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탈북청소년들의 이야기

아래 탈북청소년 3명의 글은 2005년 중국을 떠나 무사히 동남아 제3국에 도착했을 때 북한인권시민연합 직원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탈북청소년들의 이야기

- 첫 번째 이야기

원 철
탈북청소년

저는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1990년 이전에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쪽이 군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나니 먹을 것을 자주 보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식량난이 일면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가에서 먹을 것을 보내지 않아 살기가 곤란해졌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그다지 생각나는 것은 없고, 학교 안가면 선생님이 때렸는데 자주 가지 않고 그냥 동내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특별한 일은 하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자주 때렸습니다. 집안에 있는 거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 집도 팔아서 술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2003년에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5살 때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에게 물을 붓고 칼로 엉덩이를 찔렀던 일입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고 중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98년도에 탈북하여 자리 잡은 곳이 중국 길림성 왕청입니다. 주소를 자세히 아는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99년도 7월쯤에 이모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너무 많이 불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돈 200원에 사람을 사서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이모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그네가 나타나서 저는 그 사람을 따라가고 이모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돌아갔습니다. 그 나그네를 따라가니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조선족인데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가 공안에 높은 사람을 알고 있어서 저는 조선족이 다니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북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싸우는 일도 있었지만 내가 친구들 보다 한살 많고 덩치도 좋아 그리 많이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공부가 어려웠는데 한 1년쯤 지나니 한족어 시간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한족어는 전교에게 2등정도 했고, 점수도 98점정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저는 축구를 제일 좋아 했고, 저는 골을 넣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리고 탁구도 조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 춘량진 양광촌으로 이사를 했지만, 학교는 옮기지 않고 계속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족 학교에서 5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2003년 11월 14일 공부하는 중 공안이 와서 경찰서에 엄마가 있으니 가자고 해 따라갔더니 엄마가 경찰서에 잡혀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점심먹이고, 왕청 감옥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3,4일 있다 도문수용소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조사를 받을 때 누구와 같이 탈북했는지, 언제 왔는지, 도와준 사람 누구인지,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그래 살던 곳은 왕청이고, 탈북할 때에는 먼저 이모가 같이 넘어오다 물이 깊어 다른 남자가 도와주어 넘어왔는데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는 더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의 식사는 한 끼에 선밥을 반 주먹 정도와 소금국을 주었는데, 소금국이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이미 허약에 걸렸습니다.

그곳에서 2,3일 후에 북조선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이곳에서는 엄마와 따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온성 보위부에 도착하자 남자 여자를 나누어 조사를 합니다.
엄마는 여자 24살 정도의 여성이 조사를 했답니다. 여자들은 옷을 벗긴 후 손을 위로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적으로 시킨답니다.

남자는 팬티만 입게 하고 나머지 옷을 모두 벗게 합니다. 벗긴 옷은 옷 솔기 솔기를 샅샅이 뒤져봅니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팬티 속을 뒤집니다. 혹시 숨겨가지고 온 돈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감방으로 들어가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책상다리하고 두 손을 앞에 놓은 채로 앉아 있게 합니다. 한사람씩 불러내어 조사를 하는데, 잡혀온 지 이틀 후 엄마와 저는 간수가 불러서 무엇을 물어보았는데 이미 허약에 걸려 정신이 없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답을 못하자 간수가 손으로 얼굴 정면을 3번 때리자마자 저는 엎어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때린 사람이 이거 죽었는가하면서 앞으로 엎디라고 하여 엎뎌있었더니 조금 정신이 들면서 괜찮아졌습니다. 엄마는 저보다 많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저는 조사를 하지 않았고, 며칠 후부터 엄마만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간수가 안보고 있을 때 책상다리를 피거나, 눕는 경우 간수에게 들키면 앞쪽으로 불러내어 손을 창살 밖으로 내밀게 한 후 몽둥이나 손전등으로 때려 손톱이 새까맣게 멍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14일 동안 책상다리 앉은 자세로 있었고, 식사는 국수죽을 밑바닥이 보이는 정도의 양을 줍니다. 후루룩 마시면 그만입니다.

변소 갈 때는 서서 “선생님 3호 3번 소변볼 수 있습니까.” 간수가 “응”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소변을 볼 수 있지만, 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소변을 못 봅니다. 우리가 갇혀있던 작은 방에 열 명 이상이 앉아있어 상당히 좁습니다. 소변을 보는 변소는 그 감옥 안에 있고, 누워 잘 때는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똑바로 눕지 못하고 모로 누워 잡니다. 바닥은 나무 바닥인데 덮을 담요도, 깔 요도 없이 입은 채로 그냥 웅크리고 자야합니다. 저도 그곳에서 발이 얼어 나중에 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변은 방에서 보지만, 대변은 밖으로 나가 여자들이 있는 방에서 봅니다. 그때도 “선생님 대변 다 봤습니다.”하면 간수가 “응” 또는 “알았다”고 합니다.
그곳에선 목욕도 못해 이가 너무 많아 앉아서 이를 잡기도 했고, 저는 치약, 비누, 휴지를 가지고 가서 나올 때까지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잡혀온 사람끼리 때리기도 합니다.

11월 29일 저의 번호를 불러 나갔더니 엄마와 함께 고모네 동네인 동포구에서 온 차를 타고 동포 안전부에 도착했습니다. 안전부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보위부와는 다르게 동복만 벗기고 손으로 옴 몸을 만지며 조사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려 안전부에서 하루만 자고 고모네 집으로 보내졌고, 엄마는 안전부에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고모네 집에 도착 후 엄마가 안전부에 있다고 알리자 고모가 안전부에 가서 엄마를 만난 다음 엄마는 고모네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3,4일 후 안전부에서 엄마와 나를 다시 불러 엄마는 6개월 동안 노동단련대로 보내졌고, 저는 나이가 어려 고모네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노동단련대에서 허약에 걸려 3달 만에 병보로 나왔습니다. 이때가 2004년 3월 입니다. 엄마 말씀이 보위부로부터 허약에 걸려 노동단련대에 들어오자마자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엄마와 저는 고모네 집에서 몸을 추수린 후 엄마가 2004년 5월에 먼저 탈북해 돈을 벌어 가지고 와 저를 데리고 탈북했습니다. 탈북해 먼저 탈북한 이모집에서 생활하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다시 이동했고, 또 다시 왕청으로 이동해 다시 잡혀갈 것이 두려워 지금까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방에서만 지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유 화
탈북청소년

저는 1986년 5월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으로는 엄마 아빠 오빠 동생 그리고 저 5식구입니다. 저는 늘 마음속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엄마가 저를 데리고 집을 나와 엄마와 단살 둘이서 살았습니다. 제가 5살 되던 해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저는 아버지와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집에는 계모와 엄마가 다른 동생이 한 명 더 살고 있었습니다.

7살에 학교 다니기 시작(1992년) 했고, 인민학교 2학년부터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 세수대야(소래)에 담아 산나물 장사하고, 장사하다 너무 배고파 밥을 도둑질해 먹다 엄마, 아버지에게 매 맞고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여러 번 뛰쳐나왔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저희들을 기르기가 너무 힘들어서 오빠와 저를 계모학원(고아원)에 보내자고하였는데 아빠가 저는 남겨두고 오빠만 보내라고 해서 오빠만 가게 되였습니다. 난 집에서 장사도 하고 산나물도 캐서 팔고, 또 배고프면 옷도 내다가 팔아서 그것을 판돈으로 국수를 사 먹다가 잡혀서 집에 들어가 매도 많이 맞곤 했었습니다. 어느날 계모학원에서 오빠가 아프다고 해 집으로 옮겼지만 이미 오빠는 계모학원에서 허약에 걸려 집으로 돌아온 지 3일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것이 제 잘못 같아 늘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 후에 엄마와 같이 장사도 다니고 산나물도 캐다가 반찬과 나물죽을 써먹었습니다.

6월 어느날 제가 11살 때였습니다. 엄마가 저보고 혼자서 성냥가지고 장평에 가서 감자하고 바꿔오라고 했습니다. 장평에 가서 감자를 바꾸려고 했는데 바꿔주지 않아 헤매고 있다 배가 너무 고파 삶은 감자를 성냥하고 바꿔 먹었습니다. 집에 가서 욕먹을 까 봐도 그랬지만, 형제간이 부모가 달라 정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부모가 매일 싸우고 매 맞고 하는 것이 너무 싫어 집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특히 엄마가 계모라서 그런지 야단치는 것이 더욱 싫었습니다. 그래 다른 때라면 집에 들어갔겠지만 이번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집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16살 때까지 아는 언니네 집에서 살았습니다.

들리는 말에 나진 선봉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 혼자서 나진에 쳐 있는 전기 철조망을 피해 나진 선봉으로 무사히 들어가 중국 사람들과 함께 장사도 하고 쌀과 배추를 팔기도 했고, 철조망을 주워 팔아 밑천을 잡았습니다. 혼자서 떠도는 아이들끼리 산속에 비닐 집을 짓고 살기도 했습니다. 제가 16살 되면서 아버지도 보고 싶고, 그동안의 잘못도 뉘우치게 되어 증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갈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2001년도 1월에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가기 위해 나진을 떠났습니다. 중국에서 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진에서 1월 24일 무산쪽 기차를 타고 가서 26일 강을 건넜습니다. 같이 장사를 했던 주와 함께 강을 건너는데 무서웠습니다. 날짜를 정했지만 팔려가지 않기 위해 정해진 날짜 전날에 건넜습니다. 중국에 가서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돈을 50원씩 주었습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 호의적이었고 같이 간 언니는 중국에 왔다가 송환된 경험이 있어 중국을 잘 알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보니 근사해보였습니다. 먹을 것도 희한하고 옷차림도 근사했습니다. 어디쯤인가 도착해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할 줄을 몰라 서로 웃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한 집에 있었습니다. 답답해서 나가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 교회에서 우리를 소개했는데 우리 3명 말고 한명이 더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유가 없고 숨어서 살고 떨며 살아서 힘들었습니다. 그냥 집으로 갈 수 도 있었지만 집에 가려면 더 힘들 것 같았고 못 살 것 같았습니다. 집에 들어가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집에서도 나를 반겨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자유가 없이 숨어 살다보니 정말 뛰쳐나오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2004년 7월 그리고 올해 2월, 4월에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여 기대를 했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세상적으로는 노래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 한국에 가서 신학교에 가서 영어와 일어로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복음을 전하고 돈을 벌어 중국이나 미국으로 가서 저희 부모님과 저를 돌봐주신 마담께 도 은혜를 베풀고 싶습니다.

마담은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저희를 5년이나 돈도 없으면서도 돌봐주시고 또 밖에 나가면 잘못된다고 하면서 돌봐주었습니다. 한번은 공안이 나온다고 하여 하루 종일 김치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겨울이라 이불을 가지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뒤져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고 그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번에 나올 때에도 검열을 심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고 무사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민주, 민희
탈북청소년

저희 자매는 언니인 민주 1986년 6월 25일에, 동생 민희는 1988년 4월 23일 함북 은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화와는 같은 동네에 살았고 인민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인민학교 2학년 까지는 잘 다녔는데 3학년부터는 잘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닌다거나, 장사를 해야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화와는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엄마와 나진선봉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곳에서 유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서로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저희 두명 모두 네 식구이고 아버지는 은덕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만 계시다 나중에 집이 바빠지자(힘들어지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다니시는 탄광에서 주는 하루 밥그릇을 끓여서 나눠먹고 굶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8살 때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일주일 동안 굶은 적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물만 먹다보니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고, 일어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골이 빙빙 돌았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동생 민희는 울다가 자고, 또 울고 이러면서 일주일을 견뎠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일가족이 죽을 것 같아 아버지가 친척집을 찾아다니며 식량을 빌려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기운을 차린 후 더 이상 은덕에서 먹고 살 수 없어 제 나이 12살 때 엄마와 동생은 나진선봉으로 옮겨가 배추장사를 했습니다. 돈을 조금 벌어 2000년 10월에 다시 은덕으로 갔었는데 아버지는 월급도 주지 않는 그곳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진에서 만난 유화와 그때부터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무산으로 나와 그길로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어머니가 병이 많으셔서 앓으신 후에는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잘된 후에 엄마,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한국에 간 후에 중국으로 가서 중국 사람과 결혼 해 살면 엄마, 아버지를 뵐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세상적으로는 모델을 하고 싶습니다. 아나운서도 하고 싶습니다. 뜨개질 같은 것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