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얻은 자유 1

이 글은 2005년 3월 27일 라오스에서 증언한 내용으로 사투리를 고치지 않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얻은 자유 1

김 영
(탈북여성, 황해남도 개성 출신)

출신성분때문에 어린시절 유선탄광으로 이주
내 고향은 개성군 판문군 월정리입니다. 여기서 내가 여덟 살 때(68년도) 회령으로 이주했습니다. 나는 그저 촌골에서 살다가 난생처음 기차를 타보게 된다고 좋아했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울더란 말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아버지가 자기가 살아온 경력을 쓴 데서 알았죠. 우리 할아버지가 50년대 전쟁 때 남조선에 속했던 개성에 살고 계셨고, 머슴살이를 하셨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별명은 하도 나무를 해서 조막손할아버지였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나무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데, 인민군대 옷 입은 사람 세 명이 와서 “여기 지금 리당비서하던 동생이 후퇴하다가 후퇴를 채 못했는데, 이 사람을 빨리 데리고 북조선으로 나아갈 임무를 가지고 우리가 왔는데, 그 사람을 지금 우리가 못찾겠다.”고 했더랍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 사람들이 인민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저기 산 밑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1시간쯤 있다가 산 저쪽에서 총소리가 났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리당비서 빨갱이란 말입니다. 그 사람이 공동묘지를 파고 숨어있었는데 남조선 군인들이 인민군복으로 위장을 하고 찾아낸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인민군대인줄 알고 말해주었지만, 결국 밀고자가 된 것이란 말입니다. 밀고자가 되니까 징역을 15년먹었단 말입니다. 해방 후 징역을 다 살고 68년도에 나왔단 말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반년도 못되었는데 개성에서 불순한 가족들을 몽땅 추방시키는데, 우리 가족도 거기에 속한 것이지요. 우리 아버지가 개성에 있을 때 한 탄광의 책임자였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회령에 있는 유선에 왜정 때부터 캐먹던 큰 탄광으로 보내게 되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 가서 집이 없으니까 몇 백 명이 살던 합숙소 같은 데서 몇 달 동안 지내다가 얼마 후 조그마한 집이 나와서 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학교나 동네에서 계속 떳떳하지 못했고, 나중에 직장배치나 학교추천을 받고 하는데 우리 같은 거는 토대가 안 좋아서 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항상 우리가 축을 받으며 살았지요. 나는 그래서 결국 곡상공단 배치를 받았단 말입니다. 거기서 한 달분 식권을 나누어 주는데, 내가 워낙 밥을 많이 먹어놓아서 식권을 한 끼에 두 장씩 쓰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는 우리 엄마가 너는 벌어들이는 것보다 밥을 하도 많이 먹어서 내가는 것이 더 많겠다고 해서 내가 화가 났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노임이 높고 백미를 주는 유선탄광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유선탄광은 두 개의 갱이 있는데 큰 갱은 아래에 있고 다른 한 갱은 한 30분 차타고 가는 거리 밑에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100일 전투요, 70일 전투요 계속 경쟁을 벌여놓았더랍니다. 나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꾀를 부리지 못하고 그저 남자들이 하는대로 일을 세게 했더랬습니다. 바탕이 그래 놓아서 입당도 못하고 노력영웅칭호도 못 받으면서 왜 그렇게 일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미련했습니다. 거기서 7년을 일했는데, 거기서 사람 죽는 것도 많이 보고 일도 너무 세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걱정을 하더란 말입니다. 87년도인가는 가스 폭발 사고가 나서 18명이 죽기도 했더랬습니다. 우리 전 교대가 그 수남 갱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몇 십 미터가 갱이 무너져서 며칠에 걸쳐서 완전 타버린 시체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누구인지 알 수도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열 여덟개 관을 해골에다가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팔, 다리를 맞추어서 국가장을 지냈더랬습니다. 3년 동안 국가에서 장을 해 주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주고 하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사고가 많이 나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나를 시집도 보내야 하고 하니까 걱정을 많이 하더란 말입니다. 내가 곱지는 못하지만 진실하게 일을 잘한다 해서 아주머니들이 우리 며느리 하자 하면서 옆에 사람들이 나를 욕심을 내더란 말입니다.

83년 결혼 이후의 삶
내가 23살 되던 해에 83년 11월 20일에 결혼을 했습니다. 중매를 서 준 사람이 나그네가 잘 생기고 한 데 조그만 결함이 있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도 잘 생겼다 하니까 마음은 좋습디다. 우리 나그네는 4살에 엄마 없이 자라서 못생겨도 각시 사랑 좀 얻으며 살자해서 나랑 결혼을 했더란 말입니다.
우리 선이를 9월 9일에 낳았는데, 나는 9월 8일까지 농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개와 토끼도 키우고, 두부랑 술도 만들고 하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극성스럽게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기는 했습니다. 나그네가 독립훈련(겨울에 보름씩 하는 군사훈련)을 간 사이에 돈을 벌기위해 아이들과 내가 이동서류를 떼서 회령에 나갔더랍니다. 90년도에 그렇게 나와서 유선에서 살던 밑천으로 집을 크게 짓고서는 약간 살까 하는데 집짓는데 돈이 다 들어가서 일어날 힘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람과 협잡 빼놓고 해볼 짓은 다 해봤습니다. 도둑질도 해봤습니다. 석탄, 강냉이도둑질은 물론 햇소채(햇채소-조금 잘사는 집에 들어가서 김치 도둑질을 하기 위해)도 친구와 함께 훔쳐봤습니다. 두부장사도 해보고 심지어는 꽈배기장사(4원 40전 사들여 5원에 팔아 50전 이문을 남김)도 해보았습니다.
파라티푸스병이 이북에 돌아 첫째, 둘째가 차례로 앓아 그 전에 벌었던 돈을 모두 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또 앓았습니다. 그때 열이 40도까지 올랐지만, 돈이 하나도 없어 약 한 첩 못써보고 강짜로 앓았단 말입니다. 병원에서도 돈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았습니다. 치료도 못 받고 아플 때 사과(한개 30원)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먹지 못했습니다.
퇴원해서 보니,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마솥에 물은 끊는데 그 안에 넣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꾼들이 흘린 것을 주어왔는데 둘이서 하루 종일 해봐도 깡통 하나 채우기가 힘들었습니다. 이것을 절구에다가 찧은 다음(기계에다 갈면 기계에 다 묻으니까) 야산에 가서 깡퇴풀, 비릅 등 가마에다가 풀을 하나 가득 담아와 그것과 같이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두 그릇이 잘 안나왔더랍니다.
내 기술이 원래 두부, 엿 만드는 것이어서 다시 두부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근데 두부가 팔리지 않으니까 두부는 쉬어나간단 말입니다. 그 쉰 두부는 우리 집에서 먹었습니다. 남은 비지는 소금, 마늘이 없을 때는 그냥 먹었는데 목이 깔깔해서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배부르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살다가 도저히 두부가 안 팔리니까 지탱을 못해서 두부 장사를 걷어치우고, 나그네(남편)의 동무가 하는 상점 경비하는 직업을 얻었습니다. 밤에는 경비를 서고, 낮에는 넘겨받은 물건을 팔면서 죽지 못해 사는 정도로 겨우 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95년에서 97년 사이였습니다. 갖은 수단을 써서 내가 제일 바쁘게 먹기 살기 위해 애쓰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그 상점에 들어가서 오랜만에 된장, 간장을 보았단 말입니다. 정 배고플 때는 맹물에 된장을 타먹었습니다. 뭐든 먹을 것이 생기면 아이들을 먹였습니다. 상점에서 별식으로 속도전가루를 떡으로 해주면, 그렇게 맛있게 잘먹었습니다.
상점에서 어떻게 떨겨져 나왔나면, 상점에 요소비료가 있었습니다.(나는 정말 먹고 살기위해 도둑질을 했습니다. 본성이 나빠서 도둑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요소비료 한 키로에 강냉이 두 키로씩 바꾸어 줬단 말입니다. 분배는 가을에 타는데 식구 넷을 먹이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 동무와 함께 비료를 하나 훔쳐서 강냉이를 바꾸어 먹자고 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성공했으나, 두 번째는 점장한테 붙잡혀서 상점에서 떨겨져 나왔습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탈북-중국 입국
삽주를 캐서 중국에서 밀가루를 많이 바꾸어 왔었습니다. 거의 모든 회령사람들이 그 삽주 캐는데 다 동원이 되었단 말입니다. 회령에서 10월에 산으로 가야 했습니다. 아침에 죽을 먹고 비닐봉지에 죽을 싸서 산으로 오르곤했습니다. 아침 7시에 솔산에 가면 11시가 됩니다. 죽을 먹고 산으로 가니 아침 먹은게 다 소화되니까 싸간 도시락(죽)을 먼저 까먹고 시작합니다. 오후까지 일을 하다보면 너무 배가고파 무릎을 꿇고 일하면 하루 종일 해도 2키로 정도밖에 거두어 내지 못한다 말입니다. 백출은 값이 절반까지 떨어지지만 나는 그저 그대로 팔아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좀 여유가 있으면 다듬어서 값을 제대로 받지만 나 같이 하루 벌어 사는 사람들은 바로 팔아야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로 밀가루를 바꾸어 봤자 1-1.5kg 정도였습니다.
장춘을 캐어서 팔겠다고 장마당을 나가는데 장마당 골목에 자전거 바퀴의 내피가 떨어져 있어서 가져다가 팔려고 주어서 집에 갔습니다. 내 생각엔 그걸로 국수 한 그릇이라도 사겠다 싶었습니다. 나그네에게 그걸 팔라고 시키고 나는 다음날 또 산으로 일을 하러 갔습니다. 며칠 후 나그네에게 그 자전거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자, 나그네가 그걸 자전거 임자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내가 ‘뭐랑카, 누구 줬당카’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 나그네와 큰 전쟁이 났습니다. 나그네가 부엌에 있는 널빤지로 나를 내리쳤고, 허리 부근을 얻어맞았습니다. 나는 식구들 먹고 살자고 한건데, 너무 억울해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나는 온밤을 울면서 지새웠습니다. 앉아서 궁리를 하다가 너무 섧고 하니까, 싸이나(사람이 먹으면 죽는 약-꿩이나 잡을 때 쓰는 약)를 먹고 죽을 생각으로 아이들 자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앉아서 계속 울다가 가만히 일어나 싸이나를 물에다 탔습니다. 마실려는 순간 나그네가 물사발을 차서 업는 바람에 그것도 성공을 못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삽주고 뭐고 나도 모르겠다 다 같이 굶어죽자 하고 드러누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 동무가 와서 하는 말이, 나그네가 그것을 가지고 장마당을 나갔지만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당시 식량이 무엇보다 귀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술을 바꾸어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식구들이 네 끼를 몽땅 굶었습니다. 두 끼 째까지는 사람이 속이 쓰리고 배고프고 하더니만 네 끼 째가 되니까 속이 편안하고, 그저 잠이 오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더랍니다. 사람이 이러다가 굶어 죽는구나했습니다.
이웃에서 우리가 너무 조용하니까 찾아왔길래, 나는 이제 살고 싶지도 않다고 하니까 옆집사람이 그러지 말라며 강냉이 5kg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때가 97년도 5월인데 우리 아버지 환갑날이었습니다. 아버지 생일날이라서 찾아가야하는데 손에 아무것도 없고 집에도 아무것도 없어서 그릇 10개를 들고 가서 술 한 병을 바꾸려고 했는데(원래 그릇 가격이 한 개당 콩 1kg였습니다.) 워낙 식량이 너무 귀하던 시기라서 바꾸지 못하고, 그릇10개를 지고 남이를 데리고 친정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무슨 낯인가 생각하면서도 그냥 가서 한동네에 살고 있던 친정 옆집, 남동생네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갔더니 세 번째 남동생도 거기에 있더랬습니다. 내가 셋째 남동생에게 그릇을 술로 바꾸어 오라고 했지만, 역시 그 동생도 못 팔아왔습니다. 또 동생이 하나 있는데, 술을 먹고 나에게 주정을 하더란 말입니다. 누나 구실도 못한다며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려니 참지 못하겠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니만 엄마냐, 내 엄마이기도 하다. 너는 뭐했니. 니가 뭐했다고 누나한테 큰소리야.’ 했더니 동생이 술김에 가마뚜껑을 나한테 내던져 왼쪽눈가를 쓰쳐 피가 뚝뚝 떨어지더랬습니다(아직도 왼쪽 눈 옆에 흉터가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엄마가 그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엄마집으로 가니까 쑥떡, 입쌀떡도 있고 하더란 말입니다. 엄마에게 도저히 이제 못살겠다고 하면서 중국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중국 목단강에 사는 이모주소와 사진을 주었습니다. 엄마에게 남이를 부탁하고 엄마가 싸준 떡을 들고 회령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피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송학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가 97년 5월입니다.
그때 산불이 진짜 크게 나서 싸이렌이 울리고 큰 일이 났었고 두만강은 장마철이라서 아주 많이 불어 있었습니다. 여자 둘, 남자 하나, 길안내 하나, 4명이 두만강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한 여자는 이미 두만강을 대여섯 번 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여자는 독신으로 자기 혼자 살기위해 간다 했습니다. 들어가니까 두만강물이 점점 깊어지더란 말입니다. 앞에 남자가 가고 조선 바케트(물 긷는 용)를 매고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사람 둘이 떠내려갔습니다. 두만강 바닥이 모래라서 가만히 서 있으면 더 깊이 빠지게 마련입니다. 두만강 한복판에서 돌아가서 굶어죽을 바엔 그냥 가자하고 또 걸어 나가니까 앞에 없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나오더랍니다. 아 우리가 가장 깊은 곳에 있었구나 하고 나고 계속 걸었습니다.
그렇게 4명이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 그렇게 오고 싶던 중국땅을 밟았습니다. 대소를 몇 번 다녔다던 여자가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는데, 독신으로 살던 여자 데리고 가니 다른 사람들이 쑥덕쑥덕하면서 되겠다 하더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날 보더니 안 되겠다 했습니다. 나는 돈만 조금만 대주면 내 친척 찾아 가겠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하면서 한번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니 돈 5원을 줍디다. 그래서 그 집에서 새벽 4시에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글자도 하나도 모르는 채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 사람들이 연길에 사는 친척집주소를 한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절약을 하기 위해서 계속 큰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대소에서 배꿈쪽으로 걸어간 것이었습니다. 근데 가랑비가 와서 옷이 홀랑 젖었습니다. 옷을 좀 말려야 의심은 안 받을 것 같아서 과수원 같은 곳에 뛰어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 한족 남자 세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조선말로 ‘비 좀 피합시다’ 했다. 그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해서 한 발 한 발 들어가 비를 피했습니다. 밥 먹었냐 등 계속 물어봐서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연길 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차가 곧 올거라고 해서 기다렸다가 그 차를 탔습니다. 얼마인지도 몰라서 5원을 주니까 2원을 거슬려 줍디다. 그 사람들이 다 용정에서 내려서 나도 내렸습니다. 너무 시끄럽고 사람들도 많고 하니까 나는 무슨 영화 찍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벙벙한채로 서있는데 어떤 뚱뚱한 한족이 나와서 어디를 가냐고 묻길래 주소(테레비 방송국)를 대며 내가 사람을 하나 찾아야겠다고 하니까 저쪽으로 가라해서 가니까, 조선 사람이 다시 나오더란 말입니다. 조금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더니, 아바이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길래 내가 조선에서 왔다하니까 나를 태워서 자기네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사람 내 말 다 듣더니 돈 50원을 주더란발입니다. (그 사람은 아마 조선에 친척이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길까지 버스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연길은 용정보다 더 번화하더란 말입니다. 정신없이 연길에서 왔다갔다하는데, 조선족이 하나가 나를 눈치챈 거 같아서 연길 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는 97년도라서 꼬질 하는(신고하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때가 정오 때라 점심 먹으러 가는 길 같았는데 그 주소를 찾아주기 위해 참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한참을 찾아도 못 찾으니까 그 사람이 파출소로 들어가는 것 같아 나는 막 도망쳤습니다. 그 사람 나온 다음에도 한 5분 지켜봤는데 공안이 안나오길래, 다시 가서 말을 걸었더니 자기는 그런 꼬질르는 사람 아니라 하면서 옛날 주소라서 바뀐 거 물어보러 가는 거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연길주소를 찾아가서 그 찾아 준 사람에서 2원밖에 없다고 하니까 그것만 받겠다고 해서 지불했습니다.
친척을 만나 하룻밤을 자고, 또 먹고 했습니다. 내가 목단강으로 갈 거라고 하니까 또 50원을 주었고, 목단강까지 한 여자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근데 흑룡강성에 들어가니까 기차를 잘못 탔다고 했습니다. 나는 조선글씨도 볼 수 없고 조선 사람들도 다 한어를 써서 내가 참 이거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이젠 개죽음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연길에서 할머니가 싸준 벤토(도시락) 한 개를 들고 역전으로 나가니 몸이 돌아간 불구자가 구걸을 하는 것을 보면서 네 처지가 나보다 낫구나 했습니다. 근데 거기서 한 여자가 'OO어디로 가는 사람 없나.’하면서 누구를 찾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를 붙잡고 나 좀 살려달라며 간곡하게 붙잡았습니다. 마침 그 여자가 목단강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삼촌 이름을 그 사람에게 가르쳐주니, 무사히 친척을 찾게 되었습니다.
연길 할머니가 2000원 어치 짐을 챙겨 놓고 얘 아버지에게 물건을 전했습니다. 연길에서 두 달 잘 먹으니까 살이 붙더란 말입니다. 돈을 좀 모아서 두만강 건넌 후에 나를 도와줬던 집에 찾아갔습니다. 사탕 두 봉지, 쌀자루 등을 건넸습니다.

다시 북한으로
98년 8월, 새벽 2시에 한 발 한 발 두만강을 노를 저으며 건넜습니다. 회령 에서 맞은편이 송학인데 거기서부터 배낭을 메고 120리를 걸었단 말입니다. 발이 너무 아팠습니다. 경비대 애들이 자꾸 쳐다봤는데, 무시하고 걸어갔단 말입니다. 군인이 불러서 배낭을 검사하려 했지만 무시하고 계속 갔습니다. 물을 마시고 다시 가려 했으나 경비대 군인이 다시 불러서 조금 떨어져서 질문에 답했습니다. 배낭검사를 받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대충 대답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 후 달구지 하나를 얻어 타기 위해 전병하나를 주고 회령까지 갔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편이 놀라며 반겼습니다. 그러나 작업반장 채성재가 눈치를 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노동단련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노동단련대에서
그도 같은 죄인이었는데도 너무 독했습니다. 죄인들을 아주 많이 괴롭히고 많은 구타를 했습니다. 너무 심한 노동으로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밥은 통옥수수 한줌만 주고 계속 작업을 시켰습니다.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무조건 뛰어 다녔습니다. 걸어다니면 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8월 18일이 생일을 이렇게 작업소에서 보냈습니다. 생일이면 집에서 음식이 온다고 많이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당일 오전 12시에 소집을 해서 다시 모여서 작업반장이 돌을 하나씩 주으라고 해서 큰 돌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양어장을 100바퀴를 뛰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은 윗통을 벗고 돌을 어깨에 지고 있어서 피가 많이 흐르는 모습도 봤습니다. 3, 4바퀴정도 돌고 나서 멈추게 하고 다시 그 돌을 지고서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을 시키더란 말입니다.
그 후 수로를 오르라 해서 오르는데 너무 힘들어 오르기 힘들었습니다. 겨우 올라서 줄을 선 다음 간단히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어장에 있는 물은 너무 더럽고 개구리 알이 떠다닐 정도였단 말입니다. 100여명이 발을 담그고 있는 물을 다시 먹는다고 정신이 없었고 그렇게 물배를 채웠습니다. 그 후 면회를 했는데, 아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도 생일이라고 면회덕분에 많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람이 머저리라서 머저리가 아니라 면식(가족이나 친지들이 면회를 왔을 때, 넣어주는 음식) 들어오는 게 없으면 사람이 머저리가 된단 말입니다. 아이 한명이 도망치다가 멀리 못가서 붙잡혔습니다. 이제 도망치면 시범으로 이 애처럼 된다고 하면서 아이를 계속 때렸습니다. 몽둥이로 계속 때려서 종아리뼈가 부러져서 피가 나고 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보름을 헤매다가 상처가 썩어서 병원 가는 길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생감자, 강냉이, 조, 무, 생옥수수(8월이라 채 익지도 않은 옥수수), 조 이삭 그게 그렇게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변비가 와서 똥을 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항문에 자꾸 변이 나오도록 문질렀습니다. 남이가 누나들과 회령에서 기차 두 정거장을 걸어서 면회를 계속 왔더란 말입니다. 여름이라 땀나고 힘들었지만,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왔다고 했습니다. ‘ 어디까지 왔니 하면 대덕까지 왔다 하고, 어디까지 가려니 하면 중도까지 간다, 무엇하려 가려니, 어머니 면회간다, 누구하고 가니, 우리 둘이 간다.’ 하면서 노래하고 가면 지루하지 않고 힘들지 않았다라고 들었습니다. 사람이 이러니까 악이 생겨서 계속 도강을 하게 되었지 싶습니다.

노동 단련대에서 나온 후에도 살기가 바빠 친척들에게 계속 가니까 반가와 안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돈벌이를 해야하겠는데, 돈벌이 할게 없단 말입니다. 그래도 뭉칫돈을 못 벌어봤습니다. 여자들 데려가면 뭉칫돈 번다는 것 알았지만, 발각되면 총살이었기 때문에 죽으면서까지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자 둘, 그들의 친척과 함께 용정까지 길인도를 맡아달라고 해서하기로 했습니다. 마작 놀이 하던 여자가 우리를 발견했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걸어갔습니다. 가서 개고기를 먹고, 실컷 놀자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갔는데. 왁자지껄 떠들고 갔는데 우리는 포위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갔습니다. 남자들은 두만강 쪽으로 와장창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구렁텅이에 떨어졌습니다. 한족 사람들이 막 와서 후레시로 우리를 비췄고 우리들은 꼼짝없이 모두 잡혔습니다.

두 번째 노동 단련대에서
그렇게 붙잡여서 회령보위부에서 또 단련대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을 했냐하면 회령 벽송에 들어가서 석회돌 굽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가 4월. 새벽에는 춥고, 낮에는 조금 더울 때였는데 함옥 끌어내는 일을 했습니다. 직경 20센티 정도 기럭지를 아침 새벽에 올라가서 한참 내려가면 벌방지가 다 녹아서 진흙탕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나무가 들러붙는단 말입니다. 여자건 남자건 할 것 없이 쇠 멜빵을 주고, 아무리 힘세도 낑낑대면서 끌어야 했습니다. 보다 못해 감독들이 조금씩 끌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좀 드센편이었단 말입니다. 보름 정도는 죽었다 하고 일을 하지만, 보름 정도는 감독들한테 대들기도 했습니다. 남편도 회령에서 좀 이름 있는 사람이라 나는 기죽지 않았단 말입니다. 반장하고 맞서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속한 조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고왔습니다. 그러니 칭찬도 못 받고 더 많은 일 하고 바쁜 일 있음 우리가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반총질을 했단 말입니다. 반장이 나를 세워놓고 총회시간에 뽐뿌(앉았다 일어났다는 반복해서 몸 안에 숨긴 돈이나 귀중품을 색출하려는 것)를 하라고 했단 말입니다. 난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왜 이 뽐뿌를 해야하나하고 말했습니다. 죽이면 죽여라, 못한다 하고 말했습니다. 반장은 내가 안하면 100명이 되는 대중을 일으켜 세워 뽐뿌를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대중들이 난리를 쳤고 나는 그 대중이 무서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뽐뿌를 했는데 1000개를 시켰단 말입니다. 흘린 땀이 물을 쏟아놓은 것처럼 내 앞에 흘러있었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쓰러진다하고 이를 물고했는데 그게 1000개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도 반장은 나에게 운동장 달리기를 시켰습니다. 그래 대장을 만났습니다. 대장은 반장의 행동 즉 뇌물이나 여자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나는 그건 모르겠다고 했고, 우리 조에게 행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대장은 반장이 덜 되어 먹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내가 이렇게 드센 사람인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노동단련대를 나와서
단련대를 나온 이후에도 나도 더 해먹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꼬빠꾸(단련대)도 두 번 갔고, 그 때 드는 생각이 여자 한 번 팔아서 돈이라도 먹고, 큰 돈으로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재간으로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진에 가면 꽃제비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돈을 손에 쥐고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고 청진역전에 가서 이틀 밤을 잤습니다. 아무리 돌아도 꽃제비는 있는데 그들에게 중국가지 않겠냐고 말도 못 붙이겠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말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말은 못하고, 나도 회령에서 왔다고 얘기하면서 중국에 가면 좋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여자도 중국 가고 싶다고 했고, 나는 젊은 여자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돈 벌어서 그 여자 다시 빼내올 수 있다고 얘기했고, 여자도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3일 째 되던 날, 역전에서 그 여자가 나타나서 나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사라졌단 말입니다. 기다렸더니, 순찰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복차림의 안전원들이었습니다. 나는 갈 데없이 또 잡혔단 말입니다. 청진도 안전부에 넘어갔습니다. 나는 완전 사람 장사꾼으로 취급을 받았단 말입니다. 조그마한 독감방에 갇혔습니다. 나는 인신매매범이 되었습니다. 할 줄도 모르는데 사람장사꾼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참 억울하다는 생각했습니다.
안전부 접수에서 나를 보고,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중국 가는 사람 길안내 하는 것밖에 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왔냐고 하면서 나를 순찰대에 넘겼습니다. 순찰대에서도 나에게 왜 또 왔냐고 물었습니다. 단속반에 나를 넘겼습니다. 조서를 쓰라고 했고, 나는 길안내 몇 번했고, 사람장사는 해 본적이 없다고 썼습니다. 그래 그 해 집결소와 꼬빠꾸(노동단련대)에서 보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