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10대 소녀 옥이의 탈북기

[증언]10대 소녀 옥이의 탈북기

리 민 옥
탈북여성

저는 1986년생으로 함경북도 회령에서 살았습니다.
북한이 한창 힘든 시기 때 배급이 끊겨 강냉이 죽을 겨우 먹고 살았고, 어머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97년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남은 가족인 아버지와 언니(선이), 동생(이남)이 함께 13살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국수장사, 미나리도 캐서 팔고, 두부도 만들어 보았고 겨울이면 나무도 해 팔기도 했습니다.

학교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지만 학교를 다닌 날은 별로 없습니다. 입학식하고 학교 나가지 않아도 졸업장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잡부금이 많아 학교 다니기 영 어렵습니다. 꼬마과제라고 하여 토끼가죽 6매를 학교에 받칠 수 없으면 장마당에서 사 가지고 와야 합니다.(토끼가죽 1매 100원X6매=600원)그런데 그것을 살돈이 없으면 학교에 나갈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교실 꾸리기할 때 새 책상 드리기 할 때, 한사람이 얼마씩 돈을 내야하는 데 내지 못하면 학교 못나옵니다.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 돈을 냅니까. 그러니까 자연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겁니다.

중국으로 돈 벌러 갔던 어머니가 2003년 9월 조선으로 잡혀왔습니다. 엄마가 조사받고 노동단련대에 있다 11월에 풀려났습니다. 엄마의 몸 상태가 좋아진 후 2004년 1월 11일 탈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엄마, 언니와 함께 셋집에서 살았습니다. (언니는 1999년 9월에 탈북해 인신매매 당했음) 그때가 조선사람 잡아가는 단속기간이라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방에서 라디오만 듣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한국으로 가려고 2004년 3월 17일 연길에서 기차를 5번이나 갈아타고 3월 20일 내몽골(알렌호투) 국경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일행이 11명이었습니다. 중몽 국경의 철조망 2개를 넘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중국 변방대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11명중 2명은 도망치고, 나머지 9명이 잡혔습니다(여성 8명, 남성 1명). 잡히는 순간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정신이 멍했습니다. 감옥으로 들어오니까 잡혀가 북에서 당할 일을 생각하니 그때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만약 잡히면 죽겠다고 수면제를 가지고 갔는데 이것을 입에 넣고 삼켰습니다. 60,000원의 벌금이 나왔지만 낼 수 있는 형편이 못돼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감옥에는 40명 이상의 북조선 사람이 있었고 방이 다섯이었는데 한 방에 7, 8명씩 갇혀있었습니다.

10일 후 4월 2일 오전 9시 두 명이 한 쌍씩 족쇄를 채우고 버스를 태운 다음 공안인 앞뒤로 4명씩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며 말도 못하게 했습니다. 버스는 운전사만 바꿔가며 쉬지 않고 단동에 도착하니 다음날 4월 3일 오후 4시경 이였습니다.

3일 후 북한으로 송환되는 날 4월 6일 한국으로 가려다 잡혔기 때문에 앞이 암담해 모두가 신위주로 향하는 교두위에서 울었습니다.

신의주 보위부에서 3일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모두 옷을 벗기고 중국에서 가지고 물건이나 돈을 샅샅이 뒤집니다. 또 알몸으로 일어났다 앉았다는 반복하는 뽐뿌질을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몸에 숨기고 있던 돈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보위부 조사를 받을 동안은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의자다리를 하고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사정없이 때립니다. 마음이 고운 사람은 그런대로 봐주기도 합니다. 3일 후 신의주에서 회령보위부로 이송되었고 이곳에는 한 방에 30명씩 있었고, 손바닥만한 수건주면서 씻는데 그것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신의주 보위부는 그래도 깨끗했는데 회령보위부는 너무 지저분했습니다. 세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머리를 감는다든가, 목욕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몸에는 이가 형편없이 많이 생깁니다. 정말 생각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인민보안성에서 조사받을 때 남한 영화 쉬리와 장군의 아들을 보았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보위부 조사가 끝난 다음 인민보안성 단련대에서 2달 동안 집짓기단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노동 교양소(회령 창두 노동 교양소)라고 합니다.

식사는 턱이 얕은 양은그릇에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강냉이밥에 아 무 건더기가 없는 소금국을 주기 때문에 노동은 세고 너무 견디기 힘듭니다. 그것만 먹게 되면 허약에 걸려 죽게됩니다. 그래도 나는 집에서 아버지가 펑펑이 가루(펑펑떡)를 보내와 그래도 견딜만 했습니다.

노동 교양소에서 하루의 일과는
오전 5시 기상 식전작업(집짓기, 나무하기, 밭갈기 도로수리 등)
7시 세면, 식사
8시 작업(집짓기, 나무하기, 밭갈기, 도로수리 등)
12시 점심
오후 1시 작업
6시 식사 세면
8시 학습(김일성 학습, 단련대준칙 암송, 당 노래시간)
10시 취침 70명~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남,여 두 방으로 나누어 잠

그 노동 교양소를 나와 집에 도착한 것이 8월 15일입니다. 한번 중국에 다녀온 사람은 다시 북조선에서 살 수 없습니다. 중국에는 먹을 것도, 말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9월 23일 도강해주는 아주머니에게 500원을 주기로 하고 혼자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넘자마자 중국 사람에게 인계되었고 인계받은 사람이 시집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공안에 넘긴다고 했습니다. 다시 북으로 송환당하는 것이 무서워 시집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10월 11일 하북성에 24살의 남자에게 팔려가 한 달반 동안 그 남자와 살게 됐습니다. 그곳에는 11명의 북조선여성들이 팔려와 살고 있었는데 10대가 6명이고 20대가 1명, 40대가 4명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순이라는 언니를 만났고 언니와 함께 11월 20일 시민연합 도움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와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증언은 2004년 12월 태국에서 증언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