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정화이야기- 4


정화이야기 ④

편집자 주 : ‘정화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정화 씨가 겪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중국에서의 삶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서문여관’이라는 곳으로 갔다. 내가 임신해 있는 동안 남편이 그곳에서 묵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관주인과 안면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수중에 중국 돈 10원이 있었을 뿐, 완전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고 다른 곳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이 여관을 무작정 찾아갔던 것이다. 여관주인은 우리가 돈이 있는 줄 알고 받아주었다.

대책도 없이 여관에 머무는 동안 공안에 발각되어 북송될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다행히 남편의 친척이 중국 상문시의 공안부 국장이어서 우리의 뒤를 봐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북으로 후송되는 탈북자 일행 가운데 공안은 나와 남편 둘만 두만강가에 몰래 풀어주었다. 같은 공안끼리 의리를 지키느라 그리한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특별대우였다. 그대로 북송되어 우리에게 일어났을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행히 한 번의 북송 위기는 넘겼으나 또다시 잡히면 이번에는 그대로 북송될 처지였다. 당연히 북송 위기에 처한 적 있던 그 여관이 안전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갈 곳이 없던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관장은 다시 찾아온 우리를 여관이 아닌 자기 살림집으로 데리고 가 일주일간을 숨겨주었다. 그 집에 있는 동안 우리는 라면과 김치만 먹었는데, 그 음식들은 매웠지만 정말 맛있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너무 매워 얼굴이 빨개져 가면서도, 우리 둘은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여관주인과 남편은 중국인 남자에게 팔려가는 수밖에 없다며 자꾸 나를 꾀었다. 우리가 무일푼이니 그 방법 외에는 달리 빠져나가는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더러 팔려갔다가 다시 도망쳐 나오라고 했지만, 중국말도 모르는 내가 중국의 내지 깡촌으로 팔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도, 나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여관 밖으로 나가 잡히면 북송될 처지였고 그렇다고 무한정 여관주인집에 신세를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것 마냥, 나는 중국인 브로커에게 3,000원에 팔리고 여관집 주인이 2,000원, 남편이 1,000원을 나누어 가졌다. 내가 받은 돈은 고작 100원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거래를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야말로 눈 뜨고 당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시골의 중국 남자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남편에게 그가 받은 1,000원 중 500원을 우리가 북한을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준 북한의 언니에게 보내주라고 부탁하였으나, 후에 알아보니 언니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채 입을 닦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점에 대해서는 괘씸하다는 생각뿐이다. 후에 그와 내가 모두 한국에 들어왔으나, 아예 연락하지 않는다.

탈북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의 메커니즘은 이러하다. 국경지대에서 나를 3,000원에 사간 브로커는 중국 농촌의 남자에게 6,000원에 되팔았다. 국경지대에서 북한사람을 사서 내지로 이동시켜 중국남자에게 넘겨주는 일은 브로커들에게도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중국 내 북한여자를 파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 여자를 사가는 사람들에게 두 배 넘는 이문을 넘겨 되팔게 되는 것이다. 20대 젊은 여자들은 5,000원에 팔려가 10,000원에 되팔리고, 그 중 인물이 예쁘면 더 비싸게 팔리는 실정이다.

친척들이 중국에 있거나 거처가 있지 않은 한, 북한에서 무일푼으로 도강한 여자들은 무조건 제 몸을 뜯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거의 모두 팔려간다고 보면 된다. 중국의 조선족 사람들이 다 중국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중국 농촌에는 여자들이 부족하고 노총각들이 많아서 조선 여자들을 사가려는 수요가 많다. 그래서 중국의 시골이나 농촌 곳곳에는 북한에서 팔려온 여자들이 많다. 그들은 중국에 살다가도 북한 여자임이 알려지면 공안에 잡혀 북송되는 위기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나는 중국 농촌으로 팔려간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세 번이나 도망가려다 매번 붙잡혔다. 세 번째 탈출 시도 때는 중국 남자에게 붙잡혀 매를 맞았는데, 맞던 중 발길에 차여 꼬리뼈를 정통으로 맞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마비가 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기절하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한마디 나오지 않는 상태로 10여 분 정도를 누워있었다. 온몸에 마비가 풀리자, 그제야 짐승같이 폭풍 울음을 쏟아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나를 동정하며 중국 남자를 욕하는 눈치였다. 당시에 중국말은 하나도 몰랐지만, 사람들이 혀를 차는 행동과 나에게 보내는 동정 어린 눈빛, 말하는 어투에서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기절하고 난 후, 이제는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어머니가 변소에 갈 때도 따라나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등 시위를 하였다. 생사람 죽이겠다며 동네에서도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라고 하자, 중국 남자는 결국 자신의 친척쯤 되는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그는 나를 6,000원에 사온 것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다시 돈을 받고 팔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하고 일단 나를 데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못한 곳으로 가게 될까봐 너무도 두려웠다. 나를 데려가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에게 나를 팔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식당 같은 곳에 넘겨주어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였다. 그와 같이 길을 가던 도중에 수중에 있던 100원마저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인 것 같았기 때문에 중국 상황에 전혀 무지한 나는 이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는 내게 잘해주었으나, 유부남이었고 부인이 갑자기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나는 결국 중국인이 하는 식당에 넘겨졌다. 열심히만 일하면 그곳에서 돈을 모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일만 열심히 한 셈이 되었다. 왜냐면 그 식당이 망했기 때문이다. (계속)

편집 :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6. 2012년 7월 pp.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