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조선으로 북조선에서 한국으로의 길

[증언]

 

일본에서 북조선으로 북조선에서 한국으로의 길

신정애(요덕 정치범수용소 경험자)

 

일본에서 북으로 -북에서의 생활

저의 부모님은 일제시대에 한반도에서 살기 어려워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저는 1945년에 일본에서 태어났고 16살까지 일본에서 일본 교육을 받고 16살에 북한의 조총련계 조선학교를 다니면서 희망을 가지고 북한에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희망대로 공부하지도 못하고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지도 못하는 등 문화적 차이가 많았습니다. 공부를 하려 해도 학습장도 없고 잉크도 없어서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1969년에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세 남매를 낳아서 생활했는데 94년도 까지는 그런대로 생활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94년 후반부터는 배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는 정말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자식을 공부 시키려고 해도 학습장도 새까맣고 일본에서 16살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그런 학습장은 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94년부터는 생활하기가 정말 힘들어서 장사도 해보고 만두도 만들어 팔아보고 나중에는 한국에서 나오는 상품을 가져와서 청진에서 팔아도 보고 하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식구 다섯이서 먹고 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95년부터는 배급을 하나도 안 주기 시작하니까 물건 값은 정말 비싸지고 말하기가 정말 힘들 정도입니다. 길에서 굶어 죽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의 남편은 1999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둘은 장가를 보내고 딸은 하나 있었는데, 생활하고 독립하기가 힘들었어요. 국가에서는 직장에 나가도 노임도 안주지 배급도 안주지 하니까 집에서 장사를 하라고 돈을 보태줘도 그거 가지고 하루에 이밥(쌀밥)은 구경도 못하고 옥수수로 끼니를 때우고 지냈습니다. 길에는 사람들이 쓰러져 매일 도라꾸(트럭)에 실려 가고 또 다 실어 내가고 했어요. 계속 그런 것만 보고 하니까 우리 가족도 그렇게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중국에 나가서 일본에 언니가 있었으니까 언니하고 연결을 취하면 어떻게 탈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1차탈북-예심-요덕수용소에서

99년 8월 말에 청진에 갔다가 일본에 있는 언니한테 전화를 하고 언니를 중국으로 불러내서 만났는데 언니는 이번 같은 좋은 기회에 다시는 돌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북에 두고 온 가족 걱정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길로 조금 환전을 해서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사히 국경을 넘었으나 무산에서 체포되어 보위부에서 5달 동안 예심 받고 1년간 요덕 수용소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거기 생활은 내가 말해서 이해하기가 힘들 겁니다. 내가 다섯 달 가량 예심을 받았는데 아침에 5시에 일어나고 밤 10시까지 똑바로 앉아 있어야 되거든요. 하루 식사량이 옥수수쌀로 240g입니다. 거기서 북에서는 요덕이라 하면 이제는 영영 다시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5달 동안 예심을 받고 요덕에 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제 거기로 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는 걸로 생각하고 갔어요.

그러나 나는 요덕에서 일년 일하고 나올 수 있었어요. 거기서 일년간 일을 했는데 자기가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는 밭이 없고 앞에는 산비탈이었습니다. 높은 산비탈에 올라가서 구루마(손수레) 하나 없이 모두 다 인력으로 돌을 주워내고 김매고 나르고 하는 것들을 자기 힘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때 나는 5달 예심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년 받은 사람도 있고 일년 반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심을 받고 나면 몸이 다 허약해집니다. 요덕에 들어와서도 건강 상태가 무척 안 좋습니다. 관리소에 들어오면 거기서 주는 강냉이 옥수수밥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영양실조로 많이 죽습니다. 내가 요덕에 있던 일년 동안 그 구역에 200명이 있었는데 200명 중에서 일년 만에 20명이 죽었어요. 영양실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거기서 먹지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걸을 수가 없어 나올 때는 업혀서 구루마(손수레)에 실린 상태로 그렇게 나갔어요. 그때가 2001년 4월 29일입니다.

한국을 향해

요덕에 일년 있다가 집에 오니까 아들이 자기네 살던 집도 팔고 자그마한 집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도 아들은 내가 없는 동안 결혼을 하고 살고 있었어요. 딸과 사위는 탈북하여 중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일찍 사망하고 하다보니 생활하기가 너무 막막하여 2001년 7월 다시 탈북했습니다. 밤중에 중국에 도착하고 다음날 사위가 마중 나왔는데, 그곳에서 두명 모두 중국 공안에 잡혀 북으로 송환되어 청진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때는 친척들의 노력으로 금방 집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사위는 다시 딸이 있는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2001년 10월 3번째 탈북해서 연길까지 왔지만 중국공안에 잡혀 온성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과거의 탈북경력이 발각되지 않아 가지고 있던 돈을 건네주고 서류를 파기하게 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2001년 11월 4번째 탈북해서 중국에서 사는 딸을 만나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2002년 9월에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북에 남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나는 2003년 3월 북에 있는 가족 6명을 데려오려 했습니다. 28일 가족들을 중국까지는 무사히 넘어왔고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숨어 지내며 생활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7월에 이사한 곳에서는 8월 10일까지만 계약기간이었고, 숨어 지낼만한 곳을 근처에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 사람들도 우리 가족이 탈북자 가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 중국 공안에 잡힐 위험이 많아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8월 7일 상해의 일본인 학교로 들어가 영사관의 보호를 받으려다가 중국공안에 잡히게 되었고, 지금은 장남 장경철과 차남 장경수, 조카 장미화가 북한 보위부에 잡혀 있어요.

지금 내가 제일 근심하는 것은 나와 딸이 한국에 와 있다는 것을 북한 당국에서 아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서 교육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한국이나 미국을 적대시 하니까 그것이 제일 무섭습니다. 나는 요덕 관리소에 일년짜리로 갔다 왔지만 거기는 일년만이 아니고 또 몇 군데 이런 수용소가 있어요. 이제는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걸 아니까 아이들이 한국에 가자고 마음먹었다는 것이 제일 무거운 죄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역에서 영영 못나오는 사람들도 있고요, 내처럼 일년짜리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요, 내 생각으로 아이들이 영영 못나오는 곳에 가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기 한국에 와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처럼 가족이 갈라져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네처럼 아이들이 감옥에 있는 상태인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고 말하는 것이 다 두려웠죠. 이렇게 하면 아이들한테 무슨 해를 끼치지 않을까, 아이들 죄가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해서 못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내가 인터뷰하거나 사람들한테 이런 소리를 하면 아이들 죄가 더 무겁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도 지금까지는 인터뷰하려는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아이들한테 죄가 될까봐 무서워서요. 그러나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아이들이 아무래도 죽을 길밖에 없으니까 나는 전 세계 사람들한테 북한이 이렇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거기서는 정말 죄 아닌 죄 가지고 아주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질의응답

자녀에 대한 소식을 어떻게 듣나요?

중국에서는 북한에 가서 그런 소식을 알려주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돈을 보내주고 전화를 해서 소식을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제일 처음에 북에 잡혀갔을 때는 시(市)가 아니고 구역 보위부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 보위부에 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기서 살 때부터 도 보위부에 한 번 들어가면 이제는 나오지 못한다는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우리 아이들이 어디 아주 먼 곳에 가 있는지 그것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을 하나요?

국경 지대의 경비원들이 있어요. 그 경비원들이 다 군대이긴 한데 돈을 주면 그 경비들이 강에 들어서게 해 줘요. 그럼 강에 들어서면 헤엄치고 중국에 갑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들은 잡히고 어떤 사람들은 잡히지 않습니까?

예. 중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잡히거나 어떤 사람은 안 잡히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중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일을 해야 먹거든요. 첫째,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무서워도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가며 그렇게 다녀야 합니다. 북한하고 중국의 관계가 좋으니까 공안들은 북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다시 북한에 보낸다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공안들은 북한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말을 모르거나 하면 다 가두었다가 다시 북한에 다가 보냅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을 해서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는 과정이 매우 힘들다고 들었는데 오신 분들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리고 그 수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은 한국에 탈북자는 한 4,000명 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탈북한 경로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한국 그렇게 경유하고 왔습니다.

보충설명(윤현 이사장)

신정애 씨는 보통 가정주부였어요. 그래서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 겁니다. 제가 8년 이상 이 문제를 다루어 온 사람으로서 보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중국에만 탈북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쪽에도 탈북자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제일 탈북자가 많이 있는 곳은 역시 중국입니다. 루버스 UN 난민 고등 판무관이 작년에 서울에 왔을 때 지금 중국에 탈북자들이 10만 명 정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NGO들은 30만 명 정도가 중국에 있을 거라고 추측을 했고, 중국 정부나 한국 정부는 2~3만 명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쪽의 주장을 UNHCR에서 수년간 종합한 결과 현재 약 한 10만 명이 중국에서 숨어 지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탈북자가 왜 많이 숨어 지내는 것인가를 알려면 역사적인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실은 중국 지방에는 한인이 약 2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전 약 150년 전부터 중국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됐고 그 자손들이 번지고 해서 중국 전체에 한 200만 명이 있는데 그 2/3 가량이 중국의 동북 지방에 주로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하고는 일가친척 관계가 많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은 일가친척을 찾아 그 분들의 보호를 받고 비교적 안전하게 숨어 지냈습니다.

근래는 중국 공안이 북한 당국과 협동해서 그들을 철저히 색출하고 일년에 평균 5000명 가량을 북한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에 살고 있는 탈북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수천 명에 불과 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중국에 있는 그들의 일가친척이 그들을 보호해주고 먹여주고 숨겨주고 했습니다. 그런데 1995년도부터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넘어오는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까 거의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도 다 그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혹은 강도질, 절도질 등을 벌이는 사람이 가끔 있다보니까 옛날과 같이 보호해주는 그러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거기다가 중국 정부가 상금을 걸어서 숨어있는 탈북자를 당국에다 고발하면 상금을 준다고 하니까 고발하는 사람들이 날로 불어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간 4~5,000명이 체포되어 송환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총 수는 4,750명인데 95년에는 한 500명, 96년에는 1000명이 됐다가 그 다음 해에는 1,500명이 되고 이렇게 해마다 배가 되는 추세입니다. 그것이 총 합해서 4,750명 가량에 이르렀는데 10만 명가량 중에 극히 일부만 한국에 들어온 셈입니다. 탈북하는 과정에 대해 말씀드린 다면 크게 북방 루트와 남방 루트로 둘로 나누어집니다. 북방루트라는 것은 베이징으로 와서 베이징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서 몽골까지 갑니다. 몽골에까지 가면 몽골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울란바토르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넘겨지면 거기서 보호받고 있다가 조금씩 한국으로 비행기 태워 보냅니다.

남방루트라는 것은 걸어서 가는 수도 있고 기차를 이용해서 가는 수도 있고 트럭을 얻어 타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중국 남쪽 운남성 쿤밍까지 갑니다. 쿤밍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베트남으로 가고 하나는 라오스로 가고 하나는 미얀마로 갑니다. 그래서 메콩 강을 이용해서 보트를 타고 태국 쪽으로 와가지고 방콕으로 오게 되면 비교적 쉽게 서울에 오게 되고 캄보디아에 가게 되면 힘들게 한국으로 오게 되고 미얀마는 군사정권이기 때문에 거기서 갇혀있는 세월이 근 1년간 무조건 가두어 놓기도 해서 때로는 절망하는 사람이 미얀마 감옥에서 스스로 자살한 경우도 많습니다.  어쨌든 밀림을 지나서 오다가 뱀에 물려 죽은 사람도 있고 지쳐서 죽은 사람도 있고 메콩 강의 보트를 타고 오다가 뒤집혀서 죽은 사람도 있고 그렇게 많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거쳐서 아마 제가 볼 때는 100명 가운데 10명이 성공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숨으려면 돈과 식량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먹고 재충전을 합니까?

저는 일본에서도 16살까지 살았으니까 일어를 배워주는 광고를 보고 일어를 가르쳐 주고 한달에 500원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는 생각은 했지만 한국에 어떻게 가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한국 사람을 만나서 한국 교회 목사님을 소개 받았어요. 그래서 그 어느 날 사람 좀 만나자 해서 가니까 한 달 쯤 있다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국 사람인 덕분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정말 수월하게 온 편입니다. 행운이죠.

보충설명

신정애 씨의 케이스는 아주 행운의 케이스입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과 연락이 되어서 지원도 받을 수 있었고요, 그리고 한국 목사님의 소개를 받고 이렇게 오게 되었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무척 힘듭니다. 말하자면 일가친척이 있을 때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옛날이야기 이고 지금은 일가친척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남자의 경우에는 농촌에 가서 힘든 일, 돼지 키우고 양 키우고 하는 일을 하는 데도 세 끼 밥만 얻어먹고 잠자리만 마련하고 있는 게 전부고 현금 보조를 거의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는 노래방 같은데 혹은 카페 같은데서 술시중을 하기도 하고 혹은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런 갖은 고생을 하면서 어렵게 지내는데 어떤 경우에는 목욕탕에 가서 3년간 온 식구가 손님들의 때를 밀어주고 몸을 깨끗이 해주는 그런 때밀이의 수당을 받아가지고 3년 모아서 한국에 들어온 그런 경우도 있고, 또 나중에 돈을 한국에 오면 한국 정부가 지불하는 것이 약 3만 불정도 정착 지원금을 받으니까 그 돈을 받으면 갚는다는 조건으로 브로커를 통해서 위조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는 등의 그런 여러 가지 편법 등을 쓰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탈북을 할 때에 어떠한 법을 어기게 되며 어떠한 형법적인 처벌을 받게 되는가?

저는 그런 걸 잘 모릅니다.

보충설명

북한 형법 제47조에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공화국을 허가 없이 탈출하면 7년 이하의 형을 받도록 되어있고 적의 편에 투항할 목적으로 탈출을 한 자의 경우에는 사형 및 전 재산 몰수를 한다는 것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단순하게 식량을 구하러 가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7년 형까지는 가지 않고 노동 단련대라는 곳에서 어떤 때는 6개월 어떤 때는 1년, 2년 그렇게 중노동을 부과한 다음에 다시 석방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국경을 어떻게 지키는가?

국경 경비는 요즘에 강화되어 있고 말뚝을 세운다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뇌물이 통하는 수가 많습니다. 원래 그런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부패도 또한 절대적으로 널리 퍼지는 경향이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식량을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뇌물로 탈출하고 또 들어오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서 궁금한데 어떤 사람이 가고 또 가게 되면 몇년 정도 있고 또 수는 어느 정도 되고,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내가 형을 받기 전에 요덕이라고 하면 그곳에 일단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일단 일년이라는 형을 받고 들어가니까 내가 들어간 데에서는 최고가 3년이고 그 관리소라는 데는 한 평생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것이 몇 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일년 형을 맡고 나올 때 정문 앞에서 남자 둘하고 여자 한 사람, 그러니까 세 명을 봤는데 그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하고 같이 퇴소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다른 구역에 있었다고 하니까 근데 거기는 최고가 5년이라고 합니다. 내가 있었던 데는 최고가 3년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사람들과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알게 되고 그걸 알게 되니까 굉장히 크고 여러 가지 구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충설명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나온 얘긴데요, 시초를 언제로 보느냐면 1958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56년 또는 58년부터 정치범 수용소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원형은 구소비에트에 있던 굴라그를 그대로 한 것으로 저희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에 보면 설명이 나와 있으니까 자세한 것은 보시면 알 수가 있는데 앰네스티 인터네셔널이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보통 오래 전부터 약 20만 명이 지금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있고, 커다란 관리소라는 굴라그가 5개 이상 있는 걸로 돼 있는데 아마 10개까지가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만 명이 5~10개 정도의 굴라그에 갇혀있다고 보시면 되지요. 어떤 사람이 가는가 하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당 간부들이 거기에 맨 먼저 투옥당했고 그 다음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세습체제,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투옥되고, 투옥 대상이 점점 넓어져서 김일성의 얼굴이 실려 있는 신문을 깔고 앉았다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몰리는 수도 있고요. 또 가슴에 달고 다니는 김일성 배지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하고, 집집마다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간수하지 않았다, 때가 묻었다는 이유로 투옥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명목의 정치범들이 많이 있습니다.

북한은 정보가 왔다 갔다 할 수 없고 통제된 상황인데 그러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누구한테 합니까? 그리고 사회에서 정보 교환을 한다던지 그러한 바깥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까? 바깥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북한에 들어가면 어떻게 받아들여 집니까? 바깥의 정보는 어떻게 들으며, 어느 정도까지 통제가 됩니까?

제가 조선에 있을 때 누구보고도 그런 속에 있는 소리를 못해봤습니다. 속에 있는 소리를 한다고 하면은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나 합니다. 그저 먼 데 있는 친척들한테도 그런 소리를 못하고 자기 집에서만 속에 있는 소리를 했지 나가서는 입 밖에도 못했어요. 거기 제도가 어디서나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감시를 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누구한테도 속에 있는 소리를 못하고 그저 집에서만 했어요. 재일 조총련 기술자 방문단인가가 왔어요. 일본에서 관광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친척들한테서 일본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북한을 세계 나라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정부에서 방송해 주는 것만 듣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그러죠. 그러나 도망 나온 간부들이나 외국에 나가서 있는 간부들은 조금씩 소식을 알죠.

일본에 있는 친척이 어떻게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죠?

가족 방문 그거는 국가에서 뭐라고 딱히 말하지 않습니다. 원산과 일본 나가타 사이를 만경봉호라는 배가 정기적으로 다니기 때문에 원산에 가서 가족들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