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11살의 유서 – 2

11살의 유서-2

(편집자) 1986년 함경북도 은덕(아오지)에서 평범한 북한 노동자의 둘째 딸로 태어난 김은주씨. 초등학교 전까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혹독한 배고픔에 마주하게 된다. 대기근 앞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남은 어머니와 언니는 김은주씨를 두고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갔다. 몇일 동안 오지 않는 어머니와 언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 당시 11살의 김은주씨가 자기가 죽을 것으로 예상하고, 유서를 쓰던 날, 어머니와 언니가 기적처럼 돌아왔다. 이후 1999년 오로지 배고픔에서 벗어나고자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갔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2006년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 온 22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생겼다는 김은주씨. 일반학교를 나와 서강대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과 같은 북한이탈주민들의 멘토가 되어주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김은주씨. 현재는 든든한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예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은주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배신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언니는 식량을 구하러 가게 되었고 두부 한모 살 수 있는 돈을 남겨주셨다. 하지만 첫 날에 두부 한 모를 다 먹어버린 나는 엿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마 언니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며 ‘이제 내 차례가 왔구나.’ 싶어 연필을 들고 종이에 11살 짧은 생의 마지막 몇 글자를 남겼다. ‘보고 싶습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여러 번 마중 나갔었습니다... 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날 어머니와 언니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나는 죽어도 살아도 셋이 함께라는 것이 기뻤다.

 1999년 오로지 배고픔에서 벗어나고자 어머니는 두 딸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기로 결정했다. ‘사탕, 과자는 배불리 먹을 수 있단다’는 말 한 마디를 믿고 우리는 북한정부에서 일컫는 배신자, 반역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는 두만강 건너다 총에 맞아 죽자’고 했던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삶도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탈북하여 중국으로 온 많은 탈북자들 중 남성들은 노동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여성들은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도 인신매매의 손아귀에 걸려들었고 중국의 아주 작은 시골로 팔려갔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였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농사일과 가축 등으로 산과 밭에서 나날을 보냈고,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을 듣고 울기도 했었다. 때로는 중국 공안이 들이 닥쳐 집에서도 못 자고 산에서 자거나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그 곳에서 남동생이 태어났고 지금도 동생은 중국에, 우리는 한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몇 년에 한 번씩 만난다.

 
다시 북송 되다

중국에서 동생이 태어나고 일 년이 되던 어느 날 우리는 중국 공안에 의해 북송 되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 탈북 했지만 때때로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반기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기다리는 건 오직 반역자에 대한 인간쓰레기 취급이었다. 우리는 수치심이나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을 북송되는 순간부터 잊어야 했다. 그런 감정들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돈을 찾기 위한 알몸 신체검사는 물론 곳곳에서 들리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감당해야했다. 우리는 여자감옥에서 소변과 대변의 냄새를 참아야 했고 때로는 생리적인 것들을 강제로 참아야 했다. 동생 젖도 떼지 못하고 잡힌 어머니는 젖앓이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그렇다고 말 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 아이를 낳았거나 중국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에 대한 처벌과 멸시는 참아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젖앓이에 강제노동까지 더해져 어머니는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강제노동에 끌려 나가야 했고 쓰러져도 약 한 알 받아보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2개월 만에 그곳에서 빠져나와 다시 탈북하게 되었다. 당시 아사자와 실종자들이 너무 많아 3년 이상 해당지역에서 무소식이면 사망처리를 해버렸던 탓에 우리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신분 확인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미성년자 두 명과 환자를 평생 감옥살이 시킬 수 없었기에 고향 사람을 이송하려고 온 한 남자에게 우리를 떠 맡겼고, 그 남자는 고향까지 가는 경비와 음식 때문에 일전 한 푼 없는 우리를 부담스럽게 느껴 가는 도중 풀어준 것이다.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그렇게 재 탈북에 성공했지만 중국에서도 우리에게 자유도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2006년, 우리는 자유를 찾아 몽골 사막을 건너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다. 탈북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면 한국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자유를 찾아서였다.

 몽골 고비 사막을 넘어 한국에 오기까지 여정 또한 쉽지 만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그 곳에서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알게 되었고,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해 상대적 행운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 같은 또래의 한 친구는 17살에 중국에 넘어와 3번 팔려갔고 아이 엄마가 되어 있었다. 또다른 여성은 중국 인신매매자 때문에 딸과 강제 이별해야 했으며 16살 된 딸이 어디로 팔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난 그 곳에서 한 탈북 남성의 죽음도 지쳐봐야 했다. 두 번의 한국행 시도 끝에 몽골까지 무사히 왔지만 북한에서 한국으로 가고자 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그 아저씨는 끝내 원하고 원하던 한국으로 오지 못하고 건강상의 문제로 몽골 땅에 묻혔다. 지금도 북한과 중국에는 자유를 꿈꾸며 한국으로 오고자 하는 탈북자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기회와 긍정의 땅에서

 중국에 있을 때까지도 나에게는 꿈이란 없었다. 꿈은 사치였다. 북한에서는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했기에 꿈이 필요 없었고, 중국에서는 언제 어떻게 공안에게 잡혀 갈지 몰랐기에 오직 오늘의 안위만 걱정할 뿐 미래지향적인 생각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입국한 후 22살의 나이에 대안학교도 검정고시도 아닌, 일반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나만의 꿈을 찾아보고 싶었고,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9년이라는 배움의 공백기로 수업을 따라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나이만 많고 학업 능력은 부족하고 키까지 작은 나는 어쩌면 말 그대로 못난 아이였다. 하지만 포기란 없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라고 할지라도 북한에서의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탈북자들을 모두가 반겨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믿고 또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고등학교를 개근으로 졸업하고 더 큰 꿈을 안고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난 더 이상 못난 아이가 아니다. 긍정은 긍정을 낳았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멕시코, 쿠바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미국에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사회 봉사활동도 꾸준히 해 왔다.

 뿐만 아니라 탈북자로서 그 정체성을 가지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북한 인권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 의식을 가지고 북한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나는 북한에서 11살 되된 해 식량을 구하러 나간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아 거의 일주일을 굶고 유서까지 썼던 웃지 못 할 경험을 했다. 배가 고파서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다 꽃제비라는 소리를 듣고 흥분했던 것도 어제의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과거가 현재 북한에 있는 내 친구의 삶이기에 묵인하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내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는 정정당당한 이사회의 일원이 되어 지금까지 받은 많은 것들을 조금씩 사회에 환원하고자 자 한다. 그리고 아직도 북한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북한이라는 거대 감옥을 고발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