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얻은 자유 2

이 글은 2005년 3월 27일 동남아시아에서 증언한 내용으로 사투리를 고치지 않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얻은 자유 2

김 영
탈북여성, 황해남도 개성 출신

단련대에서 보위부로, 보위부에서 탈출
단련대에서 두 달 동안 나를 반장시켰습니다. 반장 한 달하고 내려왔더니, 누구 돼지 키워본 사람 없냐고 물었습니다. 돼지 키우는 일에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 때 같이 있던 사람 중에 밤꽃하는 여자(몸을 파는)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성병이 걸려서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 여자는 걸을 때면 다리를 벌리고 걸었습니다. 반장인 나에게 사람들은 어디로 그 여자를 좀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병이 얼마나 심했는지 자궁 주변에 커다란 사마귀들이 안에서부터 겉에 까지 두두두둑 나 있었단 말입니다. 살이 안보여서 너무 끔찍했습니다. 얼른 식당에 가서 소금 달라고 하고 소금물에 씻으라고 했더니, 너무 따가 와서 펑펑 뛰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맨 물에 씻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옮을 것 같았습니다. 안전부 군인들에게 사정 얘기를 해, 나랑 나이 많은 여자, 남자 한 명하고 셋이 들어가서 그 여자에게 다시 검사를 했습니다. 모두 너무 기가 차서 끔찍해했습니다. 그 다음 날로 그 여자는 퇴소되었습니다. 모두들 나가서도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돼지 키우는 일 그러니까 돼지 관리공으로 나가서 집체생활 아니라 독신생활 하게 되었습니다. 양말 빨라고 하면 양말 빨고 옷도 빨고 그래도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돼지를 잘 키워 새끼가 태어나야 퇴소시켜 준다고 하여 열심히 돼지를 키웠습니다.

돼지를 보살피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보위부에 넘겼습니다. 나는 이제 하늘보기 다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위원이 나를 데리러 왔고, 자전거에 짐을 싣고 나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허술하게 자신을 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하게 중국에서 무슨 일 했는지 말하면 살려주고, 아니면 자식도 못보고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도 보위부까지 끌려가는 정도면 살아나오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독 감방에 가두고 공책 한권을 주면서 다 적으라고 했다. 당시 98년였는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39살밖에 안된 내 인생 여기서 끝나는구나 싶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글을 쓸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똥이 마려워서 변소 좀 가자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바깥은 시꺼멓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다보니 담장이 보이고, 차 소리가 났단 말입니다. 밖을 보다가 똥은 마렵고, 바지에 눌 수도 없고, 감방 한 쪽 귀퉁이에 실례를 했습니다. 냄새가 나서 조서 쓰라던 종이를 찢어서 그 위를 덮었습니다. 창밖을 봤더니, 이중창이었는데, 죽던살던 해본다 생각하고 고정문 떼어내고 머리를 밀어보니 들어갔고, 간신히 들어갔는데 겨우 겨우 다시 뺐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 장사한 적이 없다고 쓰고, 회령에 가서 나에 대해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창문 밑 책상에 옷을 벗어놓고 빤스 바람에 겨우 빠져나와 살창 밑으로 옷을 꺼내서 다 주워 입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청진에는 수성강이 있는데, 거기 가는데 자전거 불빛이 앞으로 왔습니다. 지도원이 왔다가 사람 없으니까 날 추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집 모퉁이에 들어가 쪼그리고 있다가 둑을 넘었습니다. 수성강을 넘어야 어쨌든 기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순찰대 사람들이 내가 넘는 것 보고 또 잡았습니다. 불빛에 안보이게 하려고 숨었는데....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물으며, 배고파 쓰러져가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10원 주면서 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수성에서부터 가는데 수성역에 순찰대가 들어섰는데 경비가 삼엄해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곰산으로 갔습니다. 곰산 역시 순찰대가 앞뒤 두 줄이었단 말입니다. 나는 바지만 입고 맨 스프링바람으로 갔습니다. 기차 밑에 뛰어들어서 화차 밑 바퀴 축 위에 올랐습니다. 순찰대가 기차 밑에도 감시한단 말입니다. 기차가 덜커덩 덜커덩 움직일 때 내려서 얼른 기차위에 올라탔습니다. 그래서 회령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집에는 못 갈 것 같았고, 우리 집은 형태가 아파트였는데 달라졌고, 조그만 집으로 이사를 갔단 말입니다.

북송되어 다시 탈북, 다시 북송
동무라고 해도 조선 사람들에게는 보위부에 잡혀 있다가 탈출했다는 얘기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위원들이 나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나는 잡힐 것 같아서 산으로 가 도토리를 주웠습니다. 150알정도 주웠습니다. 그리고 98년 12월에 중국 들어갔습니다. 99년 양력설을 중국에서 보내고 줄곧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일을 잘 하니까 로반(주인)들이 나를 보호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9월 17일에 다시 잡혔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다가 셋집의 꼬장(고자질)으로 잡혀갔습니다.
2004년 1월 13일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그 때 옥이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큰애는 이미 중국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 차에만 10명이 있었습니다. 앞에 중국사람 4명, 그리고 10여명이 함께 탔단 말입니다. 차 꼭대기에도 탔습니다. 전화로 연락하면서 연길까지 왔습니다. 꼬장하면 자기 집과 나 모두 위험하다고 얘기했습니다. 몇 번씩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어 죽을 고생을 하니 한국으로 가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2004년 3월 18일 연길 역전 떠나서 할머니 소개로 내몽골로 11명이 갔단 말입니다. 3월 20일, 내몽골 거의 다 가서 잡혔습니다. 거기서 수로를 판 것이 2미터 정도, 여자 아홉이 뛰어내리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몽골 세관으로 가지 말라고 했단 말입니다.
살창 두 개 넘었는데, 남자 한 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 명이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렸습니다. 차는 더디고. 앞에 총 쥐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정없이 열 명이 뛰었으나, 사막 위에서 뛰기는 쉽지 않았고, 내가 “뛰자”하고 소리쳤기 때문에 잡히기 쉬웠단 말입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수면제를 한통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다가오자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큰아이가 변방대 군인들에게 어머니가 약을 먹었다고 말을 해주고 아들은 다른 곳으로 가고 나는 군인들이 따로 끌려갔는데 2일 만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병원에 있었단 말입니다. 북으로 끌려가 조사받고 우리 가족만 다시 6개월 정도 노동단련대에서 일하게 되었고, 같이 온 일행들은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간 후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회령보위부와 단련대
한국 가려고 내몽고길에서 잡혀 회령으로 끌려갔을 때는 아주 좁은 방에 25명이 있는데 방에 물이 안 나와서 세수도 못하고, 강냉이로 죽을 써서 주더란 말입니다. 회령보위부 총 감방이 1호 남자, 2호 여자, 3호 남자, 4호 여자였단 말입니다. 나는 4호, 금이는 3호였습니다. 그렇게 따로따로 조사를 받고 그 말이 서로 맞아야 된단 말입니다. 거기서 최고로 오래된 사람이 7달 정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위부 중 회령이 세다하는 것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고, 조금만 움직이고 하면 세게 때리고 감방장들이 되게 통제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 밤 10시까지 양반다리에 두 손을 무릎에 붙이고 차렷 자세로 생활을 한단 말입니다. 유일한 휴식시간이 밥 먹을 때와 변소 갈 때란 말입니다. 1호부터 밥을 먹기 시작하니까 내가 4호에 있으니까 휴식시간이 좀 길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식기에 묻어 있는 것까지 손가락으로 훑어서 먹더란 말입니다. 물을 한방에 한 바케트씩 하루에 쓰라고 주는데 그걸로 25명이 먹고, 씻고, 변소 물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가 얼마나 많은지 말로 표현을 못한단 말입니다. 근데 여자들 칸이니까 여자들 생리하는 것도 있고 그렇단 말입니다. 거기는 천을 사용했다가 다시 말려서 사용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생리를 할 때가 가장 물이 부족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7달 지냈다는 가장 오래된 여자는 한 번도 칫솔질을 못했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어떠냐면 장기수, 오래 있었던 힘 있는 사람들이 풀 같은 거에 물을 칠해서 대충 씻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몸을 좀 닦고, 그 다음에 힘 있는 사람들이 팬티를 좀 몰래 씻고, 그래서 가장 나중에 여자들 경도(생리)한 천을 씻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맨 마지막에 남은 물이 까만지 빨간지 알 수 없단 말입니다. 근데 그 물로 걸레를 빨아 방을 닦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피비린내에 땀내에 방 냄새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보위부에서는 얼마나 이가 많은지 말로 표현을 못한단 말입니다. 회령 보위부에서 한 달 취급받고 금이는 먼저 나가고, 나는 단련대로 6개월 들어갔습니다.

단련대에 들어가니까 강냉이밥에다가 묵은 시래기에 소금해서 국을 주더란 말입니다. 때가 가을이라서 김장 배추 동원도 나가고 했습니다. 일을 해야 하니까 밥을 주더란 말입니다. 90여명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중에서 10명이 경리과 작업하는데 내가 뽑혀서 경리과 배추도 거두고 벼도 탈곡하고 했습니다. 거기로 따지면 경리과 뽑힌 게 참 대단한 거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침은 단련대에서 먹어도 점심 저녁은 경리과에서 먹여주니까. 단련대 안에서 일하는 것보다 경리과에서 일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게 나으니까 말입니다.
단련대에는 대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98년도-이번에도 그 사람이 대장질 계속 하더라고) 거기 지도원 2에 대장 있고 그렇단 말입니다. 근데 지도원 사이에도 알력관계가 있더라고. 그리고 대장도 자기한테 돈을 좀 넣어주고 하면 식모(우리랑 같은 날에 들어가서 4달 받았는데, 3달하고 나가더라고)도 시켜주고 하더란 말입니다. 내가 거기서 드세게 어지간한 남자들이 일하는 만큼 했습니다. 단련대에 콩밭도 있는데, 서로 경쟁을 붙여서 경작을 하게 합니다. 거기서 농사지으면서 도망칠 기회도 있습니다. 근데 나는 거기서 또 도망치면 숨어살거나 계속 도망쳐야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마지막까지 버티자 해서 버티었단 말입니다.

나는 단련대에서 집 짓는 일 했습니다. 3개조가 나가서 하루에 10,000장 이상씩 찍었습니다. 진짜 열심히 속도를 내지 않으면 그 수량을 맞추기가 정말 힘들단 말입니다. 힘 좀 쓰는 사람들은 나무하러 가고, 그 다음은 감독을 시키고, 그 나머지가 벽돌을 찍는단 말입니다. 영 힘을 못 쓰는 남자들과 함께 일하려니까 여자들이 그렇게 힘이 듭디다. 여자들이 다 몰타르 다리고 하는 힘쓰는 일을 다 여자들이 하지. 거기에서 아프지 않으면서도 엄살 쓰는 사람들이 많단 말입니다. 거기서 나는 일 욕심이 많으니까 개새끼 소 새끼 욕을 세게 했습니다. 정말 그 꼬빠꾸(단련대)라는 데는 별난 희극 배우들이 다 있단 말입니다. 정말 교화로 들어가기 전 사람들이 다 있단 말입니다. 숙소를 들어가면 따뜻한 자리는 드살이 센 것들이 들어와 앉고 윗목은 축에 빠지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했습니다.

내 이번에 일할 때는 그래도 처음 2달은 고생했지 그 다음은 그렇게 고생은 안했습니다. 갈비가 부러진 것은 내가 조장이랑 싸우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갈비가 부러져서 집에 가서 보름간 쉬었습니다. 꾀를 부리지도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하니까 앉았다 일어나면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눈이 팽팽 돌고 그런 것이 허약이 온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 아픈 척이라도 해서 꾀를 좀 내라고 하는데, 남들 일하는 게 답답해서 꾀를 못 부린단 말입니다. 근데 마지막엔 허약이 온 것 같아 병원에 가서 종합 검진에 들어갔습니다. 맥이 없고 가슴도 아프고, 그래서 내가 그만하면 허약이 되겠다해서 병원 검진 받으러 갔는데, 아파서 좀 비틀거리긴 했는데 눈을 똑바로 뜨고 걸어 들어갔단 말입니다. 진단 결과는, 그거 조금 있으면 나아진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 불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가게 된 게 무효가 되었습니다.
근데 내가 도저히 다시는 단련대에 못 돌아가겠다 싶어서 거기서 도망쳤습니다. 15일 동안 숨어있었습니다. 15일 후에 중국이랑 통화가 되어서 중국으로 간다고 가는데,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그 날 아침에, 차 타려고 가다가 도망치는 사람들만 전문적으로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붙잡혔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사상투쟁도 하고 혼이 나는데, 나는 그렇게 많이 혼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한 보름 더 붙어서 있다가 병골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허약이 온 거였습니다. 더 이상 일을 못하겠더라구요. 신경병인지 뭔지 다리가 계속 꼬이고 머리가 샛노래지면서 다 빠지고 손톱도 빠지고 설사가 계속 나오더란 말입니다. 맥이 없어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으니 병고가 떨어져서 나왔습니다.

또다시 아들과 탈북
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중국으로 다시 나오기는 11월에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제일 고생해서 나왔습니다. 아들과 같이 친척이 적힌 주소와 빵을 배낭에 넣고 회령을 피해 두만강 하류로 내려오는데 10호 초소를 지나야 하는데 공민증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를 돈을 주기로 하고 탔습니다. 그런데 목표지 까지 안가고 다른 곳으로 가서 중간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방원으로 들어가는 차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차가 서지 않아서 뛰어서 아들이 도와줘서 올라탔습니다. 차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들이 차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해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려 혼자 가려 했으나 그때 아들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왜 늦었냐고 물어보니 경비대에 결려서 검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경비대 애들이 아들에게 질문을 해서 이상한 점이 있다고 배낭을 검색하고 초소로 끌려갔단 말입니다. 그 때 군관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서는 귀찮다고 보내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그 때 배낭에 있던 빵을 모두 빼앗겼다고 했습니다.
그 후 식량이 없어서 굶은 상태에서 계속 산길로 올라탔습니다. 밤을 새고 걷다가 모닥불을 피우고 아들을 재웠습니다. 그러나 산세가 너무 험해서 방향이 헛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오후에 막사하나 발견했지만 빈집이라 식량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물로만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러나 다시 내려와 보니 두만강이 나왔습니다. 건너편에 회령이 보이자 너무 허탈했습니다. 길을 헤매 다시 돌아온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또 산을 탔는데 포장도로를 끼고 옆으로 산길을 탔습니다. 그러나 너무 배고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아들이 계속 부축을 해줬습니다. 도저히 힘들어서 큰길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계속 걸을 힘이 없어서 아들과 함께 잠시 잠을 잤습니다.

3일 만에 손으로 가랑잎을 모아놓고 추위를 겨우 참으며 잤습니다. 그러나 잠시 잤지만 너무 추워 몸이 덜덜 떨려 이가 부딪치며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다시 일어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는 걸음이 앞으로 가야하는데 휘청거리며 다리가 꼬여 제대로 방향을 잡고 걸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내 다리를 먹고 정신 차려서 나를 업고 가라고 까지 했습니다. 너무 배고파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고, 역마루를 넘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인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가자 밭이 나오기 시작했고 조금 후 마을을 발견해 아무 집이나 문을 열고 밥 좀 달라고 하자 아주머니가 막 밀어 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지 않을 테니 밥을 조금만 달라고 하자 그것도 안 된다고 쫓겨났습니다. 그 후 다시 다른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쓰려져 버렸습니다. 그 집은 남자 혼자 있었는데 남자도 곤란하다며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개죽을 보고 저거라도 한사발만 달라고 하자 남자가 들어오라 하고 먼저 월병을 챙겨 줬습니다. 갑자기 음식을 먹자 도저히 먹기 힘들었고 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깨고 나니 고기를 먹었는데 도저히 먹지 못하고 구토를 하자 남자가 쫓아내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 점점 회복하고 음식을 조금씩 섭취했습니다. 아들은 첫날부터 소화를 잘했습니다. 그 후 아들의 옷이 너무 허름해서 아들 옷을 사러갔지만 검문이 너무 심했습니다. 검문을 지나 아는 사람을 통해 아들 옷을 보내 같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고생 고생해서 나와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질문 및 응답

다른 가족들 소식은 들었습니까?
내가 들어와서 들었는데 다 추방되었다고 하더라고. 추방되는 게, 보위부 추방이면 22호라는데 온 가족이 거기로 들어가서 영 죽을 때 까지 못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안전부 추방이면 산골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두 해는 담당 주재원들이 감시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내몽골에서 잡혀서 기차를 타고 단동까지 오셨는데 단동 변방대에서 어떻게 조사를 받았습니까?
거기서는 우선 호송할 때 족쇄를 채우고, 감방에 들어가기 전에 검사를 하는데 거기서는 그렇게 치욕스럽게 검사는 안했습니다. 여자들이 팬티를 벗어 놓으면, 아니면 경도한 천을 벗어 놓으면 걔들이 발로 훑으면서 돈이 있는지 검사를 한단 말입니다.
도와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는지. 그런 것은 없었다. 대신 조선 속담을 몇 가지씩 쓰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붙잡힌 사람 다 쓰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물건도 옷 보따리 같은 건 통과시키는데 녹음기, 그런 것도 모두 회수했습니다. 며칠간 조사했는지. 한 일주일정도 된 것 같습니다. 족쇄 채우고 압록강 교두 다리 절반 오면 다리 색깔 달라지는데 그 때 족쇄 벗기고 보위보로 넘겨주었다.

거기서는 다시 족쇄 채우는지?
신의주 보위부 마당까지 데려다 주기 때문에 필요 없습니다. 에이즈 검사를 했습니다. 신의주 보위부는 감방이 10몇 개가 됩니다. 칸은 작은데 여러 개 됩니다. 거기도 모두 가족은 분산시킨다. 여자, 남자로 나눕니다. 우리가 만약 연길에서 같은 날 같은 패에서 잡혔다 하면 그 패도 모두 갈라놓습니다. 나는 8호 칸에 있었습니다. 두부 콩 삶아서 콩에 시래기 섞어서 강냉이밥하고, 접시에 아주 조금씩 담아주는데 아주 멀건 소금국과 함께 줍니다.
내가 회령, 온성, 신의주 갔는데 그래도 신의주가 밥도 낫고, 위생과 안전원들도 나았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옷을 모두 벗깁니다. 자궁 안에 돈 넣었을까봐 뽐뿌질 시킵니다. 간혹 나오는 경우 있는데 거의 안나왔습니다. 여자 군의가 들어와서 신의주 보위부 안에 널판 자리 깔고, 난로 자리에 관이 들어갈 만한 곳이 있는데 거기 여자들 눕히고 군의가 장갑 끼고 여자들 자궁 속에 손을 집어넣고 검사했습니다. 모든 여자들에게 다 했습니다. 그런데 군의가 몸 아파서 일주일 쉬었는데 나는 운이 좋아 그때 검사를 면했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약도 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회령보위부로 넘어갔습니다.

임신한 여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고 계신지요?
우리 때에는 임신한 여자가 일곱 명되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한 감방에 몰아넣었습니다. 우리랑 같이 있을 때에는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힘들었을 겁니다. 임신부니까. 우리는 따로 간 이후 보지는 못했습니다. 후에 단련대에 와서 신의주 보위부에서 갈라졌던 사람들 만났는데 신의주에서 아이들을 낙태시키고 아이는 죽이고 단련대에 넘어왔다고 했습니다. 작년(2004) 이야기입니다.

공개처형은 언제 봤는지요? 처음 본 게 언제인지요?
연도는 기억 안 납니다. 95년에서 98년까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목격했습니다. 죄목은 소 잡아먹은 거, 한국문서 소지한거, 사람 팔아먹은 거(명수에 상관없이 사람 팔아먹으면 그 연계자는 모두 죽였습니다.)
공무집해방해죄로 총살당한 사람 있습니다. 회령에 오류리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마약주사가 들어갔습니다. 거기 사람들이 주사 맞고 그러기 시작했습니다. 총살당한 사람도 주사를 몇 대 맞고 그게 소문나서 단속 들어갔단 말입니다. 흉기를 들고 다녔는데 안전원에게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도끼로 찍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잡혔는데, 재판할 때 죄를 뉘우치면 교화소로 보내고, 사형시키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죄를 인정한다고 말하고, 판사, 검사들 질문에 모두 ‘인정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면 다시 잘 해보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살려줄 줄 알았는데 사형선고 받으니 털썩 주저앉고 안전원들이 그 사람 발광하니까 마구 때려서 사형시켰습니다.

어떻게 죽이는지?
1998년도에 소 잡아먹은 사람들 많이 죽였습니다. 아들하고 아버지. 처남 매부지간 등입니다. 다리를 공중에서 이십 센티 정도 띄우고 다리 팔 배를 묶고 입만 시커먼 천으로 묶습니다. 죽으러 나온 사람들은 자기 마지막인 걸 아는데도 대중 속을 보면서 자기 아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를 들고 여기 저기 대중 속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죄과를 폭로했습니다. 그렇게 판결하고 사형을 선고합니다. 제일 먼저 머리 쏩니다. 조그만 머리에 총알 세 방 들어가면 머리 형체가 없어지더란 말입니다. 내가 담이 커서 그런지. 얼른 보면 꿈에 자꾸 나타나서 밥도 못 먹고 그래서 나는 총살한다고 하면 항상 제일 앞줄에 가서 앉아서 봤습니다.

판결 이후에 풍을 치는가요?
안칩니다. 안전원들이 양쪽 팔을 들고 죄수 데리고 옵니다. 그 다음에 사형선고 하면 끌려갑니다. 죄수는 넋이 이미 나가있습니다.

풍 속에서 때려 반 죽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 장면을 봤는지요?
내가 본 것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각오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내가 봤을 때는 그런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안전원들이 먼저 구령을 줍니다. 누구를 향해 사격준비! 이렇게. 자기 자식과 같이 매달릴 때에는 자기 자식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뇌수가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내가 본 어떤 처형에서는 죄인이 얼굴에 총을 맞으니까 안면 꼭 뚜껑 열리듯이 열리더니 뇌수가 막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툭 떨어지니까 다른 반쪽이 자연적으로 올라가 붙었습니다. 그 다음에 푹 꼬꾸라졌습니다. 한 사람이 그 시체를 거꾸로 쳐 넣었습니다. 사람 길이가 절반 넘어서 안전원들이 그 푸대를 툭툭 쳐서 시체를 넣고 트럭에 실어 갔습니다. 말뚝 자리에 뇌수 쳐 넣고 삽으로 흙을 덮었습니다. 그 때가 여름이었는데 그 피 비린내 냄새가 얼마나 역했는지. 나는 그 장면을 한 10미터 앞에서 봤습니다. 세 명이 한 곳에서 한 곳을 향해 총을 쏩니다.

공개처형 장소는 강제로 가게 되는지요?
방송차가 공개재판 있다고 방송하며 말합니다. 주로 장마당 옆에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학교에 애들이 안다니기 때문에 그저 아이들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무서워합니다.

교수형을 목격한 적은 있는지?
1979년인가. 개성에서 살던 애가. 큰 죄도 아닌데 바탕이 나빠서 작은 일도 크게 부풀려서 했습니다. 그 아이의 죄는 강간과 무직, 패싸움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죄로 인해 공개처형을 당했습니다. 교수형 할 때. 벌써 차에다 실어 세워놨는데 저절로 설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질질 끌고 가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애를 삼십분 정도 교수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화형으로 공개처형하는 것 본 적이 있는지요?
말만 들었다. 본적은 없다.

굶어죽은 사람들 얼마나 봤습니까?
장마당 나가다가 보면 사람 쓰러져 죽어있고 그랬습니다. 조그만 남자아이. 술 팔러 갔다가, 역전에. 그 아이가 앉아서 있는데 못 먹어서 부어있었습니다. 사탕, 빵 팔러온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주면, 그 아이는 자기 동생 주려고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너 먹어라하면 겨우 올려서 먹는데, 먹지를 못하고, 먹으면 자꾸 토했습니다. 그 신세에 앉아서 또 노래를 불렀단 말입니다. 김정일 장군님 노래를 몸 흔들며 불렀습니다. 그래서 혁명적 노래 부른다고 우리가 쑥덕쑥덕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역전 구석에 죽어있었습니다. 꽃제비 아이들이 그 아이를 구루마에 실어 묻어주더란 말입니다.

관은 돈 없어서 못합니다. 너무 사람 죽는 숫자가 많아서. 어떤 때는 가족이 모두 죽기도 합니다. 산에 나무 하러 가는데. 구덩이를 석 줄로 한가득 파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피아노처럼. 야산 같은 곳에 나무는 없고, 보는데 아이 하나가 죽었는데, 그 아이 세 명이서 와서 묻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온성 보위부에서의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온성보위부에 잡혔을 때는 그때가 일반적인 도강이니까 중국에 가서 무슨 일 취급했는가를 물어보더란 말입니다. 근데 무슨 일이 있어나 하면, 밥을 주는데 죽을 크게 세 숟가락만 떠서만 주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배가 고팠단 말입니다. 밥을 하는 건 아주머니가 있는데, 떠서 주는 건 우리 죄인들이 하는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잘 보이는 사람은 조금 더 준단 말이야. 그 죽을 주는 게 사람이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주더란 말입니다.
온성은 감방이 총 3개인데 남자가 2개 여자 방이 1개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여자들은 양쪽 복도에 쭉 들어져서 잔단 말입니다. 매 칸마다 변소가 있고, 복도 맨 끝에 또 변소가 있ㅎ습니다. 그러니까 대변을 볼라치면 감방에 있는 변소가 칸이 낮으니까 복도 맨 끝에 가서 누는 거지. 그러니까 남자, 여자들 모두 복도 맨 끝에 있는 변소에 가서 똥을 누는데 두 손을 무릎에 붙이고 고개를 똑바로 들고 싸야지 아니면 지도원들에게 얻어맞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나면 긴장해서 고개를 바짝 들고 차렷 자세로 있고 했습니다. 감방에 남자들 있고 그랬는데, 중국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있더란 말입니다. 근데 그 중국 사람이 허약이 와서 얼굴이 새하얗게 백지장이고 몸 났을 때 입었던 바지가 그렇게 크더란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도 감방에 오래있으니까 조선말도 조금 했습니다.
온성보위부에서 화장실을 갈라치면 먼저 ‘선생님 복도 10번 변소 볼만 합니까?’ 지도원에게 물어보면 ‘다녀와라.’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녀오는데, 그 한족도 어수룩하게 조선말을 따라하더란 말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허약이 와서 정신이 없는데다가 바지춤을 내리고 올리는 게 하도 천천히 해서 복도에 쭉 늘어서 있던 여자들이 그걸 다 보고 쑥스럽고 그랬습니다.

제가 단련대에 있을 때 46세의 한 남자가 면회 들어오는 게 없어 진짜 허약이 왔는데도 누군가 돌봐줄 형편이 안 되더란 말입니다. 한 날은 이 사람일 일하다가 도망쳤단 말입니다. 큰길로 가면 잡히니까 산으로 들어갔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산으로 올라간다는 게 그만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아 새끼, 일할 때 꾀만 부리더니, 죽었다 야.’ 하면서 이야기를 하더란 말입니다. 송이 캐러 갔던 사람이 죽은 지 4,5일 된 그 사람 시체를 찾았습니다. 넷이서 그 사람 담아 와서 매장을 했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36살 먹은 남자가 송이는 한 뿌리도 못 캐고 술을 마시고(그 때는 술·담배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단련대에 들어왔습니다. 지도원이 그 남자 배를 훅 차니까 벨이 터졌습니다. 배를 붙잡고 구르니까 꾀병을 부린다고 다음날 병원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거기 가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누가 죽으면 그 책임지도원이 벌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때 때린 반장이 살인죄로 교화 지도에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