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 – 5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⑤

(편집자) 이 글은 일본에서 북으로 간 가와사키 에이코(경희)님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왜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후 왜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삶을 통해서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얽히고설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품으로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

제4장 의장

송씨는 조총련의 의장이었다. 그는 자기가 번 돈으로 학교를 짓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보면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고, 돈을 더 벌겠다는 의욕이 용솟음쳤다. 아내나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하던 조총련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아내는 가끔 조총련이 그의 애인이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북으로의 귀국운동이 시작되었다. 12월 14일, 송씨는 가족을 제1차선에 태웠고, 그는 일본에 남아서 조총련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가족은 평양에 있었으며, 모두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조총련 간부가족이라 하여 특별대우를 받았다. 일본에 비해 질은 떨어지지만 ‘지상낙원’ 이라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병으로 죽게 되자 아이들을 부모 없이 북에 그냥 둘 수 없었던 송씨는 북으로 가게 되었다. 북한에 온 그에게는 좋은 직업이 주어지고 운전기사가 딸린 차까지 제공되었다. 직장에 나가서도 별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가족 때문에 부득이하게 귀국하여야 하였지만, 귀국 후에는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한 목숨 다 바칠 생각으로 배에 올랐는데 당국의 이러한 처사는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 그의 자식들은 대단히 놀라며 송씨는 물론 가족들 전부의 안위가 걸려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였다.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불편함이 그의 몸을 휘감아 갔다.

  점차 살아가면서 그에게도 북한의 현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와 가족은 자기가 조총련의 간부였다고 하여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귀국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탄광이나 광산에 보내져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귀국사업을 추진시킨 조총련도, 일본정부도 사람들을 내보내기만 하였을 뿐 재일조선인들이 북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 참기 힘든 사실은 송씨 자신도 이 일을 추진한 당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본으로 이러한 현실을 알릴 방법이 전무하였다. 모든 연락망은 검열 당하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그가 귀국한지 5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당비서가 부른다는 전갈에 사무실로 갔다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감방으로 끌려갔다. 독방이었다. 가로, 세로, 높이가 70cm정도며 곧바로 설수도, 몸을 쭉 펴고 누울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어제까지 정승처럼 대하다가 갑자기 개, 돼지 부리듯 변한 처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성실하게 살았기에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살던 현 내에서 조선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가 송의장이라 부르며 그를 따랐었다.

  취조실에 끌려간 그는 감방으로 오게 된 경위가 무엇인지 조사관에게 따지려 하였으나 턱이 으스러질 정도로 매를 맞았다. 녹초가 된 그를 의자에 앉히더니 종이와 연필을 꺼내며 그가 일본에서 한 나쁜 짓들을 쓰라하였다. 송씨는 일본에서 아무 나쁜 짓을 하지 않았기에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저녁쯤 되어 조사관이 나타나서 그가 쓴 것을 읽더니 영웅전을 썼다고 비하하면서 머리, 가슴, 배, 등판 할 것 없이 마구 때리고 발길로 걷어찼다. 그는 살아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고자 했다.

  닷새쯤 지나서 그는 또 취조실로 끌려갔다. 다시 자백을 강요당하고 그가 거부하자 구타 후에 드디어 죄목을 말해주었다. 일본공산당 가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며 가입한 사람들을 아는 정도였다. 구체적인 죄목은 그 단체의 사주를 받아 북한에서 스파이 짓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것도 쓰지 않으니 심문이 있을 때마다 맞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거짓자백을 요구하며 때렸다.

끝내 그가 자백서를 쓰지 않자 조사관은 자백서를 대신 쓴 다음 송씨에게 손도장을 찍으라 강요하였다. 자백서의 내용은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 가서, 나라가 해방되자 일본 경찰과 한국 괴뢰정부로부터 스파이임무를 받고 잠입 했다는 것,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기계나 재산들은 스파이 활동을 위해 받은 자금과 조총련의 활동자금을 횡령한 돈으로 사가지고 왔다는 것 등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이 이어졌다. 그는 손도장을 찍으려 하지 않았지만, 경비병들은 그를 폭행한 후 강제로 도장을 찍게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경비병들은 그를 감방 뒤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조사관은 스파이 활동과 인민착취의 죄로 송씨를 사형에 처한다는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낭독하였다. 고향을 떠나 오늘까지의 인생이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의 죽음은 그와 같은 감방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지부장에 의해 송씨의 딸에게 전해졌다. 그의 가족들은 재산이 모두 몰수되고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과 솥, 냄비만을 지참한 채 요덕의 관리소로 보내 13년을 살았다.

※ 『북한인권』191호. 2014년 9.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