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정화이야기 – 3

정화이야기③

편집자 주 : ‘정화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정화 씨가 겪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식량난 중 북한 원산 지역의 상황

나는 아이를 떠나보내고 술을 마시며 눈물 속에서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다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다고 위로해주던 친구와 함께,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이런 생각만 줄기차게 맴돌았다. ‘더는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 친구는 지금 거리에 시체들이 널려 있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내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으라고 얼마 가량 밑천을 대주었던 고마운 동무 덕분에 나는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원산의 거리에는 시체들이 드문드문 널려져 있었다. 죽은 지 3일이 지나도록 장사 지내주는 사람이 없어 길에서 썩어가는 시체들에는 악취와 함께 파리와 구더기 떼가 들끓었다. 국가에서는 그런 시체들을 한 차로 실어가서 한데 묻어버렸다. 수많은 인생이 굶주림 속에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오랜 굶주림으로 너무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다음엔 내 차례라며, 지금은 숨이 붙어있으나 며칠 후에는 우리도 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서로가 공공연히 주고받았다. 시체를 나르고 구덩이 파는 일을 하면 술 한 잔에 밥 한 덩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해 구덩이 파는 일을 하며 술 한 잔과 음식을 얻어먹고 죽어가는 게 불쌍한 인민들이었다.

수많은 인민은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동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그중에 꿰맨 군복을 입은 총각들이 허약한 몸으로 굶어 죽어있는 것을 여러 명 보았다. 당시에는 굶주린 탈영병들을 만나기가 쉬웠다. 어느 날 하루는 함흥이 고향이라던 21살의 어여쁜 처녀 아이가 빨간 완장을 달고 군복을 입은 채 국수를 팔던 내게 왔었다. 국수를 사 먹으며 하는 말이 엄마 아빠가 굶어 죽고 남동생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더는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어 부대를 탈출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여자아이는 스무날 동안 원산역전을 맴돌더니 완전히 거지가 된 몸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원산역전을 옆으로 마주 보던 건물의 A층 2호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굶주림이 극심한 난리 통에 어머니는 먼저 죽었고, 딸이 음식장사로 간신히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장사하던 중 안전원에게 장사밑천을 깡그리 빼앗기는 일이 생겼다. 굶주리던 남동생이 들어와 오늘은 어째서 먹을 것을 하나도 못 벌어 왔느냐고 묻자 누나는 장사밑천을 빼앗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순간 동생은 치미는 분노에 악이 받쳐 누나의 머리를 내리쳤는데 누나는 그대로 숨져버렸다. 그다음에 벌어진 끔찍한 일은, 동생이 누나의 인육을 먹은 이야기다. 굶주림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남동생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으니 먹고라도 죽자는 심정으로 죽은 누나의 젖가슴과 뱃살을 도려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걸로 알락미 2kg을 샀고, 시체의 포를 떠서 고기를 베어내어 고기반찬과 밥을 지어 저녁 식사를 내었다. 저녁상을 보고 깜짝 놀란 아버지는 이런 밥과 반찬이 어쩐 일인가 물으니, 누나가 장사가 잘돼서 이렇게 먹을 것을 싸놓고 큰 장사를 하러 떠났다며 둘러댔다.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허기진 배를 두둑이 채울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아들은 남은 고기를 팔러 장마당에 나갔는데 전에 고기를 사갔던 할머니가 다시 찾아왔다. 총각이 판 돼지고기가 매우 맛있었다며 다시 고기를 사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고기를 뒤적거리다 문득 사람의 배꼽형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순간 너무도 당황했던 아들은 남은 고기를 다 팔지 못하고 식량도 구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 아들은 할 수 없이 밥이나 반찬 없이 고기만을 넣어 아버지와 함께 먹을 죽을 끓여 놓았다. 허약한 몸 때문에 비위가 약해져 고기만 먹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식탁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들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아들은 그제야 모든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인즉슨,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데 한 끼라도 배불리 먹어보고 죽자는 생각으로 죽은 누나의 고기를 내다 팔아 쌀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이 분노한 아버지는 그 즉시 아들을 내리쳤다. 워낙 허약했던 아들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숨져버렸고, 아버지는 안전부에 잡혀가 그 집은 텅텅 비게 되었다. 단란했던 네 식구의 비극은 이렇게 끝이 났고, 이 소문은 온 동네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 원산시 원석 동에서는 아버지가 굶주림에 미쳐 7살 난 딸을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먹은 후, 아이 머리를 문 앞마당에 놓고 쓰레기통에 아이의 손이 보이는 채로 꽂아 두고는 허허 웃으며 “내가 먹었어. 내가 먹었어.”라고 되풀이하였다. 그가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을 본 안전부에서는 그를 잡아갔고, 동네 사람들은 원산시 검찰소 검찰관들이 사건 현장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가는 모습을 인산인해를 이루며 구경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북한 사람들이 짐승보다도 못하게 속절없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인민들의 눈에는 설움이 가득 찼다. 나 역시 너무나 서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론가 잡혀가 생사도 모르게 되는 이런 북한 땅에서 인민들의 울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으며 무조건 참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처참한 인민들의 삶, 이것이 북한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장사 등을 하며 살아갈 궁리를 모색하면, 안전원이나 노동검찰대가 밑천을 깡그리 빼앗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러한 독재와 극심한 배고픔 속에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상황이었던 나는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또 함경북도 국경지대 농촌으로 시집가 살고 있던 언니네에서 낳았던 아들이 보름 만에 죽자, 더는 이 땅에서는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과거, 첫 번째 결혼에서 난 돌도 안 된 딸아이와 생이별했던 아픔에 이렇게 아들까지 잃자 그 슬픔과 고통은 배가 된 것이다.

언니네가 국경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루트를 잘 알고 있었다. 언니가 비용을 대주었고, 국경지대의 다른 사람 집에 15일 정도를 머무르며 도강할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1999년 1월 29일,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나와 남편은 드디어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 (계속) )

편집 :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5. 2012년 6월 pp.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