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 – 3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③

(편집자) 이 글은 일본에서 북으로 간 가와사키 에이코(경희)님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왜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후 왜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삶을 통해서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얽히고 설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품으로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

그의 집은 아파트였고 방 2칸에 부엌과 좁은 세면장과 화장실이 있었다. 여덟 식구가 함께 살기는 집이 좁았다. 방에는 어떻게 표현하기 곤란할 정도의 침구들이 있었다. 열은 무연탄을 피워서 얻었는데 이는 굉장히 고된 일이라 하루 종일 손도 얼굴도 새까맣게 되여 열심히 애를 써도 불은 피여 올라와 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과 씨름을 하다 보면 일산화탄소가스 중독을 일으켜서, 토하고 심한 두통을 호소하였다. 원래 말수가 적은 아내는 아예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충격으로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염려해서인지 맏딸은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방긋 웃고 있는 그녀를 보는 신 씨의 가슴은 송곳으로 쑤시는 듯 아팠다.

어느 날, 신 씨는 길에서 단장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새까맣게 볕에 탄 낯모를 사나이가 서있었는데 그는 같은 배로 온 김 씨였다. 놀라움과 그리움으로 눈물이 나오려는 신 씨는 그의 안부를 물었는데 김 씨는 같은 도안에 있는 탄광으로 갔다고 한다. 일이고 무엇이고 다 말이 아니지만 제일 곤란한 것은 식량이 모자라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90%의 콩을 주는 데는 손을 들었다. 설사를 하고, 위를 상하고, 드디어는 간이 나빠졌다. 그는 병이 나서 도 병원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왔다고 한다. 신 씨는 앞이 캄캄하였다. 자기가 데리고 온 1,300명의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으로, 밤잠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 씨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제일 아래 아들애와 딸애의 입과 손이 새까매서 입에 검은 것을 우물우물 먹고 있는 것이다. 깜짝 놀란 신 씨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 위의 아들애가 말했다. 그것은 골탄이라고. 그는 그 말을 듣고 두 어린것을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간식이 먹고 싶었으면 골탄을 먹었을 것인가.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예리한 칼날로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 하였다.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싫어하는 아내에게 호통을 치고 6명의 어린것들까지 데리고 와서, 무슨 구렁텅이에 쳐 넣었는가 자책하였다.

그가 생각 할수록 이는 자신의 불찰이었다. 공화국의 선전에 작은 의심도 품지 않았던 조총련이 너무 경솔하였던 것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것은 돌아갈 수 없는 편도차표인 것이다. 자기의 가족과 함께 온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올 것인가. 조총련은 재일조선인들에 대해서 당치도 않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남조선 출신이다. 그 고향을 버리고 북으로 가도록 한 것은 조총련인 것이다. 골탄사건이 있은 지 3일 만에 사무실에서 신 씨는 고뇌하다가 끝내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향년 45세. 청진에 상륙하여 4달 후 그는 비탄 속에 숨졌다.

제 2 장     시골의사

한 명은 공과대학생, 다른 둘은 의과대학생. 그렇게 셋은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함께 평양시내를 돌아다녔다. 일본서 온 이 셋은 희망하는 대로 평양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교생활은 일과가 전부 짜여 있어서 너무나 무미건조하였다. 공부는 공업대학, 의학대학에 관계없이 수업시간의 절반이상이 정치과목이였는데 내용은 전부 반일, 반미 교육으로 김일성 찬양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 속에서 세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셋이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일본이야기를 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툴툴거리는 그런 시간조차도 없었더라면 정말 질식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제는 그 세 명 중 하남에게서 시작되었다. 하남은 부모를 일찍 여위고 누님 내외의 부양을 받고 있었다. 자형은 상스럽고, 술버릇이 나빠서 누나에게 자주 폭력을 휘둘렀다. 하남이 북한으로 귀국한 다음 자형의 본처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와서 누나를 쫓아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남은 격노하여 두만강을 건넌 후 일본으로 가려고 결심한다. 그런 그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2명의 친구들은 하남과 같이 탈북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강을 건너기 전, 셋은 약속을 했다. 만약 물에 빠지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그대로 두고 건너간 사람만 도망치기로 말이다. 하남은 물이 너무 차가워서였는지 발에 경련이 일었다. 강직이 점점 전신으로 퍼져 손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 친구에게는 버리고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먼저 건너간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우뚝 서있었다. 그들은 자기 무덤을 파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중국의 국경경비대 초소에 구조를 요청했고, 다행히 경비대원들이 하남을 구할 수 있었다. 하남은 중국의 병원에서 일주일간 치료를 받은 후에 북한 측 국경경비대에 넘겨졌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시련의 때가 닥쳐왔다. 일본에서 특별한 임무를 받고 침입한 간첩일 것이라는 전제하에 조사가 진행되었다. 갇혀있는 독방은 설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독방에는 벼룩과 모기도 있었으나 무수히 많은 이와 빈대에 의한 고통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속)

※ 『북한인권』189호. 2014년 7.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