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정화이야기 – 6


정화이야기 ⑥

편집자 주 : ‘정화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정화 씨가 겪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예수님을 내 영혼의 구주로 영접하고 난 후 어느 날, 양말을 사러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양말 장수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어라, 내가 이 양말을 슬쩍 가져가도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겠네?’라는 나쁜 생각이 드는 순간, 심장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뼈마디 골수가 쪼개지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버쩍 드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그 순간 살아있는 주님을 체험했다.

나는 전도사님을 따라 명절을 지내러 하얼빈에 있는 교회로 갔다. 청년부 앞에서 찬송가에 맞추어 직접 창작한 춤을 공연했는데 모두 좋아해 주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자유와 소속감을 느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얼빈에서 사람들과 이곳저곳 어울려 다니는 일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내게 송원으로 되돌아가도 되고, 하얼빈에서 더 있어도 된다는 하얼빈 교회의 제안에 너무 기뻐하며 더 머물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얼빈에서 나는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나오기까지 8개월을 교회 대문 지키는 일을 하면서 교회에서 먹고 자며 숙식을 해결했다. 바느질 솜씨를 살려 교회 청년부 아이들의 무대 공연복도 지어주기도 하였다. 주님 안에서 깨어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내 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하얼빈 교회에서도의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중국에서 산지 어언 13년! 이제 중국어도 웬만큼 하게 되었고 중국에서의 고생스러웠던 시간들도 점차 안정적인 생활로 자리 잡혀가고 있었다. 처음 중국에 들어와 팔려 다니던 시절에는 탈북자 행색이 고스란히 묻어났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항상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갔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허허벌판뿐, 아무것도 없던 시골에서조차 가슴 졸이며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점차 중국의 언어와 풍습에 익숙해지자 아무도 내가 북한출신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제서야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어도 90년대의 처참했던 북한 땅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부모와 둘째 오빠 내외를 땅에 묻고 조카아이들을 뒤로 한 채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땅으로 왔으나, 내 나라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다.

중국에서 고마운 사람의 소개로 2011년 4월 11일 드디어 대한민국에 발을 딛게 되었다! 숨어 지내며 온갖 수모를 겪던 지난날과는 다른,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은 행복과 만족감으로 설렌다. 대한민국의 품으로 탈북자들을 불러주셔서 이 땅의 당당한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하나원에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의무교육과 직업훈련도 시켜주셔서 대한민국 사회에 감사한 마음이 물밀 듯 터져 나온다. 아, 집과 정착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더 잘 알아가도록 교육하며 지원해주시는 하나원 선생님들! 친정어머니의 심정으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섬세하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 탈북자를 믿어주시고, 앞으로 통일 광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끔 기대해 주시며,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주시고 환영해 주시는데 대하여 이 감사의 격정을 누를 길이 없다. 어디서 나를 이토록 당당한 국민으로 받아주리! 나라 없이, 신분 없이 떠돌아다니는 설움을 겪으면서 이런 꿈같은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기에, 오늘의 행복은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이곳에서의 삶을 주님께서 친절한 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낀다. 북한에서의 강한 말투를 남한사회에 맞추어 부드럽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가구류들은 경비 아바이가 아파트 주민이 이사가면서 버리고 간 것들로 채워주었다. 매달 43만원씩 정부 보조금이 나온다. 국가에서 지원된 300만원의 정착금을 나를 브로커에게 비용으로 지불하고고 나를 빼내준 단체에서 주었다. 냉장고 옷 등을 사는데 썼다. 지금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그 동안 고생하여 몸이 많이 상했다. 빈혈 때문에 자주 누워있어야 한다. 6만 원짜리 홍삼 4팩에 24만원 한약 10만 원어치 지어먹고 등등 하니 손님 한 번 청할 때마다 돈이 나가고 해서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나는 잘 적응해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동안 북한, 중국 등지에서 고생하며 몸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빈혈 때문에 자주 누워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을 주님께서 친절한 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낀다. 가구류들은 아파트 주민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것들을 경비 아저씨가 채워주셨고, 매달 43만원씩 정부 부조금이 나온다. 국가에서 지원된 300만원은 브로커와 내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단체에 주었고, 냉장고, 옷 등을 사는데 사용했다.

앞으로 북한 땅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인민에게 고통이 없는 평화의 나라, 자유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겠다. 우리 민족은 하나의 핏줄로 이어온 동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대한민국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만큼 우리도 남북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 동참해야겠다. 우리 탈북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 성심성의로 대한민국 사회를 위하여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통일의 광장에서 대문을 열고 계속 밀려오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훌륭한 교육으로 지원해 주시는 하나원 원장선생님 이하 모든 교직원, 선생님들을 축복하며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시로써 마무리하고자 한다. (끝)

편집 :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8. 2012년 9월 pp. 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