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험난한 길을 넘어 한국까지

험난한 길을 넘어 한국까지

백 요 셉

2003년 탈북

2008년 10월 입국

나는 1984년 1월 강원도 회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98년부터 신의주에서 살다가 2003년 6월말 탈북하여 제3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다 2008년 10월 한국에 입국했으며 현재 탈북청년연합 홍보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탈북동기

나는 신의주에서 생활할 때부터 한국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그 이유는 신의주에서는 중국과 한국 라디오가 다 잡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주는 사상 면에서 북한에서도 제일 망가진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단속이 심하긴 하지만 보위부장도 한국 라디오를 들을 정도이다. 한국 라디오의 기지국이 중국에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라디오 중에서 KBS 한민족 방송이 제일 잘 잡히는데 저녁 8시에서 11시까지와 새벽에 잘 잡힌다.

그렇다고 라디오 방송만 듣고 탈북을 결심한 것은 아니고, 라디오 방송을 들은 것과 중국 TV방송을 본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단동 TV와 중앙1〜4TV를 많이 봤다. 중국에도 한류가 있어서 1999년~2000년 시기 중국 TV를 통해 한국방송을 볼 수 있었는데 탈북 2,3년 전부터 많이 봤다. 한국 드라마 “풀하우스”를 비롯하여 송혜교가 나오는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장서희가 나오는 “인어공주”도 보았다. 그리고 한국가수 HOT나 신화의 멤버들이 나오는 방송을 많이 봤고 트로트 노래도 많이 들어서 태진아, 설운도, 주현미의 노래 등 남한의 트로트는 북한에서 많이 배워서 왔다. 심수봉 노래는 거의 공개적으로 부른다.

남한 노래가 너무 유행하니까 칠보산경음악단 같은데서 개사해서 노래를 다시 제작한다. 칠보산경음악단이 처음에는 대남방송목적으로 설립된 비공식 음악단이었는데 지금은 남한 노래들을 개조해서 가사만 바꾼 다음 방영하는 역할을 한다. 그곳에서 재제작한 노래들 중에는 “친구야”, “사랑의 미로”, “손에 손잡고” 그런 노래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사랑의 미로” 같은 노래도 가사를 “나의 운명을 지켜주는 은혜는 사랑이요.” 이렇게 바꾼다. 그런데 가수의 목소리는 똑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남한 노래로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남한노래들을 들어본 젊은 사람들은 진짜 남한노래인지 아니면 칠보산경음악단에서 개작한 노래인지 다 안다. 신의주 도시 학생들은 농촌지원같은 것을 갔을 때 장기자랑을 시키면 노래를 해야 하는데 그럴 때 북한노래를 부르면 친구들이 싫어하고 지루해하니깐 아이들이 다 남한 노래를 부른다. 선생님들이 혹시 따져 물어도 학생들이 칠보산경음악단 노래라고 우기면 되니깐 무지 헷갈려한다. 당 중앙에 있는 사람도 한국 카세트 테입을 버젓이 꽂고 있다.

연변에서도 한류문화를 많이 모방하기 때문에 한국노래가 그렇게 수용되기도 한다. 그런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을 알게 되었고 오고 싶었다. 어렸을 때에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무섭고 나쁘다는 것이었는데 북한에 우호 국가인 중국 국민들이 환호하는 나라라고 생각하니깐 나쁜 이미지가 많이 없어졌다. 또 시기적으로 98년도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전깃줄을 팔아먹으려고 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때는 잡히면 총살한다고 하는 그런 험악한 시대였다. 반면에 중국에서 수입한 버스에는 “내 나라 제일로 좋아” “내 민족 제일” 그런 표어가 쓰여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 어이가 없고, 현실과 너무 달라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입을 열면 사회에 대한 불평, 불만부터 나왔다. 친구랑 둘이서 골방에 숨어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우리와 대조되는 현실을 실감하였다. TV를 봐도 잘 사는 남한과 북한의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가족적인 배경도 탈북에 영향을 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정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북한의 정치와 남한의 정치는 매우 다르다. 북한은 정치라는 것이 매우 단순화되어 있고 단일적이고 여기서처럼 복잡하지 않다. 북한에서 정치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사상이나 조선노동당 위주의 정치사상이라서 단순하다. 거기는 논리라는 것이 없다. 어릴 때부터 정치사상을 주입 받는데 나의 경우 아버지가 군 장교라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엄마가 8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같이 생활을 많이 했는데 어렸을 때는 극단적인 당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반작용을 해서 훗날 충성심이 확 무너졌다. 신의주에 이사 갈 때까지만 해도 김일성, 김정일은 화장실도 안 가는 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신의주에 와서 새엄마가 김정일의 와이프가 몇 명이라더라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그런 신화가 무너졌다. 그게 비단 내 경우만은 아니었다. 2003년 탈출해서 민간에서 숨어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뒤고방(골방)에서 아줌마들이 하는 수다를 엿들었는데 감히 내가 상상도 못하던 그런 내용이었다. “수령님 때까지는 안 그랬는데 장군님 때부터는 사정이 너무 못 하다.” 그런 내용이었는데 들었을 때 매우 충격적이었다.

첫 번째 탈북

한에서는 16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하니깐 군대에 가기 싫어서 열서너 살 때부터 남한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이유도 있다. 그 런데 너무 어려서 가지 못하고 2000년에 결국 16세가 되어 4월에 군대에 나갔다. 군대에서 기회를 봐서 DMZ를 통과해 남쪽으로 넘어가려고 일부러 최전방으로 지원했다. 최전방까지 가게 되었지만 공교롭게도 DMZ까지는 가지 못했고, 남한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는 게 어렵기 때문에 1년 8개월 동안 길을 모색하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수를 써서 군대에서 탈영했다.

2003년 2월 초 신의주와 무산을 통해서 중국 화룡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중국말도 모르고 그 곳 실정도 잘 몰라 허둥대다가, 중국에서는 기 독교 단체를 찾아가면 살 수 있다고 라디오에서 들은 적이 있어서 교회를 찾아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거부당했다. 그 당시(2003년)에 정치범수용소와 교화소 탈주자들 30여명으로 이루어진 탈북자 깡패단이 기세를 떨쳤었는데, 그 무리가 중국에 들어가서 말썽을 일으키자 중국 공안에서 특별단속을 실시하여 조선족 깡패들과, 북한 깡패들이 다 잡히는 사건이 있었고 나도 그 때 바로 잡혔는데 2월 12일 잊혀지지 않는 날이다. 탈북한지 일주일 만이었다.

2003 년도는 중국에 탈북자들이 제일 많은 때였다. 그 때 대홍수가 있어서 살기가 힘들었는데, 김정일이 강을 건너가는 탈북자들을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들었다. 식량난이 심할 때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나가는데 봐주라고 했다가, 탈북자가 너무 많아지고 외국에서 김정일을 헐뜯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깐 그런 지시가 떨어졌다. 연길 감옥에서 심문을 받고 도문으로 이송되어 한 달간 있었다.

도문변방대에서도 몸 검사와 짐 검사 다 한다. 내의나 팬티만 입은 채로 들여보낸다. 변방대수용소의 규모가 꽤 큰데 호실마다 13~15명이 들어가고 남자호실 여자호실이 따로 있다. 가운데에 운동장이 있고 양쪽으로 수용소들이 쭉 있다. 그 때는 무턱대고 때리지는 않았는데 숨긴 것이 발각되면 때렸다. 나도 돈을 숨기고 들어갔었는데 그건 발각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바늘을 숨기고 왔다가 들켜서 맞았다. 바늘은 족쇄를 여는 데 아주 유용하다. 연길에서 후송하여 변방대로 내려가는 길이 두 시간 정도 인데 족쇄 여는 방법을 감옥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때 족쇄를 열고 뛰려고 했다. 연길에서 변방대까지는 후송할 때는 10명 미만의 인원으로 스타렉스 같이 생긴 차에 실어서 한 달에 한두 번쯤으로 자주 후송한다. 변방대에서 조사할 때 무슨 판을 들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번호판에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크게 쓰고, 번호는 안 쓴다.

온성보위부에서의 조사

2003년 초 잡혀 중국에서 온성보위부로 넘겨질 때 스무 명 정도가 함께 넘겨졌는데, 남자는 7,8명쯤 이었고, 나머지는 여자였다. 좀 큰 스타렉스 같은 차로 옮겼는데 중국 변방대 사람들은 사복을 입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고 우리는 족쇄를 차고 있었다. 온성보위부에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그 초상화는 보니깐 섬뜩하고 가슴이 철렁하면서 극도의 공포감이 생겼다. 차에서 내리는데 중국변방대 사람들은 심하게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위부 앞에 차를 갖다 대고 우리가 내리자마자 북한쪽 사람들이 우리 머리채를 잡고 건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중국변방대 사람 중에는 조선족도 더러 있고, 우리에게 밖에서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들어가라고 그래야 안 맞는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내 문건이 잘못 들어갔다. 군대를 탈영했다는 내용과 함께 기독교와 접촉했다는 내용이 그 문건 안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독교와 접촉했던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같이 잡혔던 친구가 다 불었다. 나도 순진했지만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았는데 그 친구는 곧이곧대로 다 말했다. 잡힌 것도 그 친구가 깡패랑 다니다가 칼을 맞아서 스스로 경찰을 불러서 그렇게 들어간 것이었다. 문건 만들 때 중국 경찰에게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을 빼달라고 하면 빼주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 안 믿으니깐 빼달라고 하면 중국 경찰도 인정해준다. 그래서 문건이 넘어갈 때 내 것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이 안 쓰여 있었는데 친구 것에는 다 쓰여 있었다. 나는 조서를 꾸밀 때 거짓말을 많이 했다. 엄마가 중국으로 도망가서 엄마를 찾으러 온 건데 못 찾고 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경찰이 “이진(친구)이라고 알아?” 라고 물어서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거짓말한 게 들켰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맞았다.

보위부에서는 첫날부터 조사를 하는데 남자들부터 조사한다. 우리가 잡혀갔을 때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들은 복도에 앉히고 남자들은 감방에 넣는데 감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개구멍처럼 생겼다. 감방의 크기는 한 평 정도라서 매우 작다. 구석에 화장실이 있고 안쪽에는 3-5년 정도 된 감옥에 오래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한국행을 꾀했다든가 안기부와 통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간수보다 더 지독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은 거의 시체 같았다. 반 영양실조에다가 꼭 지옥의 사자들 같아 보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한테 못 오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좁은 곳에 30명이 쌓여있어야 했다. 그 사람들과의 사이에 그어져 있던 금을 넘어가면 사정없이 팼다. 그러면 또 간수들이 세워서 막 욕을 한다. 그 때 처음에 일주일쯤 있는 동안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로 이가 다 빠지는 것 같았다.

보위부의 수감시설은 기와집 같이 생긴 단층이고 작은 편이다. 건물은 키가 낮고 앞쪽은 사무실과 심문실로 이루어져 있고, 뒤쪽은 감방이었다. 처음에 들어가면 몸 검사를 하고 그다음에 조사를 하는데 조사실에서 팬티까지 벗기고 몸 검사를 한다. 남자, 여자 따로 한다. 한 세 명 정도가 같이 조사 받으러 들어가는데 들어가면 이름을 적고 나이도 묻고 다 적는다. 중국 감옥에서 어려 보이니깐 미성년자로 속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실제 나이는 19살인데 16살 미만으로 속여야 했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여서 그럴싸했는데 친구가 다 말하는 바람에 거짓말을 두 번 했다고 많이 맞았다. 보위부에서의 조사는 일주일 조금 넘게 받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적을 꼬치꼬치 물어본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대답을 하면 무조건 팬다. 심문할 때 혁대를 풀어놓게 하는데 그걸로 친다. 혁대 쇠고랑이로 때리는 것이다. 심문할 때는 의자에 앉혀놓고 같은 질문을 계속한다. 나는 오후시간에 심문을 받았는데 순서를 기다리는 게 피를 말렸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기다렸는데 너무 긴장해서 자기 번호를 잊어버리기도 하는데 번호 부를 때 안 나가면 큰일 난다.

그 때는 화장실도 자기 맘대로 못 가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〇〇번 화장실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대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소변을 볼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대변을 보려면 오래 있던 사람들한테 구박을 많이 받아야했다. 잘 먹질 못해서 처음 일주일간은 대변을 보질 못했다. 그 때 너무 못 먹어서 며칠이 지나니깐 사람들이 일어나다가 푹푹 쓰러졌다.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하고 안 보였다. 잠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긴장하고 있으니깐 그랬던 것 같다. 음식으로는 죽이 나오는데 숟가락을 담그면 숟가락 쇠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멀건 죽이었다. 일과가 조사 받고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조사를 안 받을 때는 다른 사람들 조사가 다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정말 죽을 맛이다. 죽어나가는 사람은 못 봤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모두 초긴장상태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한 번은 중국여자가 탈북자로 오인 받아서 거기 잡혀왔는데 복도에서 집단 구타를 당하는 걸 봤다. 그 여자가 한국말을 못하니깐 수감자 중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통역을 했는데 보위부 놈들이 입이 참 질기다. 그래서 쌍간나, 종간나, 개간나, 백장간나, 백당간나 이런 말을 했었는데 백장간나 백당간나라는 말은 백정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이 여자가 기가 세서 따지는 것을 들었는데 그 중국여자가 하는 말이 “외국인을 이렇게 구타해도 되냐,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나를 이렇게 취급하나.”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깐 막 그 여자한테 욕을 하고 머리채를 잡고 그랬다. 통역하는 사람이 통역을 잘못하면 다른 탈북자가 잘못했다면서 고쳐주기도 하고 그랬다. 그 여자는 며칠 있다가 나갔다.

나는 안전부는 안 갔고 온성보위부에서 온성단련대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피검사를 받았다. 온성보위부에서 청진 집결소로 가서 거기서 모여 있다가 각 지방으로 쪼개진다. 신의주에서 청진집결소로 수감자들을 호송하러 오는데 그게 얼마나 자주 올지 모른다. 한 달에 한번 일수도 있고, 6개월에 한 번일 수도 있다. 온성단련대에서 4월 말에 청진집결소로 보내지는데 내 문건은 신의주로 먼저 넘겨지고, 나는 그 후에 이송되는데 신의주까지 내려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송되는 중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진집결소로의 이송은 열차로 이어졌고, 모두 족쇄를 채웠는데, 당시 족쇄가 모자라서 사람들의 신발을 끈으로 묶어 놓은 상태였고 또 온성보위부에서 열흘 동안 먹지 못하고 심문을 받아서 앞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 때 호송원들이 어떤 여자에게 무언가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도중 주위가 산만해졌고, 기차가 다시 출발하여 속도가 나기 시작할 무렵 기회를 보다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기차가 다시 서고 호송원들이 승무원한테 나를 잡으라고 지시해서 승무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뛰다가 잡혔고 철길 위에서 맞아서 다리가 골절됐다. 질질 끌려가다 다쳤기 때문에 더 이상 후송되지는 못하고 치료기관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단련대로 보내졌다.

온성단련대에서의 생활

다시 단련대로 보내진 후 일을 못하고 5월까지 그냥 누워있었다. 다친 다리의 상처부위에 죽은피가 차가지고 바지가 안 내려갈 정도로 부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 나가고 나는 그냥 누워있었는데 화장실도 사람들이 도와줘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목이 말라도 참았다. 단련대에는 치료해주는 데가 없고 간호원도 없기 때문에 아프면 대책이 없다. 약도 없다. 북한에서는 일반사람도 치료를 안 해주는데 범죄자를 해주겠나. 나는 다리가 그렇게 돼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못가고 그랬는데 내가 좀 어려서 보안원들이 동정심을 발휘해서 어디서 빨간약을 구해 와서 던져줬다. 근데 상처가 깊었기 때문에 빨간약은 소용이 없었다. 내가 너무 아프다고 하니깐 한번은 나를 들쳐 매고 병원을 갔다. 병원에 갔더니 속에 피가 다 차서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 때는 무상치료제가 더 이상 기능을 안했기 때문에 유상치료를 해야 했다. 병원에서 수술비 낼 돈이 있냐고 물어봤는데 그 때 200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돈이 있다고 하면 보안원한테 돈을 줘야하기 때문에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결국 돈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도 못하고 치료도 못 하고 왔다. 그 돈은 탈출할 때 쓰려고 쓰지 않았다. 병원에서 돌아와서 내가 자살 시도하던 칼로 직접 상처부위를 째려고 했다. 그런데 칼을 소독할 수도 없고 그러니 옆에서 째지 말라고 해서 진짜 째고 싶었는데 안 쨌다.

한 달 동안 못 일어나니깐 다리가 굳어져 갔다. 어린애가 누워서 끙끙대니깐 주위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그대로 있으면 다리가 굳어져 불구가 되니깐 움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리를 움직여줬다. 처음에는 정말 아팠는데 그렇게 조금씩 연습해서 나중에는 화장실도 가고 6월초쯤에는 일을 나가겠다고 하고 일하는 사람들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그 다친 다리는 나중에 2005년 쯤 선전(심천)에서 취직해서 교촌치킨 집에서 일할 때 치료할 수 있었는데 기독교 내에 한인 의사가 있어서 그 한의사가 피를 뽑아줬다. 그 전에는 죽은피가 온 몸을 돌아다녀서 몸의 어떤 부분이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피가 등으로 갔을 때 등에서 많이 뽑았다. 일단 나이가 어리니깐 회복이 빨라서 지금은 다리가 괜찮은데 40대쯤 되면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들었다. 무릎이 제대로 아문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춥거나 비오거나 그러면 저리고 아프다.

단련대에서의 일과는, 내부에서의 식사는 두 끼이고 일을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침부터 일을 내보낸다. 일을 하면 하루에 세끼를 먹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일을 나가려고 한다. 일은 아파트하고 살림집을 짓는 것이었는데 벽돌을 만들고 자갈을 채취해서 나르고 콘크리트 깨서 나르고 기초를 파고 그런 일을 했다. 일 하다가 죽는 사람은 없었고 탈출하는 사람은 여러 번 있었는데 탈출하다가 잡히면 맞는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지내는데 밤에는 한 방에서 양쪽으로 갈라서 재운다. 어떤 때는 여자들은 다른 방으로 가서 잤다. 여자들의 수가 많고 남자들은 별로 없었다. 거기서는 물도 차례가 안 들어오면 못 마시기도 한다. 또 세숫물도 여러 사람이 쓰는데 앞에서 쓰는 사람이 그 물로 별짓 다하니깐 차라리 세수를 안 하는 게 낫다.

두 번째 탈북

두 번째 탈북은 2003년 6월 20일 정도에 했다. 그 때는 첫 번째 북송 됐을 때 도망치다가 잡혀서 맞았을 때 꺾인 다리가 다 안 나아서 다리를 잘 못 썼다. 또 그 때는 여름이라 물이 많이 불어서 강을 건너다가 거의 죽다시피 했다. 원래 도문 쪽이 헤엄쳐서 건너갈 정도는 되는데 그 때는 장마 때문에 물이 불어서 강폭이 엄청 넓었다.

강을 거의 다 건너서 중국 쪽으로 넘어왔을 때는 다리도 너무 아프고, 거의 죽다 살아나다시피 하여 건넜기 때문에 몹시 지쳐있었지만 도문은 위험한 곳이라서 그곳에 계속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런데 다리가 아파서 산으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전에 연길에서 도문으로 내려올 때 눈여겨 봐놨던 고속도로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생각했다. 고속도로를 따라 걸으면서도 붙잡힐 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심이 있었기 때문에 차가 오면 무조건 숨었다. 그렇게 가다보니 속도가 너무 느려서 밤새 걸어도 연길까지 도착을 못할 것 같았다. 새벽쯤 되니깐 탈진했고 해가 떠서 도랑에 숨어도 보이기 때문에 위험했다. 체력도 급격히 저하되어 있어서 고속도로 철창을 못 넘을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걸었다. 운이라는 게 올 때가 있는지 걸어가자니 뒤에서 경찰차가 와서 나를 불렀다. 고속도로를 걸어가는 사람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다. 그 사람들도 우리를 보면 탈북자인지 아닌지 뻔히 다 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너무 힘들어서 잡히더라도 반항할 생각도 없었다. 다행히 국경경비대쪽으로 갔을 때 한 나이 많은 조선족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한민족인데 봐 달라, 살려 달라, 어린애들 잡아서 뭐하겠냐고 애원했다. 같은 민족이라서 마음이 움직였는지 북송은 시키되, 보위부에는 넘기지 않겠다고 했다. 나를 데리고 북한으로 들어와서 국경부근의 안전한 곳에서 내려주었다. 그 후 북한으로 넘어가서 숨어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체포되었었고 연변과 대련에서 숨어 살았는데, 그 때는 이주하는 브로커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지도를 사서 보면서 한국으로 어떻게 갈까 궁리하다가 대련, 상해를 거쳐 곤명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국경을 넘어서 하노이로 갔다. 오로지 한국에 가고자 하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강을 따라서 내려갔다. 국경을 넘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지형을 살펴보니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었다. 그래서 8월에 튜브를 준비해서 야음을 틈타 물로 뛰어들었다. 거의 죽다시피 하면서 강물에 쓸려가다가 베트남 초소가 보여 강에서 나와 산을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곳은 정글이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산속에서 헤매다가 화교마을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는 중국말이 통해서 하노이까지 갈 수 있었다. 하노이에 도착하여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사관 문전에서 경찰한테 잡혔다. 그 때가 2005년 여름이었다. 주 베트남 한국 대사관에서 직원이 나와서 면담을 했는데 ‘일단 베트남 경찰한테 잡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목숨을 걸고 거기까지 갔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나는 한국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생겨서 그때부터 대한민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베트남 한국 대사관에서 나를 받아 주지 않아 베트남에서 나를 중국변방으로 보내졌고 나는 그 길로 홍콩으로 향했다. 중국 옌텐항에서 홍콩으로 들어가는 배는 쉽게 탈 수 있었다. 나는 배를 타고 홍콩까지는 들어갔지만 시내로 가려고 하니 민가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그길로 홍콩으로 안 가고 선전(심천)으로 가서 선전에 있는 가구공장을 찾아가 일을 조금했다. 그곳에서는 경찰도 북조선이 어딘지도 잘 모를 정도니깐 안전했다. 그래서 말이 안 통해도 의심을 안 받았다. 광동지방에서는 일자리 광고에 반드시 ‘보통화 하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통화를 못 써도 별로 의심을 안 받았다. 그때는 중국어도 잘 못하고 신분증도 없어서 정규직은 못하고 노가다를 하다가 말을 못 배우면 죽겠어서 말을 배웠다. 그래서 선전에서 계속 2년 정도 있었는데 일자리도 진짜 많이 옮겼다. 처음에는 노가다를 하다가 조금 말이 트인 뒤 웨이터는 할 수 있겠다 싶으면 그걸로 옮기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올라갔다. 나중에는 카운터 일도 봤다. 월급을 받아서 돈이 좀 생겨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다.

러시아를 거쳐 한국으로

그러다가 러시아에 가려고 시도하게 된 때가 2006년 초이다. 그 때 카운터를 보면서 2005년부터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었는데 그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피씨방에 가서 탈북자 관련 기독교정보를 찾다가 어떤 기독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탈북자의 글들이 쫙 떠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민복 대표가 쓴 글을 보고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그 글에서 말한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끓는 마음이 들었다. 밑에 그 사람의 이메일 주소가 있어서 이메일을 보냈다. “탈북자들이 왜 그렇게 사명감이 없고 한국에 와서 자기 밥벌이만 하나라고 비판한 당신 글의 내용이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나같이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힘을 내라.” 그렇게 썼는데 보름 정도 후에 회답이 와서 그런 믿음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 때 당시 나는 정의감에 차서 북한에 다시 들어가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다. 신심이 끓어서 신의주에 가서 불을 지피려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을 목숨 걸고 해보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미친 짓 하지 말라고 펄쩍 뛰면서 한국에 와서 공식적으로 더 큰 일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 나를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이 싫고 한국을 생각하면 눈에서 불이 난다고 했더니 정부가 일부러 그랬겠냐면서 나한테 이해를 시켰다. 그 때는 한국에 가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그분한테 한국에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니깐 브로커를 통해서 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거는 돈을 주며 가는 것이니까 은혜가 없다. 그런 방법 말고 은혜로운 방법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엔을 이용하라고 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환상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UNHCR이 활동을 못하지만, 러시아에서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탈북자를 북송시키지 않는다고 러시아로 가라고 했다. 러시아 쪽으로 넘어가는 국경은 하싸만 호수가 있는 하바로스크 쪽인데 그곳이 아주 무서운 국경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도 그렇게 왔는데 그 길이 안전하다고 자기가 온 길을 따라서 오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이메일을 수 십 통을 보냈다. 자기가 튜브를 타고 왔으니깐 나도 튜브를 타고 오라고 했다. 러시아로 가는 것이 무서웠지만 기독교를 믿으니까 순종하기로 하고 흑룡강성까지 올라갔다. 중-러 국경을 넘는데 그 지역이 북한과 인접해 있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지만 같이 갔던 사람들이 그냥 넘으라고 해서 중국에서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이용해 튜브를 타고 러시아로 들어가다가 중국 변방대에게 발견되었다. 잡히지 않으려고 강을 이탈해 러시아 국경초소 쪽으로 붙었다. 양쪽의 추격을 받아 뛰다보니 철조망 한 줄이 보여서 그 철조망을 넘었다. 가다보니 철조망이 또 있었다. 철조망 두 개를 넘어 계속 가다보니 전기 철조망이 보였다. 전기철조망은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고, 뒤에서는 계속 추적해왔기 때문에 일단 철조망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전기철조망이 있는 지역이라면 군사기지가 있는 지역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철조망 사이를 올라가서 계속 가다가 길을 잃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으니 아찔했다. 그 후 5일 동안 먹지 못하고 헤매다가 겨우 길을 찾아서 한인교회로 들어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길은 전혀 안전하지 않은 길이었고 그 사람은 운이 정말 좋았던 것이었다. 이민복은 그 길이 안전하다고 믿고 내 경우가 성공하면 그 길을 탈북 루트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17 개의 교회를 찾아갔는데 다 예전에 피해를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지만 다행히 마지막 교회 목사님이 받아주었다. 그 교회에서 숨어 지내다가 한국대사관에 전화했다. 대사관에서는 도움을 못준다고 하며 대신 UNHCR 전화번호를 줘서 전화를 했더니 한국 대사관의 승인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던 중 RFA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인터뷰를 했더니 그 인터뷰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인터뷰 한 내용이 도청되어서 다음날 바로 잡힌 것이다. 알고 보니 한인교회는 철저하게 도청당하고 있었다. 러시아로 들어갈 때 나는 중국 신분증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당국에서는 내가 중국 사람인 줄 알고, 나를 중국으로 추방시키려고 했다. 나는 탈북자라고 우겼더니 그 근거를 대라고 했다. 그래서 내 이름, 신분, 집주소 등을 얘기했다. 북한 대사관에서 신분이 확인되어 ‘자국국민이니 자국에 넘겨라’ 라는 송환을 요구하는 문건을 보내 왔다.

그 때 중국에서 가져와 지니고 있던 종이가 바로 북한인권시민연합 팜플렛이었다. 감옥 안에서 그것을 보고 러시아 정부에 “이건 인권침해이다. 북송되는 것은 인정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거기서 재판을 7번 받았는데 러시아 정부에서 북송하겠다고 해서 15일간 단식하다가 쇼크로 정신을 잃기도 하고, 혈서도 썼다. 한편, 국경에서 잡혔을 때 한국에 전화를 했었는데 나와 통화한 기독교 단체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연락을 취한 것 같다. 그래서 내 사건이 이슈화가 되어 국정원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가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였다. 감옥에서 난민신청 인터뷰가 들어와서 인터뷰를 하고 3달 만에 나왔는데 경찰이 따라 나와서 목사님 집에서 또 포위되었다. 목사님이 대사관에 전화했더니 2시간만 참으라고 했다. 그 후에 영사관에서 차가 와서 나를 빼내갔고, 나는 마침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