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함흥시 회상구역 제9호 교화소의 실상

함흥시 회상구역 제9호 교화소의 실상


박 대 국
2009년 탈북 및 입국
2010년 10월 26일 증언

나는 북한에서 1986년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평양시에서 10년 동안 군복무하고, 정치장교 양성기관인 김일성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여 정치지도원(대위)이 되었다. 총 16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때는 2002년 4월이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6개월 만에 교화소로 끌려가게 되고 말았다.

군대에 있던 16년 동안은 내 가정조차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총대만 지고 김일성·김정일 만세를 부르며 충성했는데, 제대 후에는 그런 것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않았다. 당장 가족들부터 먹여 살리는 일이 막막했다. 결국 제대한 날로부터 보름도 채 못 되어 장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4톤 분량의 파동(破銅, 구리), 전깃줄, 기계부속품 등을 중국으로 내다파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군생활로 사회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단 번에 보안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고물장사”에 어떤 법적제제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북한에서는 파동을 팔다가 걸리면 일반 범죄라고는 하지만 정치범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가혹하게 취급한다. 당국에서는 중국으로 내다판 파동(파구리)들이 남조선으로 넘겨져 총과 폭탄이 되여 결국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고 선전한다. 보안원에게 잡혀 처음 보내진 곳은 량강도 김정숙군 보안서(경찰서)였다.


량강도 김정숙군 구류장
김정숙군 보안서 내 구류장은 하전사(계호원)들이 관리했고, 군관(장교)들은 감방을 지키도록 하전 사들을 교육하고 감독했다. 구류장에서 6개월 동안 조사받는 동안 정상적인 밥을 먹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호원(간수)들이 식당에서 남긴 찌꺼기를 먹으라고 주는 데 항의도 못한다. 자기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큰 통에 부어넣고, 멀건 국이나 물에 적셔서 죄수들한테 한 그릇씩 퍼주는 식인데, 그릇을 받아보면 이것저것 다 섞여 있다.

아무리 조사 받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예심이 들어가 공민권이 박탈되기 전까지는 공민이지만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조사할 때 잠도 재우지 않는다. 수사관과 예심원이 생각하는 대로 모두 대답해서 문건이 완료되면,“ 야! 이거 재워라!” 하는데, 조금이라도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하면 재우지 않는다. 그러면 양 손을 등 뒤로 모으고 무릎 꿇고 앉은 채 24시간을 눈뜨고 있어야 한다. 졸다가 넘어지면 계호원이 불러서 손을 창살 밖으로 내밀게 한 뒤, 감방 열쇠뭉치나 권총 소재대로 손등을 내려친다. 조사관은 계속“ 순순히 자백하라”고 물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다 자백하겠다.” 고 해서 새벽 3~4시쯤 잠깐 눈 붙일 수 있었지만, 아침에 다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았더니 다시 매 맞고, 잠도 못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고문이 수도 없이 벌어지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고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고문”이라는 단어도 없고, 사회주의에서는 고문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문은 미국이나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나 있는 일로 생각하고 그것을 “고문한다” 고 하지,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은 고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리는 것이나 재우지 않는 것도 분명히 고문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두들겨 맞았다는 것을 고문이 아닌 취조 중 벌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고문”이라는 말이 있으면 아마 당하는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구류장 안에서는 대소변도 마음대로 볼 수 없다. 소변을 보고 싶으면 손을 들어,“ 선생님, 15번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하고 허락을 구해야 한다. 소변보는 것도 계호원의 기분에 달려 있다. 그가 된다고 하면 볼 수 있는 것이고 안 된다고 하면 못 보는 것이다. 소변 볼 때도 소리를 내면 맞는다. 무릎을 꿇어 변기 바닥에 최대한 가까이 몸을 대고 소리가 안 나게 봐야 한다.

구류장으로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빨리 다른 곳으로 이감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에,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도 자신이 한 것처럼 거짓으로 자백하기도 한다. 나처럼 중국으로 파동을 팔아넘긴 경우에는 보통 무기징역이나 총살에 처해지는데, 나는 중간에서 손을 쓸 수 있는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6년형만 받았다.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구역 제9호 교화소
제9호 교화소로 이감된 때는 2002년 10월이었다. 이감될 때는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한다. 공민증도 박탈당한 우리 같은 죄수들을 이감시킬 때 그들은 영수증을 주고받는다. 교화소로 들어가면, 보안원들은“ 너희들은 반국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제부터 짐승”이라고 말하고, 길을 걸어갈 때도 보안원의 얼굴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앞을 보고 걷다가도 보안원이 다가오면 그가 지나갈 때까지 고개 숙이고 바닥만 봐야 한다.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 경우, 군홧발부터 날아오고, 총탁(개머리판)에 머리를 후려 맞는다.그런 곳에서 2년을 갇혀 있는 동안, 3년짜리 대사(사면)를 받았고, 일을 잘해서 1년이 더 줄어서 2004년 10월에 풀려났다.

남한에 와서 꼭 가보고 싶은 곳 가운데 하나가 교도소다. 이곳에서 수감자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가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로는 교도소에서도 기술을 배우고 일만 잘하면 얼마간의 돈도 모아 나올 수 있고, 텔레비전, 신문, 잡지도 볼 수 있고, 일반사회와는 격리되어 있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교화소 생활을 떠올려보면 언뜻 믿겨지지 않는 일이다.

제9호 교화소에는 대략 1,500명 정도의 남자들이 수감되어 있었고 1반부터 10반까지로 나뉘어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8시쯤 야외작업을 나갔다가 오후 6시 30분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보통 10시까지 고개를 숙이고 꼼짝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 시각이 넘어도 그 날 담당보안원이 자라고 할 때까지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북한에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생일 등“ 4대 명절”이 있는데, 그런 날만은 우리를 통제하는 보안원들도 술을 마셔 기분이 좋아진 터라 편히 앉도록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몇 번의 큰 명절 때만 그렇고 다른 날들엔 계속 머리를 숙이고 무릎 꿇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교화소에서는 밥을 찍어서 준다. 그렇게 밥을 찍어내는 기계가 있다. 통강냉이, 콩 등을 혼합해 삶은 것을 일반 컵 높이보다 더 낮게 만든 작은 용기로 찍어 내어 끼니때마다 한 사람당 한 개씩 준다. 각 호실 문 아래에는 작은 배식구가 나 있는데, 그곳으로 그릇을 내밀면 밥을 넣어주는 식이다. 교화 소에서는 수감자들로 꾸려진 배식반이 있는데, 이들이 밥통, 국통을 가마차에 끌고 다니며 공급한다. 건더기 없이 멀건 국에는 소금도 넣어주지 않는다. 소금을 먹으면 다리에 힘이 생겨 탈출을 시도한다고 해서 안 주는 것이다. 교화소에서 몰래 소금을 훔쳐 먹다 들키면 독감 방으로 보내지고, 못 먹던 소금을 갑자기 많이 먹어 염독으로 몸이 퉁퉁 부어올라 죽기도 한다.

다른 교화소는 피복도 생산하는데 내가 있던 교화소에서는 원래“ 쌍마”라는 재봉기를 생산했다. 하지만 인민소비품 자재 공급이 제대로 안 되다보니 더 이상 생산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김정일은‘ 죄수들을 동원해 무엇이든지 자체로 생산해 팔아먹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땅에서 파낸 흙으로 토피집(흙벽돌집)을 짓는데 쓰이는 블록(벽돌)을 찍어냈다. 교화소 밖으로 블록을 내다 팔아 번 돈으로 쌀을 사들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 돈이 그렇게 쓰였는지, 다른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매일 땅을 파고,블록을 1,000장씩 찍어내야 했는데, 할당량을 못 채우면 밥을 줄이는 벌을 줬다. 죽도록 일도 해야 하고 배도 고파서 너무나 힘들었다. 오후 3~4시경에는 중참시간이 있어서 남새(채소)밭, 뙈기밭(자투리땅에 일군 밭)에 가서 배추나 무를 뽑아 씻지도 않고 물렁해질 때까지 삶아서 먹는데, 너무 배가 고프다보니 그게 그렇게 맛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배고픔을 달랠 수 없다보니 배추를 삶기 전에 따서 버린 꽁다리도 주워 먹곤 했다. 하지만 보안원들은 배추꽁다리는 땅에 묻도록 시키는데 그들 말로는 배추꽁다리를 먹으면 병이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있던 교화소에는 바깥의 가족들이 먹을 것을 좀 들여보낼 수는 있었다. 북한에서는“ 속도전가루”라고 부르는 강냉이가루를 주로 들여보내는데, 바깥에서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배추꽁다리라도 주워 먹는 수밖에 없다. 나도 배추꽁다리는 물론 쥐도 잡아먹어봤다. 너무 배가 고픈탓이기도 했겠지만 불에 구운 쥐가 얼마나 구수한 맛이 나는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수감자들이 지내는 방 안에는 변기통이 붙어 있는 작은 세면장 하나씩 있다. 잡혀오는 사람은 늘 있고 자리는 모자라다 보니 처음 들어가면 온갖 역겨운 냄새를 다 맡으며 변기통 쪽에서 자는 수밖에 없고, 다른 신입이 들어오면 거기서 조금씩 떨어진 자리로 들어가는 식으로 잠자리가 옮겨진다. 굶주림 탓에 사람들은 변기통에 버려진 것도 주워 먹고, 쥐가 변기통을 돌아다니면 그마저 잡아먹는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입에 넣어야 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안원들은“ 너네는 담배맛, 술맛, 여자도 몰라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담배가 너무 간절해 보안 원들이 발로 비벼 끈 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하는데, 걸리면 손이 짓밟히는 것은 예사이다. 보안원이 자기 사무실로 끌고 가 담배꽁초를 물에 풀어 강제로 마시게 하기도 한다. 두들겨 맞지 않자면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고, 역겨워서 토하고, 그 다음엔 속이 뒤집혀 설사하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화소에서는 일은 힘들고, 늘 배고프고, 몸도 돌보지 못하니 모두 허약에 걸린다. 허약이 2~3도 정도가 되면 항문이 벌어지는 지경이 되는데, 회복이안 되면 3~4일 만에 죽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는다.


계속된 죽음, 불타는 시체들
북한 사람들은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나서부터 경제가 타격을 받기 시작해서 연속적으로 자연재해를 겪으며 사정이 더 긴박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시기를 보내면서 1999년 정도까지 죽을 사람들은 다 죽어나갔고, 어떻게든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교화소 같은 곳들이다.

교화소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가족들이 시체를 찾아가지 못하도록 불에 태워버린다. 나는 군 경력 덕분에 반장을 맡아 근로사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잘 안다. 교화소 안에는 벽돌로 쌓은 높은 굴뚝이 있는 헛간이 있다. 한쪽에 시체를 쌓아놓는데 20~30구정도가 차면, 보안원들은 수감자들에게 장작을 가져오게 해서 디젤을 뿌린 뒤 불을 놓는다.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이다.

교화소에서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는 “역적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런 문건은 그 자식들에게까지 평생 따라다닌다. 자기 가족이 교화소에서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느 누구인들 국가에 대한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그래서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역적집안”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것이다.


교화소를 벗어나 남한으로 오기까지
2년간 교화소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지워버리고 나 자신을 짐승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우리에겐 이름조차 없었고, 죄수 번호만 있을 뿐이었다. 교화소를 나왔을 때, 가족이 이름을 불러줬을 때, 비로소 내 이름을 다시 찾았다. 2004년 10월 교화소에서 나오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제 죄를 짓지 않아도 살 수 있을만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번 다시는 짐승 같이 취급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미 북한사회는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란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곳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너도 나도 구리나 마약을 팔고 있고, 누구든 국가가 불법으로 단속하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앉아서 굶어죽는 수밖에 없다. 결국 나도 죽을 때 죽더라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장사에 나섰다. 하지만 교화소 다녀온 사람이라는 딱지 때문에 모두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내가 아무리 김일성정치군사대학을 나오고 군관생활을 했어도 교화소를 다녀오면 사람 취급을 안 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날들이 계
속된 끝에 남한으로 오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북한에선 들어보지 못한“ 법대로 합시다!”
나는 2009년에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왔기 때문에 아직 이 사회가 낯설게 느껴지는 점들이 적지 않다. 한번은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 타다가 교통경찰에 단속된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남한사회와 북한사회 간의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으면 북한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안원(경찰)들이 무서워서 무조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하며 통사정부터 했을 텐데,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해 놓고도“ 바쁘니까 빨리 빨리 법대로 처리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런 것이 인권인가, 민주주의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북한이었다면 경찰에게 두들겨 맞을 일인데, 남한에서는 경찰들이 오히려“ 아,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잘못한 사람이 요구하는 것도 들어주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인권”이나 “법대로”라는 말 자체를 들어본 적 없던 나였으니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남한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판을 받아도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죄가 되기도 하는데, 북한에서는 검사가“ 이 사람은 구리를 팔아먹었습니다.”하면, 변호사는“ 예 맞습니다, 옳습니다, 검사님 말대로 처리합시다.” 하고 벌을 주라고 맞장구를 친다. 내가 변호사에게‘ 어찌 그러나?’ 하고 물어봤을 때는“ 우리는 국가를 반체제로부터 지켜야 하지 않냐?” 하는 말 뿐이었다.

북한에서는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공화국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법을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세세한 내용들을 알게 되면 싸움이 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안서 일을 예로 들어보면, 만약 사람들이 보안원이 어떤 경우에 사람들을 단속하고 구류시킬 수 있도록 법에 나와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면,“ 나를 왜 이렇게 단속하냐?”,“ 내가 알기로는 이렇게 되었는데 왜 단속하냐?” 하면 단속하는 사람들은 할 소리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법의 몇 조, 몇 항에 근거해서 잡혔고 처벌 받는지도 모른다. 사회교육에 법 교육이란 것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인권을 유린당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당에서도, 국가적으로도 다른 것들은 모두 차단하고 오로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세뇌교육만 시키기 때문이다. 방송은 조선중앙텔레비죤, 만수대텔레비죤, 조선교육문화텔레비죤 3개가 있다고 하지만, 평양을 제외한 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중앙텔레비죤 채널 하나 밖에 없다. 라디오방송의 경우 개성에는 개성, 평양에는 평양방송, 전국에는 조선중앙방송이 있고,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방송하는데, 이마저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로 시작하고,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선전방송 일색이다. 이외에는 모든 주파를 차단해 세계가 돌아가는 사정이나 진실을 들을 수 없도록 막아왔기 때문에 북한 주민 대부분이 바깥소식에 깜깜하거나 반신반의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정일이 더 이상 독재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 주민들도 몰래몰래 남한 영상물을 본다. 하지만 호기심에 그것을 보면서도 정작 그런 영상들은 남한에서 만든 선전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영상물에서 남한 도시의 번쩍번쩍한 불빛과 자동차를 보아도‘ 아무리 발전되었다 해도 저 정도로 잘 살 리는 없다’고 쉽게 믿지 못하고,‘ 그런 것들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 남한에서 과장해서 만든 것’이라는 당의 교육을 순진하게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성토하고 있지만 북한의 TV와 라디오는 그런 사실은 절대로 전해
주지 않는다. 당에서는 외세가 우리를 비방·모략하고 있으니 이를 짓부술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외부세계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려는 데만 열심이다.


고문도‘ 개인의 숙명’으로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개념, 단어조차 모른다. 우리가 세 살 때쯤 말을 배울 때,“ 김일성,”“ 김정일”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북한의 세뇌교육은‘ 미국과 한국이 인권의 불모지이고, 북한은 지상낙원’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이 죄를 져서 감옥에 들어가면 하늘 한 번 제대로 볼 수 없고, 간수들의 얼굴조차 쳐다볼 수 없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인권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북한에서는 자기 한 몸 먹고 살기 바쁘다. 시집, 장가를 가서 새 가정을 이루고 나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우리 집이 5인 가구인데, 여기 남한에서는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으면 아르바이트에 나서면 되지만 북한에서는 그런 일거리도 없고, 일 년 365일 꼬박 김정일을 위해 일해도 배급도 안 준다. 고작 2~3천 원으로는 쌀 1~2 kg 사면 끝이다. 그런 지경이다보니 부모를 버리는 것도 예사다.

북한에서는 노인들도 죽지 않고 살자면 자기 장사를 해야 한다. 2009년 7월에 중국으로 탈북하려고 량강도 혜산 시에 잠시 머물 때였다. 65세 된 할머니가 집 앞 길바닥에 나와 사탕, 과자, 담배를 조금씩 놓고 팔고 있었다. 장사를 하려면 10~15 km 떨어진 곳까지 가야하는데, 늙은 사람들 대부분이 몸이 성하지 않다보니 멀리 갈 수는 없고, 가만있자면 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살자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량강도를 비롯해서 이곳저곳 시찰하고 돌아간 김정일은 그런 장사도 하지 못하게 조치하라고 했다. 한 나
라의 지도자라면 성하지 않은 노인들도 왜 그렇게 장사를 해야 하는지, 먹고 살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는데, 아무 대책도 없이 무조건 못하게 하라고 하니 보안원들도 김정일 지시를 지킨다며 무조건 다 빼앗아 간다. 그래도 늙은이들은 하루에 국수 한 그릇이라도 먹자면 보안원들 눈을 피해 골목길 장사라도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런 할머니에게 보안원이 뭐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으니 아들 뻘 되는 35살짜리 보안원이 할머니 목덜미를 잡고 100미터나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 안타까운 광경도 매일 대문만 나서면 볼 수 있는 인권 유린이었다.

남한에서는 자식이 집 밖에서는 회장이든 사장이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자기 부모님께 공손히 하고 잘 모시지 않으면 모두 손가락질을 한다. 대한민국에는 내 부모 앞에서도, 다른 사람 부모에게도 머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동방예의지국다운 문화가 남아 있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그런 예의와 도덕도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는 그런 것조차 옛말이 된 지 오래이다. 북한에서는 법도주체사상에 기초해서 사람 중심으로 되어있고 “인민보안원”은 말 그대로 인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보안원들이 백주 대낮에 나이 드신 할머니를 질질 끌고 가도 아무도 말을 못하는 그런 세상이다. 나도 남한에 와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고, 인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탈북하기 전인 2009년 초에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 구역 보안서에 잡혀있던 친구를 위해 면회를 갔는데 친구가 얼굴이 너무 험산하고 몸을 제대로 가늠 못하기에“ 왜 그렇게 됐는가?” 물었더니 조사 받을 때 죄를 시인하지 않았다가 보안서 마당 게양대에 족쇄에 묶어 보안 원 13명이 달라붙어 자기를 때렸다고 하였다. 보안원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발버둥질했다고 13명이 내려쳐 사람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 다시 사회로 나오게 되더라도 어느 누구도‘ 내가 고문당했다’ 말은 절대 안 한다. 그냥
‘내가 썩어지게 맞았다’고 말한다. 나라가 그렇게 교육했고, 사회 분위기도 그렇다. 아무리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억울하게 맞아도 그저‘ 내 숙명, 내 운명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2009년 여름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과 라오스를 거쳐 2009년 12월 남한으로 왔고, <하나원>을 거쳐 2010년 5월 사회로 나왔다. 새로운 남한사회 생활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북한과 남한의 생활을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 느끼는 것들이 많다.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을 사람들이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