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충성을 다했다는 죄 – 2

2012년 생명과 인권 여름호에 실린 장영걸 씨의 수기 "충성을 다했다는 죄" 두 번째 편입니다.

충성을 다했다는 죄 - 2

 

장영걸 (가명)

2008년 탈북, 2009년 남한 입국

정보 및 지식의 차단

북한의 TV 채널은 ‘평양채널’ 하나 밖에 없고, 다른 채널은 보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라디오도 평양 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 파장을 고정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반도체 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면 간첩으로 간주하여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컴퓨터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으며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하다. 핸드폰은 작년부터 보급이 시작되었지만, 군대에서는 소유하지 못하고, 당, 행정 등 간부들과 엘리트들만 가질 수 있다. 그마저도 국내의 제한된 지역에서의 통화만 가능하고, 국제 통화는 생각도 못하는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북한은 외국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철저히 ‘통조림화’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인민은 철저히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 정부가 인민을 우롱하는 예로서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쏴 올렸다고 TV에서 요란하게 뉴스를 내보낼 때, 나는 핵분야에서 과학자로 일하는 여러 명의 학교 동창들과 TV 앞에 앉아 있었다. 뉴스에서 아나운서는 “…철저히 우리의 과학자, 우리의 자체의 힘으로 인공위성을 성과적으로 쏴 올리는 데 성공하였으며, 우리 주체의 위성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노래를 온 우주에 소리 높이 울리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하자, 나의 동창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내가 왜냐고 물으니, 그들은 ‘러시아 과학자 12명이 주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명의 외국 과학자들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기본적인 자재와 설비들은 다 배로 외국에서 실어 왔다’고 실토하였다. 또한 ‘이번에 발사한 것은 인공위성이 아니라 장거리 대륙 간 탄도 로켓이었는데 일본을 넘어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로켓만 가지고도 남한과 일본은 물론이고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들까지 타격할 수가 있으니 큰 성과라고 말하였다. 김정일은 이런 식으로 인민을 속이고 기만하면서 기반 유지를 위해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등 북한을 군사강국으로 만드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제대와 재쏘임업대표부

북한군대에서 복무할 때, 보통의 항일투사 자제들이 그렇듯 고위직 아버지 덕택에 나의 진급도 상당히 빨랐던 편이다. 하전사 복무를 거쳐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중좌 직급의 직무에 배치되어 27살에 소령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니 아주 빠르게 진급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 당시에도 북한 군인들이 남한에 귀순하는 일이 많았기에, 김정일이 “외국 출신 아니면 계급적으로 높은 사람 자제들이 외국으로 달아난다. 그러니 그런 군인들을 다 검토 정리하여 제대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은 김정일 말이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곳이니, 나는 꿈이 꺾인 채 강제제대 되었다.

강제제대 된 후 나는 재쏘임업대표부로 가게 되었다. 당시 소련에 가보니 북한 재쏘임업대표부와 대표부당위원회 그리고 대표부보위부가 위장을 위하여 안전부의 이름으로 있었다. 그 산하에 2개의 임산연합기업소와 연합당위원회 그리고 연합안전부가 있었으며 그 아래 17개의 임산사업소, 사업소초급당과 임산사업소 안전부가 있었고 총 인원수는 2만 5천명이 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국내에서 죄를 지었거나, 교화2) 출소자, 기본 계급이 아닌 청산 계급을 비롯한 조선 혁명에 필요 없는 자들을 재쏘임업대표부 노동자로 보냈다. 나는 군대에서는 강제 제대되었지만 거기에는 지도원 급으로 파견되었다.

재쏘임업대표부로 보내지는 노동자들, 특히 장애를 가졌거나 중병을 지닌 자들은 혁명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루는 우리 임산사업소의 산지중대에서 산불이 일어나 모든 인원이 산불 진압에 동원 되었고 러시아 사람들도 헬기 2-3대를 타고 도우러 왔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중대부 옆 반토굴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벌목하다 사고로 팔과 다리를 못 쓰고 누워있는 사람, 그리고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 하는 사람이 12-13명이 있었다. 불이 그 반토굴까지 다가왔으므로 이들부터 빨리 대피시켜야 하는데 북한 사람들이나 소련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니 저 사람들부터 구하는 게 기본이 아닙니까” 하니까 다들 그저 “됐어, 됐어” 하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보위지도원한테 “왜 저 사람들 헬기로 빨리 옮겨서 치료하여 살리지 않는가?”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됐어, 됐어. 모르면 가만있으라. 저것들은 다 죽어도 돼”라고 하기에, 내가 “왜요?”하고 물으니, “저것들은 계급적으로 다 청산 대상이야…….”라고 하였다. 이게 바로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평양에 있는 장애인들을 혁명에 불필요한 존재다 해서 내쫓은 적도 있었다. 외국인들이 와서 팔다리 없고 절뚝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평양 모습을 다 흐린다고, 장애인을 다 내보내라 해서 그 때는 다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학급에도 꼽추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평양에서 쫓겨 나갔다.

그때, ‘꼭대기부터 이러니까 나라 전체가 안 되겠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장애를 가졌거나, 계급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즉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부모들이나 할아버지라도 일제시기에 흠이 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또 북한은 정책에 반대하는 인민들은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그게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완전통제구역으로 보내버리거나, 숙청하고, 총살하고, 공개총살까지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못 봤지만 제대 뒤에는 나도 공개총살을 많이 보았다. 강제제대 되자마자 당국에서 한 번 모이라고 하더니 경기장 옆에 숱한 사람들을 앉혀놓고 다섯 명을 따로 세워 놓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삐라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사실은 삐라를 살포하지도 않은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온 것이었다. 당국은 김정일이 언제까지 혐의자를 잡으라고 날짜를 정해주면 그날까지 체포해야 되니까 다른 죄가 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공개총살로 해치운 것이다. 당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제일 앞에 앉아서 이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사형수는 말도 못하게 혀 안에 자갈을 물리고 묶어놓은 후 “삐라 뿌린 놈”이라고 하더니 쏴 갈겼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본 공개총살의 광경이었다.


충성의 대가: 체포와 사상검토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돈을 벌면 자기가 못 가지고 다 당에 바쳐야 된다. 그것으로 충성심을 평가 받고 훈장도 받고 직위도 올라간다. 나는 돈을 잘 벌어서 평가도 잘 받고 심지어 김일성・김정일과 사진도 여러 번 찍었고, 감사장과 표창장, 그리고 선물도 여러 번 받았고, 훈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험한 꼴을 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충성을 다하고 돈 잘 버는 사람들도 때때로 사상검토를 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나도 이런 식으로 체포되어 사상검토를 당했다.

하루는 출근하는데 길옆에 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앞 좌석에는 내가 잘 아는 보위원이 타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면서 뒷문을 열고 타라고 하여,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차에 탔다. 순간 양쪽에서 사람들과 운전수가 올라타더니 차가 출발했다. 보위부가 사람을 이렇게 잡아가니 집에서는 내가 체포된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저 없어지고 말 뿐이다. 하지만 결국엔 다들 안다. ‘북한정권에서 또 체포해갔구나’ 라고.

그 후에 알았지만, 내가 체포된 원인은 이렇다. 국가안전보위부에는 외화벌이 또는 무역회사들에서 한 부서가 3년 동안 국가계획을 초과 수행하면 책임자를 사상검토를 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방침이 있다. 사상 검토의 이유는 책임자가 “재외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분명히 그 나라 특수기관들에 전향했다. 그래서 돈도 잘 번다”라는 것이다. 즉, 나는 돈을 잘 벌어서 당 혁명자금에 많이 기여했는데, 오히려 기여를 많이 할수록 사상검토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책임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에 한 푼 남기지 않고 그저 돈을 버느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말이다.

많은 외화벌이 일꾼들이 사상검토를 당하는 것처럼, 나도 사상검토를 당했다. 사상검토를 당하면 살아남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체포된 후 심문을 당하는 과정에 거의 다 죽거나,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정치범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가서 죽게 된다. 여기에서도 죽지 않으면 어느 산골에 추방되어 광산이나 탄광에 가서 죽을 때까지 일한다. 나도 8년간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 가서 많은 것을 겪었다.


보위부 예심국에서의 고문

나를 체포한 곳은 국가안전보위부 제3국이라는 대외정보국이다. 처음에는 나를 초대소로 데려가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사상검토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며칠 동안 사상검토에 잘 응해달라”고 선포하고 그곳의 계호원들에게 나를 넘겼다.

그들은 제일 먼저 내게 혁대부터 풀라고 했다. 혁대를 푼 다음에 옷을 하나하나 다 벗기더니 그 곳 옷을 주었다. 혁대도 없고 단추 하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옷이었다. 신발은 사이즈가 큰 고무신인데, 그것도 뒤에는 째놓아서 감방에서는 맨발로 있어야 한다. 그 후, 아주 조그만 감방에 나를 가두어 놓았는데 감방의 한쪽 구석에는 변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앉혀놓고 재우지도 않고 굶겼다. 보통 사흘을 굶고 나면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일으켜 벽을 향하게 한 뒤 손이 발 끝에 닿는 자세로 구부리고 서 있게 하는데, 이 자세로는 아무래도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때 보위부원이 뒤에 있다가 죄수가 조금만 움직이면 발로 성기를 차서 고꾸라뜨린다. 그게 아마 남자한테는 가장 심한 고문일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고문 방법들은 히틀러 시절 게슈타포나 스탈린의 KGB 들이 쓰던 고문 방법들을 보다 발전시킨 것들로, 가장 고통스럽고 야만적이다.

보위부 지국을 여섯 군데 돌고 나서 예심국으로 가게 되었다. 예심국은 죄를 인정하도록 하고 재판을 하는 곳이다. 나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남조선 안기부와 내통한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배신한 역적으로서 가장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계호원들은 나와 같은 역적의 누명을 쓴 죄수들에게는 악질적으로 대하였으며, 보통 “야! 이 반동 놈의 새끼야” 라고 부르면서 갖은 만행을 아끼지 않았다.

예심은 원칙적으로 3개월 안에 끝내야 하지만 예심국은 재판도 없이 6개월 이상씩 마음대로 연장할 수도 있고, 죄를 증명하지 못해도 잡아둔다. 여기서는 사람이 고문과 영양실조 등의 고통을 못 이겨 저절로 죽을 때까지 잡아둘 수가 있지만, 나처럼 김정일이 알고 있는 인물들은 다른 죄수들과 차이가 났다. 다시 말해서 김정일이 나를 찾을 경우를 대비해 마음대로 죽이지 못했다. 때문에 내 예심 기간이 1년 8개월로 길어졌다. 이 기간에 나는 고문과 영양실조, 그리고 허약과 각종 병으로 두 번이나 보위부 병원에 입원했었다. 예심국에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나에게 뒤집어 씌운 간첩죄를 증명하지 못 하겠으니, 재판은 하지 못 하고 이러 저러한 결함을 잡아 걸어 혁명화, 노동계급화 시켜야 한다면서 나를 요덕 제 15호 정치범수용소의 대숙리 구역으로 보냈다.

예심국에서는 몇 명씩 모아서 혁명화 구역으로 보내기 때문에, 인원이 어느 정도 모이기 전까지 동안 내게 예심국 안에서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시켰다. 그 때, 재판실 청소를 한 적도 있다. 재판실은 영화에서 보던 조그만 방이었고 예심국장, 재판관, 죄인의 자리는 나무판자로 구분되어 있었다. 재판관이 앉는 자리 뒤쪽 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가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 사진이 걸려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앉는 의자도 있었는데 한 여덟 개 정도밖에 없었다. 청소하면서 누군가에게 슬쩍 이곳에 대해 물어보니까 사람들은 여기서 재판을 받고, 받은 형에 따라 다른 데로 이동된다고 하였다. 만약 사형이 선고되면 “반역자들한테는 총알이 아까워서 쏘지 않는다” 라며 복도를 걸어가다가 “서라, 앉으라” 해서 꿇어앉혀 놓고, 뒤에서 이마와 목을 쥔 후 순간적으로 비틀어 형을 집행한다고 했다.

또 다른 방에는 TV 화면이 세 줄로 배열되어 있었고 3-4명의 계호원이 앉아서 화면을 보는데, 내가 갇혀 있던 감방을 포함하여 예심국의 모든 방을 감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심국에서는 감시카메라로 감시하고 계원들이 감방 주위를 늘 빙빙 돌며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이 한쪽을 도는 사이 다른 사람이 다른 쪽을 돌며 지켜보는 식으로 항상 죄수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감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의 큰 방이 있으면, 그 방 한가운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 작은 방들의 바닥은 그 아래의 바닥에서 50cm정도 떨어져 있고, 그 때문에 감방의 문 앞에는 계단이 세 개 있었다. 각 방의 정면과 양 옆에는 벽이 있지만 뒤쪽은 동물원 우리처럼 쇠창살만 있었다. 마치 새 둥지 같았다. 죄수는 그 살창을 등 져서 앉아 있으므로 계호원이 언제 뒤에 와서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자세를 늦출 수 없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졸면 어느새 쇠창살 사이로 계호원의 매가 들어왔다. 이렇게 계호원은 아무 예고도 없이 죄수를 마구 때릴 수 있었다.

정면의 벽에는 1m정도 되는 작은 문이 있는데, 아래쪽에는 밥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었고 위쪽에는 내 얼굴만 비치지만 반대쪽에서는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특수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죄수는 앉아 있는 내내 눈도 내리깔지 못하고 그 거울을 계속 마주 쳐다봐야 한다. 죄수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거울을 보며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는데, 자의로 할 수 있는 한가지는 가끔씩 꼬고 앉아 있는 다리를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일절 움직이지 못한다. 손도 정확히 무릎 위에 올려놔야지 허벅지에 올려놓거나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간수들이 다 보고 있지만, 혹시라도 몰래 움직이면 감방이 천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작은방의 바닥과 그 아래의 바닥 사이에는 도청기까지 설치가 되어 있어서 숨만 크게 쉬어도 앉아서 감시하는 자들이 다 들을 수가 있었다. 죄수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 아예 죽지도 못하게 사람을 감시하는 것이다.

소변을 보고 싶으면 팔을 올리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도록 되어 있었다. 손가락 두 개는 대변, 세 개는 물을 달라는 신호였는데, 세 번째 신호(물 요청)의 경우 아무리 손가락을 올려봐도 물을 주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써본 기억이 없다. 소변을 보겠다고 요청을 하면 바깥에서 말도 안 하고 탕탕 소리를 낸다. 소리가 두 번 나면 요청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면 (서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벌벌 기어서 등 뒤의 변기로 가서 앉아서 소변을 본다. 소변을 볼 때도 서서 보지 못하게 했다.

감방문은 녹이 슬어서 열 때 요란한 소리가 났다. 혹시라도 죄수를 몰래 풀어주는 일이 없도록, 계호원들 마저 통제하는 것이다. 계호원이 수감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는 우선 조그만 문을 열고 “00번, 나와!”(거긴 다 번호로만 부른다)하고 부른다. 수감자가 혹시라도 계호원들에게 덤빌까봐 절대로 마주 보고 서있지 못하게 하고, 족쇄를 채우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면 “가자”라고 하고, 수감자는 밖으로 나간다. 이곳에 두 달 앉아 있으면 대체로 잘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계호원 둘이 와서 수감자 팔을 끼고 간다.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도 험한 꼴을 당할 때가 있다. 감방 문 아래쪽의 음식 구멍에 얼굴을 들이대고 입을 크게 벌리라고 할 때가 있는데, 거기다 간수가 가래침을 뱉는다. 구타도 비일비재했는데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문밖으로 손을 내밀라고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요덕수용소의 생활

예심국에서 1년 8개월을 있던 어느 날 계호원이 나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더니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거기가 관리소들을 총괄하는 제7국이었다. 울타리가 둘러진 마당에 내리니,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왔다. 잠시 후, 내 이름이 써져 있는 보따리 두 개 안에 수용소에서 쓸 이부자리와 옷을 넣어서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당시 닫힌 트럭을 타고 들어갔기 때문에 어딘지도 몰랐고 내린 후에야 ‘산골에 왔구나’하고 생각하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곳이 바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요덕 제15호 정치범수용소였다. 관리부원들이 신참 수감자들을 소대배치 하더니 여기서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신입훈련을 한 달 하고 나면 중대에 배치를 한다. 집단생활이긴 하지만 자기가 자길 잘 챙겨야 되는 곳이었다.

요덕에서의 생활은 그나마 보위부보다 조금 나았다. 솔직히 둘을 비교하면 요덕은 요양소였다. 요덕 수용소에도 죄질의 경중에 따라 구역이 나누어져 있는데, 내가 간 곳은 가장 편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구타행위가 있기는 하지만 매 맞을 짓을 안 하면 달리 수감자를 고문하는 게 없다. 내가 재쏘임업에 있었다고 하니까 나에게 벌목을 시켰다. 나는 보위부원들이 살 집도 짓고, 울타리도 치는 데 사용될 나무를 채벌하고 제재해서 판자와 각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나를 독립소대장을 시켰다.

거기서 먹는 것은 강냉이 밥도 아니고 아예 강냉이 죽이다.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을 주면 안되니 멀건 죽 같은 강냉이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 찌개라든가 다른 반찬은 없고 야채 잎사귀를 조금 넣은 국이 나온다. 그 안에서는 일년에 이밥(쌀밥)을 두 번 준다. 2월 16일 김정일 탄생일과 4월15일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 점심에 이밥을 주는데, 이밥 한 사발이 그저 살살 녹아 넘어간다.

요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설사다. 그곳에서 설사는 죽음을 의미했다. 내가 알고 있고 또한 남한에서 배운 바로는 설사할 때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이곳에서는 반대로 영양실조가 너무 심하거나 설사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에다가 기름을 조금 넣어준다. 그러면 변이 굳어져서 설사가 멎는다.


석방과 탈북

요덕수용소에서 석방될 때는 당국에서 무언가를 읽어준다. “위대한 장군님 배려로 몇 월 몇 일 말씀으로…….” 그러고 나면 서약서를 쓰게 하고 버스에 태워서 내가 일하던 곳에 가서 당위원회 당비서, 조직비서, 선정비서 세 명 앉혀놓고 방침전달을 했는데, 나는 김정일의 배려로 직위, 칭호, 당원증 등 모든 것이 다 원상회복되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보니 벌써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들이 다 와 있었다. 여기서도 가족들을 다 앉혀놓고는 또 방침전달을 했다.

그렇게 요덕에서 나와서 원래 직업에 종사하면서 평양에서 살고 있었는데, 친구 중 하나가 나에게 다시는 러시아에 나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유인 즉, 보위부는 한 번 잡았다 놓친 사람은 끝까지 추적해서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잡으려 하는구나. 이제 내 나이가 벌써 60이 지났는데 다시 잡혀가면 우선 육체적으로 못 견딘다. 그러니 이 나라를 떠나는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탈북을 감행했다. 북한을 나와서 간 곳은 재쏘임업소를 통해 좀 익숙해진 러시아였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주재 유엔 난민대표부와 연락이 되었다. 난민대표부에서는 나를 전용차에 직접 태워서 모스크바 시내에서 멀지 않은 시골로 데려갔다. 가보니 북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흑인들도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그 난민시설에서 살면서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시 열 명의 북한사람들이 있었는데 두 명은 미국으로, 또 다른 두 명은 독일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난민대표부는 나에게 “러시아에 있기는 어려우니 어디 가겠나”하고 물었는데, 내 나이가 62세였으니 나는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결국 ‘아무래도 말도 알고 풍속도 알고 같은 민족인데, 이때까지 철천지 원수로 교양 받았지만 가서 살다보면 다 같은 민족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서 “저는 미국이고 독일이고 갈 데가 없으므로 한국에 가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민시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기다리다가 한국으로 2009년 4월에 오게 되었다.


자유세계와 무한한 발전성

한국에 대해서는 1990년 이후 러시아에 한국 목사들과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 한국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나는 접촉했다.

이제 남한에 온지 3년이 되었다. 나는 60년 이상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북한과 소련에서 살면서 대한민국을 겨냥해서 무기를 손에 쥐고 군복무도 하였고, 혁명의 수뇌부인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나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격려해주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 및 집과 돈을 제공해 주고,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교육도 해주고, 의료급여1종을 비롯한 많은 혜택을 주었다. 북한에서는 남조선 사람을 만나 접촉했다는 것으로도 벌을 주는데, 여기 한국에서는 오히려 포용·교육하여 살 수 있게 배려를 해주니, 이런 사회야 말로 사람을 위한 사회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동안 다닌 곳도 많고, 본 것도 많지만, 누구도 나한테 강요해서 돌아다녀본 것이 아니다. 북한이나 소련에 있을 때처럼 누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전하고 “이거 좋다, 저거 나쁘다” 정해주는 것도 없다. 남쪽에서는 직접 다 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를 개인의 판단에 자유롭게 맡긴다. 이것이 사람이 살 자유세계이고 인간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앞길을 열어주고 온갖 배려를 다 베풀어 준 고맙고 진정성 있는 사회와 제도에 보답하기 위하여 여기서 배운 그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가 찾아서 나라에 보탬이 될 일을 할 것이며,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