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정화이야기 – 5

 

정화이야기 ⑤

편집자 주 : ‘정화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정화 씨가 겪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나는 장춘과 송원의 중간쯤 위치한 자그마한 농촌의 식당에 넘겨졌다. 그곳은 농촌을 가로질러 도시로 가는 도로변에 줄지어 있는 식당 중 하나였다. 1996년 이후, 중국의 식당에는 아가씨(몸 파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몸을 팔아 큰돈을 번 여자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가씨 일은 하지 않고, 식당의 허드렛일을 하며 늘 일제 기성복을 차려입고 춤과 노래로 열심히 손님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이 식당은 나 때문에 손님이 많아져서 돈을 많이 벌었다. 이때 나는 중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그 주변 식당에서는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얼굴이 예쁜데 아가씨 일은 하지 않고 춤과 노래만 하면서 식당일을 열심히 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주변의 식당 주인들도 탈북자인 나를 보호해주려고 하였다.

중국 공안들이 몸 파는 아가씨들을 잡으러 식당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수색 중이던 공안이 나에게 말을 시켰는데,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어서 대답하고, 몇 살이냐고 물어서 당시 나는 37살이었는데 31살이라고 하였다. 그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나이 또래라고 생각하였는지 그저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들끼리 ‘야 곱다’, ‘근데 북한에서 온 거 아냐?’, ‘머 어때 우리는 그런 거 잡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그냥 가버렸다. 나는 심장이 떨려서 죽다 살아난 것 같았다.

식당에서는 한 달에 300원을 준다고 하였지만, 사실 단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애초 식당 주인이 300원을 주겠다고 했던 이유는 내게 몸 파는 일을 시키고 노예처럼 부려 먹을 생각에서였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때그때 돈을 주었는데, 나는 탈북자라 그런지 돈을 바로 주지 않았다. 돈을 못 받은 채 그 식당에서 다섯 달을 내리 일만 하였다. 물론 나도 내 수중에 그런 큰돈이 있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노릴 것만 같아서 오히려 돈이 사장님 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을 못 받고 일만 열심히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다.

손님들이 나를 원하는데 내가 몸 파는 일을 하지 않자, 식당 주인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냉동고가 필요해서 같이 일하던 22살 아가씨와 함께 가까운 송원 시내로 냉동고를 보러 나갔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 아가씨가 중국말로 내 욕을 미리 했었는지, 사장이 내게 다짜고짜 욕을 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욕을 얻어먹자 나도 조선말로 욕을 하면서 싫은 기색을 잔뜩 내었다. 그러자 사장은 갑자기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맞아서 눈이 퉁퉁 붓고 입에서 피가 났다. 주위에 많은 식당 주인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모두 내 편을 들어주며 나보고 짐을 싸 들고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를 때린 것이 남 보기 부끄러워서인지 사장은 내가 짐을 싸서 나오는데도 문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이렇게 도망치듯 나와버려 그동안 일한 품삯은 하나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나를 송원에 있는 조선식당에 소개해주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말이 통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 년 뒤 다시 그 농촌마을에 가보니 식당은 망하고 마당에 풀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그곳은 장거리 운송트럭 운전기사들이 대부분 손님이었던 식당이었다. 춤추고 노래하며 비위를 맞춰주던 내가 없어지자 나를 찾던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나를 때리고 한 이야기까지 주변 식당을 통해 손님들까지 전해져서 그 식당은 결국 망했다고 한다. 그 식당 사장은 참 못나고 나쁜 사람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송원의 조선식당에서는 개고기도 찢고 카운터도 보고 설거지도 하면서 나름 돈을 좀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겨우 모은 돈 1,000원을 우선 북한에 있는 언니네로 급하게 보내주었다. 내가 북한에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세를 많이 졌고, 언니네가 북한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1,000원을 보내느라 별도의 인편 비용으로 400원을 썼다. 두 번째로 또 돈을 보냈고 옷도 보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니에게 좋은 소리를 못 들을 수 없었다. 인편을 중개로 들은 이야기라 나도 무엇이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 이후부터 나는 심화병(울화병)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색출해 가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럴 때면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 강가의 빈집 등 아무도 나를 색출해 갈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며칠 밤을 자고 오곤 하였다. 아는 사람 집에 있어도 누군가 신고해서 나를 잡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북한에 다시 잡혀가는 것은 나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벌벌 떨었고 심장이 깜짝깜짝 자주 놀라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아직도 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신경이 쇠약한 이유가 많은 시간을 조마조마하게 지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갈 곳 없는 몸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던 차에 한 중국 남자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가서 살게 되었다. 나는 당시 37살이었고 나를 데리고 간 중국 남자는 25살이었다. (나는 팔려올 때부터 31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내 나이가 그런 줄 안다) 그 중국 남자는 나보다 젊어 보이지도 않았고, 함께 간 그의 집은 북한의 우리 집보다도 가난한 집이었다. 즉 중국에서도 빈민 중의 빈민층이었다. 사실 북한이 마비만 되지 않았다면 우리 집보다도 더 못 사는 집이었다. 나는 얼마 안 가 이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는 항변하고 싶다. 탈북 여성들은 근본이 나빠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공안에 잡히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어도 따라가는 것이다. 내가 중국말을 못하고 탈북자의 행색이 묻어나는 한, 언제 어디서든 신고의 대상이 되고, 항상 한 군데 붙어서 오래 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나는 4명의 남자를 따라갔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도 극빈층이거나 몸이 성치 않은 환자들이었다. 탈북 여성들은 중국에서 사회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런 남자들과 사는 경우가 많다. 어여쁜 조선 여자들에게 참으로 슬프고 억울한 일이다.

처음에는 공안에 잡혀갈까 두려워 중국 남자를 따라다니며 살았지만, 점차 중국말이 유창해지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에서 산 지 오래되자 누가 봐도 내가 탈북자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더 이상 중국남자를 나의 안전 보호막으로 둘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제 돈을 벌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내 주변을 추스를 수 있었고,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다. 생계는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교회가 있었다. 어느 날, 기독교인이던 중국 자매가 나의 처지를 알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주기도문을 중국어로 읊어가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도를 받고 그날 식당에서 일하는데 신기하게도 나의 마음이 교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중국 교회를 다시 찾아갔는데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듣자 조선교회를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준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CD를 보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알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내 평생 그때 가장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동안 너무 힘들게 일해 온 탓에 몸이 많이 아팠는데, 성경에서 나오는 치유의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이날 알게 된 하나님을, 내게 주어진 이 절대자 하나님을 절대 놓치지 말고 꼭 붙들겠다고 결심했다. (계속)

편집 :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7. 2012년 8월 pp.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