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재즈에 미쳐 사선(死線)을 넘다

[증언] 재즈에 미쳐 사선(死線)을 넘다

김 철 웅
탈북동포 피아니스트
2003년 봄 한국 입국

저는 1974년 8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나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 예술인이 갑자기 대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을 잘 키우려는 부모님 욕심 때문에 음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8세 때부터 평양 음악무용대학 예비피아니스트로 선발되어 음악 영재교육을 받기 시작해 우리나라 초·중·고에 해당하는 과정을 이 대학의 인민반, 예비반, 전문반에서, 1994년 졸업할 때까지 14년간 교육을 받았고 수석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이듬해인 1995년엔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으로 유학 갔습니다. 여기서 저의 인생이 뒤바뀌었습니다.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인 ”가을의 속삭임“을 들었는데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몸에 전율이 쫘악 흐르면서 이런 음악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1999년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수석피아니스트로 일했습니다. 하루는 연습실에서 러시아에서 들었던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연주하다 보위부 지도원에게 발각돼 시말서를 10장이나 써야 했습니다. 예전엔 김일성 어록을 읽고 자아비판을 하는 것들이 모두 자연스러웠지만, 러시아 유학을 마친 뒤에는 그런 걸 못 참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여기는 있을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밖에서 자유로운 음악을 접한 다음부터 알고 싶은 음악, 해보고 싶은 음악에 대한 욕구가 제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선 클래식곡 중에서도 20세기 현대음악은 사상이 자유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돼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즈’라고 발음하는 재즈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사악한 음악’으로 금지돼 있고, 더구나 북한에선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주의 때문에 안 되고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미국에 망명한 사람의 곡이라 연주할 수 없습니다.

재즈는 음악에 대한 저의 욕구만 건드린 게 아니었고, 내가 살아온 30년 안되는 삶 자체를 되짚어보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누려온 것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난 그동안 기계나 다름없는 연주가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저는 무엇에 대해 절실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양시민의 1%만 갈 수 있다는 고려호텔 지하식당에 가서 왕재산 경음악단의 기쁨조 공연도 허구한날 즐기며 지냈고 ‘창광원’이라는 고급 수영장 겸 사우나도 외국인에게만 개방한다는 주말에만 갔었습니다. 주머니 속엔 늘 달러가 잔뜩 있었고, 잘나가는 친구들과 최진희, 주현미의 트로트와 이용의 ‘잊혀진 계절’ 같은 한국 곡이 담긴 테이프를 얻어서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본 한국 영화가 ‘무릎과 무릎 사이’였습니다.

재즈를 위해 탈북
그러다가 결국 2년 뒤 2001년 10월 17일 새벽, 두만강을 건너 중국 연변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유는 남들과는 다릅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재즈 음악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달랐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피아노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몰랐고, 저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흑룡강성의 벌목장에 가서 두께 2m, 길이 18m 되는 나무들을 운반하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빵 두 조각과 죽 한 그릇만 먹고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습니다. 피아노만 쳐봤던 곱디고운 손은 막노동하는 사람의 투박한 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아쉬워 이런 고난의 길에 들어선 걸까?’ 그리고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라고...
제 마음만 춥고 시린 게 아니었습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고드름으로 변할 만큼 추웠습니다. 죽고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죽을 순 없었습니다.

벌목장에서 일한 지 7개월쯤 지났을 때. “교회에 가면 피아노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교회에 갔습니다. 피아노는 없었지만 성경공부 하고 밥 먹고 잠 잘 수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한국 선교사들이 참석하는 교회 부흥회에 가게 됐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꿈에 그리던 피아노가 놓여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저는 자석에 끌리듯 피아노 앞에 앉아 어느새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교회 피아노 반주자가 돼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 점점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자유롭게 음악을 하려면 한국으로 가야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두 번이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한번은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고, 북한으로 호송됐을 땐 감옥에서 지인을 만난 덕에 풀려나 다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그런 후 2003년 봄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
2003년 봄 한국에 온 뒤로 서울 화곡동의 라이브 카페에서 밤새워 연주했고 일원동의 피아노 학원에서 강사로도 일했습니다. 탈북자 중심으로 모인 ‘평양 예술단’을 만들어 전국의 구청과 시청을 다니며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서울여대, 이화여대, 명지대, 숙명여대, 포항공대 등 대학교 채플 강의에 초청돼 ‘아리랑’을 연주하고 북에서의 경험담을 전합니다. 2004년 9월부터는 한세대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자유분방한 사람입니다. 누구를 잘 믿지도 않고 종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나 음악에 관해서라면 달라집니다. 교회는 피아노 치려고 탈북한 제게 피아노를 치도록 해준 곳이었고, 마음 둘 곳 없던 저는 종교에 의지한 덕에 남한 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제 인생 스토리를 책으로 펴낼 계획입니다. 재즈에 미쳐서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막상 절실하게 원하던 걸 얻고 보니 또 마음이 달라집니다. 요즘 들어선 다시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우리 민족의 전통민요인 아리랑을 편곡했습니다. 북한에선 아이들이 줄넘기할 때 정겹게 ‘아리랑’을 부릅니다. 남한 노래방에서 젊은이가 아리랑을 노래를 부르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겁니다. 유럽에서도 ‘아리랑’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우리 음악을 지켜야겠지요. 정치도 경제도 할 수 없는 일을 음악은 할 수 있습니다. 동족 간에 싸움 없이 손잡고 제가 편곡한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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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먼저 김영, 변난이씨의 눈물을 보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북한에서 살았다는 사실로 죄책 감을 느낍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북한사람들이 왜 정권에 항거하지 않 는 이유는 그들이 세뇌교육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회적 장치(교육, 미디어, 선전)들이 정권에 대한 선전, 찬양으로 포장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의 경제원조까지 그들이 위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98%이상의 북한사람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사람들이 이 모든 사회적 장치들이 진실인지 의 심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는 사회적 항거로 이어 지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들은 인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체제에 길들어져 왔기 때문에 마치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오듯이 그들에게는 정권이 조금이라 도 식량을 준다해도 이에 크게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연좌제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 한마 디에 가족들이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떠한 불만이 있어도 개인적 차원에서 스스로 이를 소화하려는 자세를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들은 94년 김일성 사망에 대해 수많은 북한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을 이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외국에 나와 공부를 하면서 외부사회를 안 이후에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되 었을 때, 체제가 안으로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 습니다.

한동대학교 국제법률전문대학원에 재직 중인 원재천 교수는 변난이씨에게 맏오빠가 총살당하기 전 적절한 구속 및 재판절차 가 있었는지, 변호사를 선임하였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변난이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한다거나 하는 것을 생각도 못하였으며 오히려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구류중인 오빠를 면회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 었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김철웅씨는 북한에서는 법에 대한 권리보다는 의무사항을 강조 하며 교육하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부당하게 고소를 당했을 경우 어떻게 본인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지 전혀 무지한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

저는 자라면서 정치적으로나 인권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자원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유복한 집에 태어나 부모 님에 의해 음악적 자질이 발견 되었고 피아니스 트가 된 것입니다. 굶주림에 시달린 적도 입을 옷이 없었던 적도 없지만, 저는 인간으 로서 밥, 공기뿐 만 아니라 인권, 자유가 필요 하다는 것을 러시아 유학 중 알게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최고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일상을 바칠 수 있는 음악에 있어 여러분 들이 일상생활에 서 너무나 당연하게 향유하고 있는 부분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꼈습니다. 당시 저는 정치적 의견을 없었으나 당시 자기협 오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 원인을 생각하다보니 북한에서는 더 이상의 발전 이나 개선이 없을 것이라는 생 각으로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탈북하게 된 계기를 잘라 말하자면 저는 듣고싶은 음악을 듣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즉 저는 저의 입으로 하고픈 말을 하고 귀로 듣고픈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라고 하는 분들이 계실까 하지만, 저는 북한을 한편으로는 매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쁘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 다. 그러나 제가 고증하고자 하는 것은 북한에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14년동안 음악교육을 시키고 유학도 국가비용으로 시켜줍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국가가 지원을 하는 이유가 북한이 음악이나 선동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그 힘을 너무나 잘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술가로 하여금 기능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전혀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들 사상에 대해 선전하게 함으로서 체제의 견고함을 더하는 동시에 그들의 사상과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교육을 받았다는 사 람들이 북한에 다시 돌아와 하는 일들이 김일성 개인에 대한 숭배의 가사를 담은, 그러나 그 멜로디로 하자면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들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멜로디와 세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수 준의 음악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당하고 있다 는 사실을 그들이 전혀 모르는 것은 모르지만, 그들은 주위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들도 현직에 있었 고, 동생들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살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 치 미친 것처럼 탈북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문가, 프로라는 생각에 비춰있을 때 자기 분야에 대한 헌신성과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저는 모든 것을 버린다 는 결심을 하였던 제가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그 어떠한 준비도 없었습니다.
현대적 음악을 예를 들면 냉전을 표현 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은 계급투쟁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그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는 이유로 연주 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러시아의 한 까페에서 자본주의의 생산물로 금지시되는 재즈음악을 듣게 되었습 니다. 저는 재즈음악가라는 말을 듣지만 저는 클래식음악가로 불리기를 더욱 원합니다. 다만 저는 재즈를 비롯하여 듣고픈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 습니다. 가장 저를 분노하게 만 든 것 중 한가지가 18년동안 음악만을 공부했지만 이를 한순간 허무 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이러한 북한사회를 탈출하여 무언가 변화를 추구하고 제 자신이라도 구원코자 저는 당시 어떠한 힘이나 영향력도 없 었지만 탈북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중국에서 2년동안 피아노연주가에서 벌목공, 머슴으로 생활하다가 한 선교단체 의 도움으로 피아노를 다시 접하게 되었고 한국에 입국한 이후 에도 기독교에 의해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한순간 저를 허무하 게 만들고 동시에 무언가 바꾸 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혼자 피아노 연주를 할 때 두가지 반목되는 생각에 사로 잡힙니다. 여러분 들이 피아니스트 의 손을 생각할 때 기다란 손가락과 부드러운 손을 떠오르 시겠지만, 저의 손은 두껍고 거칩니다. 저는 이것이 북한 예술가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그 땅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동시 에 증오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주실것을 간절하게 부 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