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정화이야기 – 2


정화이야기 ②


편집자 주: '정화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아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정화 씨가 겪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결혼과 이혼

나의 첫 결혼은 금세 이혼으로 끝났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도벽이 있었다. 남편의 도둑질이 문제가 되자, 큰오빠가 찾아와 도벽 있는 사람과 절대 같이 살게 할 수 없다며 이혼을 시켰다. 시댁형편이 친정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아이는 그 집에 두고 나왔다. 아이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의 소원은 통일이 되고 죽기 전에 생이별 하였던 딸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다. 당시 시댁이 부잣집이었으니 아마 좋은 곳에서 잘 자라서 지금쯤 20대의 어여쁜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친정의 성화에 못 이겨 이혼을 한 후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집에는 이미 오빠와 올케, 조카들이 함께 살고 있어서 내 집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내가 이혼할 당시 식량난이 심해져 더 이상 친정신세를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친구 어머니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 역시 이혼한 사람이었지만 대학을 두 군데나 졸업한 교원으로 겉보기에 매우 점잖은 사람 같았다. 나는 하루빨리 친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몇 번 만나본 후 덥석 재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란 생각에 한껏 들떴고 나의 여성스러운 기질을 잘 살려 가정을 아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새로운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는 컸으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재혼 전에는 이런 괴상한 성격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술만 마시면 여자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성격 이상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 남자의 이혼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이런 이유로 이혼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 다른 남자가 있다는 생트집을 잡아 옷을 모두 벗겨 나의 알몸을 요리조리 꼬집어댔다. 때리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대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크게 때릴 듯이 협박을 하면서 꼬집은 탓에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때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매 맞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었으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비록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었고 술이 깨면 이전에 한 일에 대해 사죄를 하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 남자와 살 수 없어 또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어린 딸을 데리고 동거살이(셋방살이)를 하며 장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갓난아이를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장사는 말려들어 가고, 아이와 둘이서 하루 벌어먹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에, 집세 내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여 맹위원장이요, 동지도원이요,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왜 직장을 다니지 않고 하지 말라는 장사를 하냐며 장사밑천을 빼앗아 가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생활하기가 어려운데 매나니(괜히) 건집(트집)을 걸어서 장사를 하려고 하면 밑천까지 깡그리 빼앗아갔다. 아이에게 알락미조차 먹일 수 없는 형편에 죽을 쑤어 먹이려 해도 울면서 입 밖으로 도로 내밀며 받아먹질 않았다. 워낙 맥이 없어 하기에 어르고 달래면서 죽을 도로 떠먹이면, 그 어린 것이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도리도리 고개를 젓곤 하였다. 이러다가는 아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오자, 내가 거두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잘사는 집에 보내어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관에게 시집간 동창생에게 부탁하여 그 동창의 소개로 평양에 잘사는 한 군관의 집으로 아이를 떠나보냈다. 생때같은 딸이 떠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첫째 남편의 도벽과 두 번째 남편의 학대로 두 번의 결혼생활은 모두 파탄 나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남자들의 결함을 알지 못한 채 결혼하고, 고생하고, 이혼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싶었지만, 그저 남자 복이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90년대의 지독한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시고 둘째오빠 내외도 굶어죽게 되자 갈 곳이 없었다. 수중 몇 푼의 돈으로 여기저기서 장사를 해가며 연명해 보았지만, 나는 이 기근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났던 세 번째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만난 사람이었다.

죽은 작은오빠의 세 조카들 중 둘은 어디로 갔는지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장마당에서 우연히 꽃제비가 된 큰 조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큰오빠를 찾아가 작은오빠 집을 팔고 남은 돈의 일부(2,000원 정도)를 달라고 하였지만, 나뿐만 아니라 조카에게도 살아갈 밑천을 조금도 나눠주지 않았다. 큰오빠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이혼한 나를 좋게 봐줄리 없었고, 오히려 갈 곳이 없는 나를 이래저래 챙기느라 친정의 가세가 더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때는 사회적으로 식량이 너무나 부족한 시기였다. 가족이라도 서로 챙겨줄 형편이 못 되었고, 오히려 가족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흉흉한 시절이었다. 돈도 없고 집도 없었던 나와 조카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조카에게 ‘혹시 굶어죽을 상황이 되면, 네 몸을 팔아서라도 살 길을 찾아라.’고 가르쳐주었다. 나 역시 지나가다 집이라도 한 칸 있었던 남자를 따라서 살게 된 것이 세 번째 남자와의 인연이었다. 길거리에서 굶어죽지 않으려면, 집이라도 있는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 때 그저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외모나 성격, 직업 등 남자들에게 기대하며 신랑감으로 재던 그 어떤 조건들도 상대방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식량난 중의 내 상황이었다. 단 하루, 오늘의 거처와 먹을 끼니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손은 나에게 생존의 기회였던 것이다. 90년대의 식량난은 이토록 절박했다.

남자를 따라 간 집에는 제대로 된 이부자리조차 없었다. 그저 솜 같은 것이 둘둘 말려있어서 한기를 피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둘이서 국수장사를 시작한 후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으며 시장바닥에 앉아 국수를 팔다보니 몸을 추스릴 시간이 없었다. 하루의 일이 임산부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고, 매일 추운 길가에 앉아 있는 것 또한 몸에 안 좋았던지 아이를 낳자마자 보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죽은 사내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절망은 너무도 커서, 더 이상 조선 땅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개미만큼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은 이 땅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편집 :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4. 2012년 5월 pp.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