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 – 8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⑧

  (편집자) 이 글은 일본에서 북으로 간 가와사키 에이코(경희)님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왜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후 왜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삶을 통해서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얽히고설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품으로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제7장 기식

은하는 기식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기식의 집으로 달려갔다. 기식의 집에는 기식이 다니던 과학원 원장을 비롯하여 몇 명의 직장사람들과, 대학시절 친구들이 몇 명 와있었다. 은하는 지금 제 앞에 누워있는 미라가 기식이라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을 수 없었다.

그 때는 초가을이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가을에는 전국적으로 도토리, 송이버섯, 땅콩, 살구 씨 등 온갖 수출 가능한 것이라든가 수출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것들을 바치게 했다. 기식이 속해 있던 연구소에서는 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가게 되었다. 그날의 책임자는 기식이었는데 산기슭에서 그는 인원들을 자유롭게 도토리를 줍도록 풀어주었다. 그 날 밤 기식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과학원에 수천 명의 연구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실력이나 인격에서 기식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식이 없어지자 연구소에서는 그를 찾기 위해 소동이 일어났다. 시신은 2시간 후에 발견되었다. 흙을 파서 움푹 파인 곳에 도토리가 반 쯤 들어있는 배낭을 끌어안고 그는 죽어있었다.

은하는 30년 전의 대학생시절 생활이 눈앞에 떠올랐다. 기식은 조선인 고등학교에서 으뜸가는 학생이었다. 키 183cm에 체중 70kg로 이목이 수려한 학생이었다. 홍안의 미소년이란 바로 그를 놓고 표현한 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때로는 예능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집에까지 따라와 연예계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깝게 지내는 여학생이 없었다. 사람을 접근시키지 않는 엄한 부위기와 같은 것이 있었고, 여학생들도 그는 너무나 눈부신 대상이어서인지 말을 걸어보려 하는 학생이 없었다. 기식은 외동아들로 그의 부친은 그가 조선대학을 나와서 조총련의 일꾼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들도 아버지의 의향대로 마지막까지 조선학교에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학생집단으로 북조선으로 가 조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양친은 그것을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였다. 그들은 조총련의 선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절은 처음부터 왔다. 북한은 김일성 종합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부친이 공장을 경영하는 실업가라고 하여 그는 기본계급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김일성 종합대학 입학대상에서 제외 되었던 것이다. 먼저 귀국한 학생들 중에서도 부모가 조총련의 간부를 하는 학생은 학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하여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기식은 그런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무리 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지방에 있는 공업대학에 들어갔다. 물론 기식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기식은 부모 때문에 평양에 거주할 대상도 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기식은 깜짝 놀랐다. 침구란 이름뿐이고 난생 처음 보는 초라한 것이었다. 주식은 강냉이를 부순 것이거나 통 밀을 삶은 것 뿐 이었다. 갑작스러운 생활 변화에 귀국자 학생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연이어 쓰러져 갔다. 기식의 그렇게도 늠름하던 체격도 보는 사람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안쓰럽게 야위어 갔다. 질식할 것 같은 학교생활 중에도 숨 돌릴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귀국자였던 선후배들과 함께 외부식당에 나가서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기식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가 바로 은하였다. 이 대학에서 제일 나이 어리지만 공부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 할 만큼 우수하다고 했다. 그리고 전국에 이름난 정구선수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기식은 그 뛰어난 재능 덕택으로 과학원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일하는 것과 수입은 관계가 없었기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수입으로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식은 연구소에서 묵묵히 일을 해나갔다. 하나의 과제가 주어져서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가 하던 연구과제는 다른 자가 연구한 것처럼 꾸며서 박사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몇 십 년이나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북한 방문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조국을 방문한 기식의 옛 친지들은 그를 만나고 싶어 했고, 가능하면 그와 손을 잡고 사업을 하고 싶다 희망하였으나 정작 북한에서는 그를 따돌렸다. 그는 너무나도 가난했고, 그를 내세워 봤자 자기들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아갈 돈을 벌기 위해 뒤에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뛰어다니고 있을 때도, 귀국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기식은 자신이 넉넉히 살았던 소년시절을 생각하며 자식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보다 못한 친우들이 일본에 있는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 조금만 도와달라고 해볼 것을 권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식은 그런 짓을 할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낮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젊은이들도 줍지 못했던 도토리를 군용배낭에 절반씩이나 주워 모으기 위해 그는 혼자서 산을 얼마나 헤맸을까. 외모도 두뇌도 너무나도 뛰어났었던 그가, 바다를 건너 지상낙원으로 간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처박힌 곳은 지옥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는 조국이라는 괴물에 짓눌려 미라가 되어 죽어갔다.(계속)

 

※ 『북한인권』 194호. 2014년 12.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