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 – 2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②

(편집자) 이 글은 일본에서 북으로 간 가와사키 에이코(경희)님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왜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후 왜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삶을 통해서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얽히고설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품으로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

제1장  단장

 신길진 씨는 45세였다. 그는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둔 조총련의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로 일찍이 부모를 여윈 그는 학교에도 못 가고 누이의 손에서 자랐다. 1910년, 한반도는 일본에 병합되었다. 조선의 물적, 인적 자원은 모두 일본으로 반입 되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광대한 아시아를 수중에 장악하는 군국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신씨네 집은 가난하다 보니 그가 17세가 되었을 때 형이 그에게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본으로 갈 것을 권하였다.

 신 씨는 형의 말대로 주선인에게 이끌려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유리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그는 한마디의 일본어도 몰랐고, 공장에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빨리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처음으로 받은 임금으로 작은 수첩과 연필을 하나 샀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수첩에 글을 베껴 공부하는 그의 열성에 하숙집 내외는 일본글을 가르쳐주게 되었다. 이러하여 일본글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항상 고향과 형님들, 누님들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점가에서 쇼핑을 하던 그에게 누군가가 조선말로 물었다. 신 씨는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같은 고향 사투리를 썼기 때문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오사카에는 많은 조선사람들이 건너와 있었다. 그 사람에게 이끌려 그는 조선사람들만 사는 마을로 갔다. 일본인들의 집에 비하면 도저히 집이라고는 할 수 없을 초라한 판자집들이었으나 신 씨는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그 마을에서는 누구도 일본말을 쓰지 않았다. 제집에 온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매일 그 마을을 방문하였다.

 27살이 되었을 때 신씨는 고향으로 돌아가 예쁜 새댁을 데리고 왔고,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자그만 판자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행복하였다. 그 무렵 일본은 패전하였고 마침내 한반도는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신 씨를 비롯하여 모두가 만세를 외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들은 서로 앞 다투어 부산행 배에 올랐다. 전쟁이 끝났을 때 240만 명 가까이 있었던 재일 조선인들이 60만 명 정도를 남기고 모두 돌아갔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싫어하였는가 하는 증거였으리라.

 신 씨도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짐도 먼저 보내고 곧 출발하려고 하였을 때 어린것이 병이 났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데리고 뱃길을 갈 수는 없었다. 일본인들의 환향 배를 이용하거나, 비합법적 루트로도 많은 사람들이 귀국했으나 이번에는 아이가 태어났기에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일본에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무렵 그는 가족을 데리고 귀국선에 올랐다. 그사이 38도선을 경계로 나라는 두 동강이 났다. 한반도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피로 피를 씻는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들도 남을 지지하는 거류민단과 북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 련맹(이하 조련)으로 갈라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상적인 나라 만들기를 추진한다는 북을 지지하는 조련에 거의 모든 재일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때까지 천대받고, 민족적 차별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말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 평등, 만민이 차별이 없는 지상낙원, 사람들은 이 말을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신 씨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을 데리고 공화국에로의 귀국선에 올랐다. 아내는 싫어하였으나 그가 밀어붙였다.

 이 배를 같이 탄 사람들 모두 얼굴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공화국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기대와 희망에, 얼굴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단장으로서 거느리고 가는 신 씨는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는 단장이라는 이유로 선실은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특별실을 사용하였고, 식사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먹었다. 북에 도착한 후 초대소에 가서도 그러하였다. 좋은 방에 고급 술과 과일, 과자 등 빠지는 것이 없었다. 신 씨는 일본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대접에 당황하였다. 같이 온 귀국자들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이제 2〜3일이면 초대소를 떠나게 되는 날, 역원이 당황해서 달려와서, 청년들이 무엇인가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신 씨에게 말했다. 청년들은 왜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지를 않느냐면서 단장인 신 씨에게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신 씨는 사과 했으나 그들은 일본에서 듣던 이야기와 여기에 와서 본 것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모두 불안하고 초조해 하고 있었다. 다음날 제각기 갈 곳이 발표 되었다. 신 씨는 자기가 인솔하여 온 1,300명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의 집은 아파트였고 방 2칸에 부엌과 좁은 세면장과 화장실이 있었다. 여덟 식구에게는 집이 좁았다. 열은 무연탄을 피워서 얻었는데 이는 굉장히 고된 일이 었다. 오랫동안 불과 씨름을 하다 보면 일산화탄소가스 중독을 일으켜서, 토하고 심한 두통을 호소하였다. 원래 말수가 적은 아내는 아예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충격으로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염려해서인지 맏딸은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방긋 웃고 있는 그녀를 보는 신 씨의 가슴은 송곳으로 쑤시는 듯 아팠다.

 어느 날, 신 씨는 길에서 단장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새까맣게 볕에 탄 낯모를 사나이가 서있었는데, 그는 같은 배로 온 김 씨였다. 놀라움과 그리움으로 눈물이 나오려는 신 씨는 그의 안부를 물었는데 김 씨는 같은 도안에 있는 탄광으로 갔다고 했다. 일이고 무엇이고 다 말이 아니지만 제일 곤란한 것은 식량이라고 했다. 특히 대부분 콩을 주는 데, 그것을 먹으면 설사를 하고, 위가 상해, 간이 나빠졌다고 했다. 이에 그는 병이 나서 도 병원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왔다고 했다. 신 씨는 앞이 캄캄하였다. 자기가 데리고 온 1,300명의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으로, 밤잠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생각 할수록 이는 자신의 불찰이었다. 공화국의 선전에 작은 의심도 품지 않았던 조총련이 너무 경솔하였던 것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것은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올 것인가. 조총련은 재일조선인들에 대해서 당치도 않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은 남조선 출신이다. 그 고향을 버리고 북으로 가도록 한 것은 조총련인 것이다. 그는 김씨를 만난 지 3일 만에 사무실에서 고뇌하다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향년45세. 청진에 상륙하여 4달 후 그는 비탄 속에 숨졌다.(계속)

※ 『북한인권』188호. 2014년 6. pp.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