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정화이야기 – 1

정화이야기 ①

편집자 주 : ‘정화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정화 씨가 겪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1963년 10월, 나는 강원도 문산시 산재동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99년 1월 29일 37살의 나이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후, 중국에서 12년간의 힘겨운 생활을 끝으로 2011년 4월 11일, 한 단체의 도움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내 나이 49살에야 자유의 땅에 들어와 감사와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지난 날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하나원 동기 중 ○○○을 볼 적마다 그 분은 여든 살의 고령에도 희망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는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오빠와 올케, 어린 조카들, 그리고 나의 귀여운 아기는 왜 고난의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나의 지난 역경의 날들과 탈북 동기에 대해 이곳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아버지는 강원도 문산시 산재동의 당 부비서를 거쳐 강원도 당 책임비서로 공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부유했던 작은 아버지가 억울한 일로 추방당하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도 모두 천직되어,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일가친척의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집안이 갑자기 가난해지게 되자 어머니는 울화병으로 앓아 누우시고, 아버지도 밖으로 나돌며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타락하셨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수입이 일정치 않은 막노동을 하시며 이리저리 생계를 꾸리고 계셨다. 나는 1963년 가을, 기울어지고 암울한 이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47세, 어머니께서는 42세이셨다.

아버지는 15년 동안이나 병중에 계시며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지내셨다. 결국 1992년 3월 31일 병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스물여섯에 첫 번째 결혼을 하고 곧 이혼으로 친정에 돌아와 살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식량난이 점차 심해지자, 친정에서 지내는 것도 어려워져 재혼을 하여 일단 친정살이를 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90년대 북한 사회에서의 식량난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당시 북한에서는 강연회와 인민 반상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인민들에게 선전하기를, 이런 심각한 식량난의 위기가 마치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제침략자들, 그리고 일제야만의 경제적 봉쇄로 인해 일어난 것인 듯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당시 순진하고 천진하던 북한인민들은 이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모든 원한을 남한과 미제로 흘려보냈다. 인민들은 굶으면서도 이 고난의 시기만 지나면 모두가 잘사는 날이 오는 줄만 알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굳게 이겨내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소식이 단절된 채 사는 인민들은 당국의 이런저런 선전과 조치들에 속고 또 속으며 배고픈 생활에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식량난은 가혹해져만 갔다.

식량난이 해마다 가중되던 중, 설상가상으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삼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북한인민들 모두가 김일성을 하나님처럼 경배하면서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하고 기대하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당시 인민들이 받은 충격은 자유세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외부소식과 완전히 단절된 채 북한 인민들은 오직 김일성에 대한 찬양과 선전만을 접하며 살아왔었고, 김일성 사망 이후 삶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순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던 많은 인민들이 강원도 원산시 개선광장 내 김일성 동상 앞에 꽃다발을 증정하고 묵도하던 도중,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나가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죽었어도 산 사람들은 각자의 자식들을 생각해서 살아야 한다.’며 순진한 인민들은 아픈 마음을 추스렸다. 그런 와중에 둘째 오빠도 그의 살아생전 소원이었던 새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겠다며 자기노력과  뼈힘. 몹시 힘겹게 쓰이는 힘이란 뜻의 북한말.
뼈심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1995년 초부터 벽돌을 손으로 찍어서 축조를 해가며 어머니와 둘째 오빠, 올케 셋이서 큰 집을 지어놓았다. 비록 벽지와 장판을 바르지도 못한 채 살고 있었으나, 50Kg짜리 돼지와 오리를 함께 기르며 400-500Kg의 식량을 밑천으로 삼아 만족을 느끼고 살아가던 때였다. 배부른 밥은 먹지 못했어도 앞으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집을 지어놓은 것만으로도 우리 친정 가족들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 7월 29일 새벽 2~4시 사이, 하늘이 깨질듯한 번개와 사정없는 소낙비가 내리던 그 날 밤, 그날의 날씨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의 미래였던 돼지와 오리, 식량이란 식량 전부를 깡그리 도적질 당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둘째 오빠, 올케 그리고 3명의 어린 조카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이 죽은 이후, 식량공급체계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생필품 등 공급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갔다. 간혹 외국에서 식량을 실어왔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내어준다던 밀쌀이나 알락미, 강냉이를 비롯하여 1-2Kg의 식량을 받기도 너무도 힘든 때였다. 일체 공급체계로 살아가던 북한인민들에게 갑자기 모든 것이 차단되고 마비된 생활이 이어지게 되자, 모든 이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고난을 겪게 되었다. 우리 친정 가족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 친정 가족들은 사경을 헤맬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족 중 올케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96년 5월 3일이었다. 다음 해인 1997년 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곧이어 5월 중순에 둘째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담담하게 ‘굶어 죽었다’고 서술하기에 그 굶주림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둘째 오빠가 죽기 직전, 오빠는 세 자녀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명령이었다. “아버지는 이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어린 너희들이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불행하냐. 꼭 살아라. 꼭 살아서 이 땅에 생존해라. 집에 있으면 죽는다. 돌아다니면서라도, 밥을 빌어먹으면서라도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만 다시 좋은 날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이제 틀렸다. 나는 가지만 너희들은 꼭 살아남아라.”

둘째 오빠는 큰오빠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부어 오른 몸으로 숨을 거두었다. 큰오빠는 둘째 오빠가 새로 지은 집을 눅은(헐) 값으로 팔고, 3명의 조카들을 거두었다. 하지만 큰오빠는 본인의 자식 4명 중 군대에 보낸 첫째를 제외하고 남은 자식 3명과 올케가 있었기 때문에, 죽은 동생의 자식 3명까지 총 8명의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런 대가족이 90년대 고난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둘째 오빠의 아이들은 큰오빠의 집에서 뛰쳐나와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을 길도 없었다. 나 또한 두 번의 이혼 후, 장사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면서 남은 돈 300원을 수중에 쥐고 원산시 신흥동 장마당을 거닐고 있을 때, 죽은 오빠의 자식인 첫째 조카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상상 할 수도 없는 몰골의 꽃제비가 되어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걸을 힘조차 없어 간신히 몸을 끌며 맨발로 서있는 조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미어지는 아픔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조카도 나를 보고 아줌마라 부르며 앞으로 다가오지 못한 채로 우뚝 서서 소리 없는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내 사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카아이가 먹고 싶다는 대로 100원어치를 사 먹이고, 신발과 옷을 사 입혔다. 수중에 있던 300원을 그 자리에서 모두 다 써버린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큰오빠 집으로 도움을 청하러 가게 되었다. (계속)

편집 :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3. 2012년 4월 pp.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