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 – 4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④

(편집자) 이 글은 일본에서 북으로 간 가와사키 에이코(경희)님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왜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후 왜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삶을 통해서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얽히고설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품으로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

제3장  편도표

  기꾸애, 그녀는 아직도 무엇이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배에 올랐다. 이것이 자신의 친지들과 영원한 이별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꾸애의 부친은 건설회사의 사장이었다. 대대로 유복한 집안의 막내였기에 기꾸애는 고생, 가난과는 인연이 없었다. 아버지 친구의 사업을 도와주던 중 기꾸애는 한 사나이를 알게 되었다. 키가 훤칠하고 양복이 멋지게 어울리고, 춤을 잘 추는 남자였다. 그에게 사랑을 느낀 그녀는 아버지가 반대하자 집을 나가서 그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나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하였다. 어머니의 반응에 기쁜 마음으로 기꾸애는 남자에게 어머니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남자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그 남자는 조선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기꾸애의 부모가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아버지가 아이를 책임지게 되어있으니 아이가 태어나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라 권유하였다. 기꾸애는 혼란스러웠다. 다음날, 어머니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 또한 즉석에서 결혼은 안 된다고 딱 잘랐다. 기꾸애는 얼마 지나서 귀여운 딸애를 낳았다.

  기꾸애의 모친은 남자와 연락하여 기꾸애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남자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였다. 기꾸애는 딸이 없어진 것을 알게 아기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가 이틀 뒤 북조선으로 가는 배를 탄다고 했지만 그녀는 북조선에 따라가겠다 말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꾸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북조선으로 가는 귀국선에 올랐던 것이다.

  남자의 가족이 간 곳은 작은 고을에 위치한 신발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남자는 손기술이 없다 하여 견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월급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익숙지 않은 일과 급변한 식생활 때문인지 모두 건강이 나빠졌다. 남자의 부친은 간이 나빠져서 40일간이나 입원하였고, 모친은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시아버지는 조총련의 선전에 속아 말도 안 되는 곳으로 왔다며 통곡했다.

  그러던 중 기꾸애가 쓰러졌다. 개방성 결핵이라 입원을 하게 되었다. 울음을 터뜨린 기꾸애에게 시아버지는 그녀를 달래며 매일 아침 염소젖과 마늘 구운 것을 가져다주었다. 시아버지는 강제징용을 당하여 나라를 떠나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맛보는 고독과 쓰라림을 뼈저리게 느껴온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꾸애의 처지를 남달리 가슴 아파했다. 시아버님은 왕복 4시간의 거리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녀오는 시아버님의 등에 데고 기꾸애는 두 손 모아 합장을 했다. 이 가족을 위해서도 나는 죽을 수 없다 다짐한 그녀는 반년이 지나서 퇴원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당의 갑작스런 결정으로 트럭에 실려 먼 시골의 과수원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공장의 노동자로 있을 때는 남편이 일하면 늙은이나 아내는 부양가족으로서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그런 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다. 기꾸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일하러 가지 않으면 가을에 식량분배를 탈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산골로 내쳐졌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후에 국가에서 농촌의 노동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아래 몇 십만 아니 몇 백만의 사람들을 농촌으로 보냈는데 그 대상은 소위 출신이 나쁘다는 사람, 즉 귀국자들 중에서는 주로 일본인 아내가 있는 가정이 그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꾸애는 울음을 터뜨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지 않아도 참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던 가족이 자신 때문에 이렇게 죽을 정도로 힘들고 불편한 처지에 굴러 떨어졌던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없고, 읽을 만한 책도 없었다. 눈을 뜨기만 하면 뛰어나가서 일하고, 어두워져서 돌아와 잠드는 나날이었다. 우는 그녀에게 시아버지는 국가 옳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이런 말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경제상황은 점점 나빠져 가다 보니 농촌에서 조차 식량이 없어서 굶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먹을 수 있을만한 풀은 무엇이라도 뜯어다 먹었다. 그리 건강하지 않던 시어머니는 위를 상하여 죽게 되었다. 다음은 남편이었다. 산에서 뒹굴어 크게 부상당해 군병원으로 가는 도중 죽어버렸다. 아들까지 잃은 후 시아버지는 퍽 늙었다. 임종을 앞두고 시아버지는 그녀에게 '너는 편도표를 산 것 같구나. 아들도 죽어버려서 너를 일본으로 돌려보낼 때까지 살아 있어주고 싶었는데... 내 힘도 이제는 소진 해버렸다. 아이들을 지켜 억세게 살아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은 네 부모형제가 있는 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기꾸애는 남편이 죽었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도 일본을 미워하던 시아버지가 기꾸애의 인생을 깊이 동정하여 언제나 힘이 되어 주려고 노력해준데 대해서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랐다. 세월은 흘러 어느새 기꾸애는 벌써 칠십이 넘었다. 풍문에 그녀의 가족 중 언니만 살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기꾸애가 굶어 죽는 것이 먼저인지, 일본에 가서 언니를 만나게 되는 것이 먼저인지 누구도 알 수가 없다.(계속)

※ 『북한인권』190호. 2014년 8. pp.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