는 중학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7살에 중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3살 어린동생들이었지만 나보다 키가 컸고 공부도 잘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왔고 다시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학교 첫날부터 싸웠다. 1학년 짱과 싸워서 이겼고, 2학년 짱과도 싸워서 이겼다. 거리에서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나에게 남한친구들과의 싸움은 식은 죽 먹기이었다. 성적은 전교 꼴등, 학교가 개교한 이래로 영어에서 0점을 받은 사람은 내가 최초였다. 1학년이 끝날 무렵 학교 짱과도 싸워서 이겼다. 1학년생이 학교 짱이 되었다. 싸움을 잘하니 주위에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형들도 나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보기로 결정했다. 낮에는 검정고시학원에 다녔고 밤에는 형들과 함께 뒷골목에서 술과 담배를 하며 진정한 남자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북한에서의 삶이 다시 남한에서도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아버지와도 다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내게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그 말이 가장 실었다. 나는 북한의 모든 것이 창피하고 싫었고 북한에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강원도 속초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나는 고향이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석두, 검정고시에 합격하다.

중학교를 다닐 때 나는 스스로 석두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시험 볼 때마다 전교에서 꼴등을 하니 말이다. 나는 2003년 8월 검정고시에 겨우 합격했다.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같이 몰려다니던 형들과 친구들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인연을 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부산에 있는 지구촌고등학교로 도피했다.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라는 다짐을 했다.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모든 나의 과거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공부하다

나는 19살에 지구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구촌고등학교는 개신교재단의 기숙학교이다. 학교입학 면접 때, 면접관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서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가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북한에 다시가고 싶지 않았고 내 마음 속에는 가고 싶은 고향이 없었다. 나는 꿈은 컸지만 실력은 없었다. 먼저 실력을 키워야했다. 기초가 부족했던 나는 돌에다 글을 새기는 마음으로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모두 외웠다. 배운 것을 모두 외워야 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기침소리까지 모두 받아 적었고 떠든 친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가 될 때 까지 선생님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학생이 선생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나를 두려워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하루에 5시간을 자면서 공부했고 고3때는 체력이 떨어져 나이가 많아 면역이 약한 어르신들이 걸린다는 대상포진에 걸렸었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나의 정체성도 찾을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담대하게 받아들일 때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탈북자다. 이것은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나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