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평양과 평양이 아닌 두개의 나라

이 글은 제 2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2000년 12월 8일)에서 발표된 증언입니다.

 

이 근 혁

 

저는 1998년 11월 22일 두만강을 건너 같은 해 12월 2일 대한민국에 입국한 이근혁입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는 군의관(대좌)이셨고, 어머니는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하시고, 대공모출판사 기자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북한에서는 토대도 좋고 가정에 권력도 있다는 집안이었지만, 저희가 평양에 살다가 아버지의 발언상의 과오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쫓겨 내려간 다음부터는 저희 생활에 큰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평양에서는 그래도 때에 배급도 주고 생활필수품도 매달 공급을 했지만 지방은 그런게 전혀 없었고 나라에서 주는 배급은 끊어진지 오래고 생활필수품은 아예 생각도 못하게 됐습니다. 곳곳에서 굶어죽는 사람을 보는 건 너무 흔한 일이고, 어린아이들이 공부할 나이에 공부는 못하고 부모님들의 장사를 도와서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서 나무를 판다는 등 어린 나이에 가족 살림을 걱정하는 것을 볼 때 저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로써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엄연하게 평양과 평양이 아닌 두개의 나라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에서는 진짜 학생들이 비디오에서 나온 것처럼 자그만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장마당에 나가서 짐승도 먹지 않는 그런 음식을 주워 가지고 먹고 그래서 병에 걸려 가지고 죽고 이런 비참한 현상이 진짜 북한에서는 아무런 감정을 못 느낄 정도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김책공대를 졸업하셨고, 아버지도 군의관 대좌셨는데 이런 가족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평양이라는 나라에서 추방된 다음부터는 북한 내에 있는 평양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은 아무리 가문이 좋다 해도 일반 사람들과 생활이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김책공대를 졸업한 저의 어머니도 한끼 끼니를 위해서 걱정하는걸 보고 저는 열네살에 학교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열네살부터 저는 장사를 시작했고 장사를 시작하면서 북한이라는 현실을 피부로 느끼게 됐습니다. 그래서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해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같은 해 94년 말에 탈북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을 준비하여 중국 국경을 다섯번을 넘나들면서 북경대사관까지 가는 길을 터득했고 마지막 다섯번째는 어머님을 모시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탈북하는 과정에 제일 가슴 아픈 건 중국 땅에서 조선 사람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여성들은 물건처럼 팔려 다니고, 남성들은 소처럼 일만 해주고 밥만 먹고 겨우 잘 수 있는 거처나 얻으면서 일하는걸 볼 때 조선 사람들이 왜 이런 천대를 타국에서 받으면서 살아야 되나 하는 그런 생각에 피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중국땅에서 진짜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으면서, 돈을 구걸하여 살아가는 그들이 북한땅에서도 인권을 보장 못 받고 오직 굶주림과 배를 채우기 위하여 탈북해가지고 중국 땅에서도 인권을 보장 못 받고, 죄 아닌 죄 때문에 공화국에 잡혀가지나 않을까 밤잠을 못 자고 온종일 잡혀갈까 두려운 마음에 살아가는걸 보면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저는 그들이 북한땅이 아니라 타국에서 만큼이라도 인권이 보장됐으면 하는 작은 바램입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합쳐서 타국땅에서 지금 목숨의 갈림길에 서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주는 일을 많이 벌려주셨으면 하는 생각이고 또 그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으면 하는 게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