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전 피바다 가극단원과의 대화

3월 28일 총회에서 탈북동포 김연희 씨의 강연 및 질의응답을 정리해서 싣습니다. 2001년 탈북하여 2002년 한국에 입국한 김연희 씨는 1968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여 1987년부터 1997년까지 피바다 가극단 무용배우, 1997년부터 2000년 까지는 함경북도 무용배우로 활동하였습니다. 

전 피바다가극단원과의 대화

저는 올해 마흔한 살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끼를 받았는지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어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용반에 뽑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평양 피바다 무용단에 무용수로 선발돼서 정치적 행사에도 참가하고, 88년도 89년도 세계청년 13차 축전, 그때는 세계평화 13차 축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알게 되었지요, 그 축전에 참가한 적도 있습니다. 그 이후 탈북인으로서 나름대로 조용하게 살면서 이 사회에서 나만이라도 인정받고 살아야겠다, 한 삼년동안은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이후 이북 땅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남쪽에 와서 살고 정작 이곳을 위해 한 일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여기 앉아계시는 분들도 모두 좋은 일을 하고 계시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하는 생각에 지금은 북한민주화위원회 일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중입니다만, 그렇게 큰일을 할 재목도 못되고 자신도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려고 하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선생님들 궁금한 점 있으시면 질문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Q: 평양에 계실 때 가족들은 어디 계셨습니까?
A: 아버지 어머니는 함경북도 청진에 계셨어요. 아버지는 해운사업소 무역선 타셨는데 92호 만경봉호 기관장 이셨고요. 평양에는 저 혼자 숙소에서 살았습니다.

Q: 그러면 북한 외에 바깥세상에 관해 누구한테 많이 들었는지?
A: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해외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외국 사람들 생활에 대해 많이 들을 수 있었지요. 아버지는 정치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위치가 있는 분이라 (체제에 대해) 나쁜 것을 얘기할 수는 없었고 외국의 사회 문화가 어떻다는 이야기 많이 해 주셨습니다.

Q: 일단 피바다 가극단 가셨던 이야기, 한국에 오게 된 계기 등. 편히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A: 대한민국에 오게 된 계기는 북한에서 제 마음이 개방돼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외국 사정이 어떤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요. 대학도 나오고 결혼을 하게 되고 탈출해서 도망쳐서....
북한에서 평양 피바다 가극단 배우생활을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으로 육성하기 위해 소녀시절부터 활동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내에 소조가 있는데 여기로 치면 학원 정도가 되겠네요. 음악소조, 예술소조, 무용소조 등이 있고. 수학소조 같은 부문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개수가 많지 않아 거의 5개 부문 정도 있고요. 중학교 다닐 때 학생 소년 회관, 원래 평양 학생 소년 궁전이었는데 김일성 지시가 떨어져서, 원래 지방에도 궁전이었는데 전부 회관으로 명칭이 바뀌었어요. 각 학교에 반이 일곱 개 정도 있는데 한 반에 35명 정도 학생이 있어요. 그 학생들이 다 소조를 갈 수 없고 특출한 과목이 있으면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들어가게 됩니다. 수학 잘하면 수학소조로, 합하면 한 30명, 이런 식으로 여러 소조가 있습니다. 저는 예술분야에 소질을 인정받아 담임선생님이 추천하여 신암 여자중학교 함북대표 청진항 유례비로 가게 되었어요. 청진항은 첫 1차 귀국선이 들어온 곳이죠. 해외에서 선박 (무역선) 이 들어오게 되면 그 유례비에서 환영행사를 합니다. 학교 참관할 때도 예사 학교가 되었습니다. 지방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학교로 선원들 앞에서 공부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노래하고 무용도 합니다. 순수하게 김일성 찬양 하는 내용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학교를 졸업하지요. 제가 그 학교를 다닐 때 해마다 두 번씩 열세 명에서 열네 명씩 5과에서 특출한 남녀 학생을 선발해 가는 행사가 열렸는데, 삼학년 때 제가 선발되어 중앙당까지 올라가서 평양까지 올라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올라가면 아버지도 보지 못하고 가족 친척들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어서 저는 가고 싶은 마음 안가고 싶은 마음이 반반 이었어요. 중앙당 5과면 그 아래 20개부서가 있는데 주치 의사도 있고, 기쁨조, 북한에는 기쁨조는 없고 만수무강조가 있는데 그런데도 갈 수 있고, 요리를 배워 요리사가 될 수도 있고, 오리를 키울 수도 있고, 이런 부서가 20개가 있어요. 그런 데를 시험까지 붙어서 갈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안 보내겠다고 해서 안 가게 되었지요.

Q: 아버지의 반대와는 관계없이 김일성이나 당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꼭 가야 하는 거 아닌지요? 아버지가 안 보낸다고 할때 반대 절차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당쪽하고 얘기를 한건지? 내놓고 반대를 한건지?
A: 간부과 지도원과 담화를 한 것입니다. 도당에 아버지가 직접 가서 만났어요. 아버지는 그 사회를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안 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는 특수계층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말이 받아들여져서 제가 안 가게 되었지요. 제 마음도 반반 이었어요. 가면 좋지, 아버지가 출세하고 하니. 한편으로는 또 부모를 떨어져서 간다니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셔서. 이제 가면 내 자식이 아닌 걸로 되니까.
아버지가 가서 머리 숙이고 인간적으로 대화를 한 결과. 거기서 5과 탈락이 돼서 다시 학교에서 공부하고 예술 공연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에 함북 도당으로부터 교장선생님한테 전화가 와서 “4학년 몇 반 누구(본인)를 도당으로 보내 달라. 위대한 김일성 수령 김정일 동지의 과업을 받았다” 하고 지시가 내려 온 거예요.
청진은 공업도시라 제철소 제광소 등 큰 회사가 많아서 직장인들을 많이 배치하는데 일이 힘들어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갈려고 하지 않아요. 5과 가는 사람 혹은 군대나 공부 잘해서 대학을 가는 부류나 공장기업소 에서 2년간 전문학교 강습 하는 사람들 외에 나머지 모두는 집단배치를 받게 됩니다. 갓 졸업한 어린애들이 제철소 배치 받으면 힘드니 부모들은 마음이 아파 간부들에게 어떻게든 빼달라고 사정을 하지요. 저는 5학년 1학기 졸업하고 직장인으로 배치를 받았어요. 초창기 함경북도 도립극장에서 뮤지컬 전문 배우로 일했고, 예술단에 들어갔는데 학교 학생이 거기 들어가서 무용전문 중앙당에서 내려오는 교수님, 해외에 유학 갔다 온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더 월등하게 공연을 잘 한 거예요, 그걸 계기로 통신대학에 가게 됐고, 배우생활하면서 세계평화 13차 축전에도 참가하고, 함경북도에서 시도 대표로 선출되어 평양에 가게 됐고, 거기서 피바다가극단으로 소속되어 2000명이 하는 대공연도 하고 행사에 많이 참가 했습니다.
97년까지 약 10년 정도 근무 했는데 그 후에 결혼도 하고 미 공급 시기에 다른 부업도 없고 생활하다 보니, 사는 믿음이 깨지다 보니. 생활은 해야 돼서 종속할 수 없어서 내부에서 복잡한 일이 많아서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싶고 장사도 하고 먹고 살아야겠다 하고. 탈퇴를 하게 되었죠.

Q: 신랑은?
A; 피바다 가극단 바리톤 성악 가수였어요. 김일성 김정일 배려로 신랑을 선물 받은 거죠. 연애도 못해보고 손도 못 잡아본 사람하고 결혼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기구하죠. 더 잘 먹고 더 잘살아보겠다고 무역을 했는데 그만 비사회주의 그루빠 시범 케이스로 걸리게 된 거에요. 북한에서는 대개 조금 자기 양심적으로 일안하고 잘못 보이면 그 사람은 함흥 로동단련대에 보내져서 혁명화 해야 한다, 그래서 거기 남편이 가게 되었어요. 북한에서 그래도 잘 먹고 잘산 집안의 아들이어서 그걸 더 견뎌내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평상시에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은 그래도 잘 버티는데 남편은 결국 파라티푸스에 걸려 돌아 가셨지요.

Q: 아이들은?
A; 한국에 딸 하나, 이북에 열여덟 살 아들 하나 있는데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지내요. 아들의 경우, 아빠가 교화소 다 채우지 못하고 엄마는 행방불명인 상태라 집단배치 됐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죠.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다 데려오고 싶어요. 하지만 이미 아들은 주체사상이 꽉 들어차서....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너 혼자 어떻게 살겠는가 물어보니, “내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살겠습니다.” 하더라고요. 안타까웠지요. 욕심 같아서는 아들 데려와서 대학에 보내면 좋겠어요. 이 사회에 나와서 기술을 빨리 배워서 제  자식때 통일이 되면 다시 북한으로 가면 무엇인가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 봐요. 지금 이야기 해 보면 기본적인 대화가 되지 않더라고요.

Q: 여기 와서 잘했다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A: 100프로 잘했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자유로운 것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니까.

Q: 북한 사회 발전이 이상적으로 정말 잘될 것 같았지만 실패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 합니까?
A: 저는 예술인이라서 잘 모르지만 정치는 경제고 경제는 곧 정치인 것 같아요. 북한의 경우 김일성 측근에 남달리 머리가 좋은 사람, 순종하는 사람 추리고 추려서 그런 사람들을 일선에 놓는데 제 생각에 실패한 원인이 바로 그것인 것 같아요. 사실 대중의 힘이 대단한데 특정계층 몇몇 사람들과 모든 일을 처리 하려고 하는 게 잘못인거죠. 대한민국은 대중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잖아요.

Q: 왜 자체 폭발은 안 되나?
A: 국민 자체가 바보가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 사회의 한 국민이었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모르고 살아와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총대위에 통일을 하겠다, 선군정치 덕분에 미국도 우리나라에 맞서서 어쩌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국민들을 우롱하고 세상 밖과 격리 시키니 국민들은 그 말이 옳은 줄 알게 되는 거죠. 저도 20대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햇볕정책의 경우 취지는 좋으나 군부가 무너지려 할 때 햇볕정책이 들어가서 무너지지 않고 정권이 그대로 유지된 것 같아요. 여기 나와 있는 탈북자들을 통해서 북한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은데 그렇게 사회가 유지된다고 생각 합니다.
Q: 김정일 망명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A: 있죠. 북경에 비밀리에 탈출할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고 들었어요. 외부에서 오는 돈 군부나 당지도자에 들어가고 그 돈으로 후세인 참고하여 김정일 유사시 도망갈 준비를 한다고 들었어요. 외부 지원하는데서 감사가 나오면 쌀을 다 쌓아 놓는데 그 가운데는 빈 거예요. 배급하는 거 보여줄 때는 말 잘 듣는 사람 배급소에 줄 세워서 나눠 주는 거 보여주고, 외부 기자들은 그걸 보고 받았다는 걸 확인하는 거죠. 쇼가 끝나고 쌀은 다시 회수합니다.

Q: 남한사회를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을 통해서?
A: 광주폭동을 북한 언론을 통해 보고서 알았어요. 남한에 대한 나쁜 인상을 북한주민에게 선전하는 거죠. 하지만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학생들이 군부와 투쟁하고 목표와 뜻이 있어 저항 하는걸 보면 남한과 북한을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저게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이라고 선전했지만, 저희는 그걸 볼 때 아버지가 저건 자기주장을 세우기위해서 그런 거지 나쁜 게 아니다 라고 말씀해주셨어요.

Q: 왜 북한은 못하나?
A: 광주폭동에 대해 저희처럼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이쪽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아직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북한사회가 남한에 대해서 차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북한 주민들은 한국 방송이나 관련 소식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어요. 평양에서는 만수대 텔레비가 있지만. 함북에는 채널이 많지 않아요, 3개 밖에 없는데. 1채널 조선중앙방송 2채널 개성방송 3채널 만수대 방송이 있고, 또 평양 시민들을 위해서 토요일 일요일만 세계기행 이런걸 보여줍니다. 영화, 콩쿨, 공연, 클래식 연주회도 가끔 보여 주지만 한국 것은 보여주지 않았고 사회주의나라 쿠바, 소련, 중국 것들 밖에 없었어요.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한국 드라마 CD를 복사해서 밀매한다고 들었어요. 이제는 CD로 도는 한국드라마가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Q : 선생님 남편은 그래도 특별한 계층 출신인데 혁명화를 중앙당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강제로 보냈는지 아니면 1년 다녀와라 설득해서 보낸 건지?
A: 원래 처음엔 용서를 받았어요. 남편은 원래 일본 출생으로 3살 때 부모님과 북한에 온 귀국자 1세였어요. 시아버님이 김익재라고, 일본에서는 최고의 북한 상공인이죠. 조선혁명박물관에 김일성과 함께 찍은 증조할아버님의 사진이 걸려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증조할아버님이 아들 셋을 다 북한으로 보냈어요. 큰 아들은 일본담당으로 일하고, 둘째(시아버님)는 예전 자동차 회사 (혼다)에서 근무 경력으로 함경북도 오랑군에 배치, 오랑비행장이 있는 곳 농업담당으로 발령 받았고, 셋째, 시삼촌은 김책공대에서 일했습니다. 고모 한분하고 옛날에 야쿠자 생활 했던 제일 막내 삼촌만 일본에 남았어요. 고모님은 일본인이랑 결혼했습니다. 귀국자에 대해서는 보통 신임을 하지만 김일성과 직접 연결이 된 사람 말고 일본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온 사람들은 완전 멸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해요. 군대나 대학가기도 힘들고, 원하는 일 못하죠. 나중에 김일성이 김정일 불러 왜 이렇게 됐나 추궁하고 귀국동포라고 해서 다 나쁜 건 아니니 그런 사람들 속에서 우직함과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재를 등용해라고 얘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귀국자 자녀들이 결혼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각 공장기업소 비서들이 맡아서 해결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저의 경우엔 피바다 단장이 와서 저에게 김일성-김정일 배려로 결혼하게 됐다고 통보해 줬죠. 그때 우리 예술단에 귀국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그때 신랑이 그 전부터 저를 지켜보다가 제  이름을 적어 올렸다고 했어요. 그렇게 엮이게 된 거죠. 결혼할 때는 김일성이 보내주는 선물 받고, 일본에서 삼촌이 돈을 보내줘서 결혼을 했지요.

Q: 어떻게 기독교를 믿게 됐는지.
A: 북한에서 공식적인 기독교도는 없습니다.  봉화-봉숙 교회가 있는데 일반인은 가지 못하고, 국가 간부도 가지 못하는 데고, UN 주재원이나 재미교포 인사들만 갈 수 있는 교회죠. 그런 인사들이 북한에 와서 교회 가고 싶다고 얘기하니까 체류기간이나 있는 동안 거기로 모시고 가는데 예배하는 목사님은 보위부 사람이었어요. 일본에 있는 시삼촌이 북한에 있는 교회에 한번 가봤는데 목사님이 총을 차고 있더라는 이야길 들었어요. 저는 신앙생활한지는 2년 밖에 안 되고요. 7살 딸한테 전도 받아서 교회 다니게 됐어요. (
정리: 박상식 캠페인팀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