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 – 1

일본에서 북으로 간 이야기①

(편집자) 이 글은 일본에서 북으로 간 가와사키 에이코(경희)님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왜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후 왜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삶을 통해서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얽히고 설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품으로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

일본에서 ‘지상낙원’으로

 니이가타 부두에 정박한 두 척의 소련선박, 구리리온 호와 또보리스크 호에는 남녀노소, 온갖 표정을 한 사람들이 가득 올랐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온갖 인사말들이 오고가는 항구는 문자 그대로 환희의 도가니였다. 두 척의 배에 오른 수 천 명의 사람들, 부두에 남은 수 만 명의 사람들,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창창한 앞길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들은 일본을 떠나서,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 일을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하고, 억압과 천대의 땅에서 '지상낙원'으로 간다고 기뻐했다.

경희는 배당된 1등 선실에 짐을 두고 갑판으로 나갔다. 그녀는 사람들과는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이미 수평선으로 사라진 니이가타 항을 향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일본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공화국이 보인다! 공화국이다!' 큰 외침소리와 함께 배가 북한 청진항 부두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꽃다발을 흔들며, 목청껏 환영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우리들은 입국수속을 하는 청진과 함흥으로 가기위해 넓은 건물 안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경희는 함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밝아진 창밖으로, 난생 처음 보는 조국의 산천에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풍경은 문자 그대로 황량했다. 그 산에는 나무가 없었는데, 안내원은 이것이 일제와 미제 놈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곳 역전에서도 악대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청진에서 함흥으로 오는 사이, 조국이 일본에서 듣던 이야기하고는 다르다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숙소는 역전 가까운 곳에 있었고 꽤 깨끗하였다. 정전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일본의 밤에 익숙한 귀국자들에게는 상당히 어두웠다. 그 곳에서 개개의 면접을 비롯한 15일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15일 간의 생활은 매우 바빴다. 2~3일에 한 번씩은 공장, 농장 등을 견학하고, 저녁에는 극장에 가거나 연극, 조선식 오페라 등을 보았다. 그 외의 날에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면접이 반복 되었고, 오후에는 여러 가지 회의들이 있었다. 귀국자들이 숙소 밖으로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숙소에서의 생활이 10일 쯤 지났을 때 나라에서 보조금이라는 것이 나왔다. 1인당 어른은 20원, 어린이는 10원이라고 하며 10원짜리를 2장 받았다. 갈색 나는 허술한 종이로 만든 지폐였다. 경희는 이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후에 청년들이 광장 저 쪽에 있는 상점가에 가서 돈을 써보자고 경희에게 제안하였다. 원래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모두 각각 학생청년부의 임원들이니 접수에서 눈감아 주었다. 그들은 급히 광장을 가로질러 상점가로 들어갔다. 된장, 간장 등을 파는 식료품 상점, 의류 매점, 신발, 화장품, 문방구, 잡화 매점 등 여러 가지 있었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질이 나빠 사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식당으로 가서 무엇인가 먹어보자고 하여 식당으로 갔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게도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외식을 하는 경우, 자기 직장에서 발행 받은 '량권'과 돈이 같이 필요하며, 그만큼 식량 배급표에서 공제된다고 한다. 즉 누구도 한 끼에 200g이상의 식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가슴에는 조금씩 일본에서 들은 것 하고는 상당히 다르다는 의혹의 검은 구름이 퍼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 청년들에게 회의실에 빨리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던 숙소 직원들이 험악한 얼굴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 청년이 김 일성장군의 항일전투 모습을 그린 유화를 발로 짓밟아서 박살을 내 버렸다고 한다. 그들은 범행을 저지른 청년을 따로 학습시키고 있다 했으나 그 후 두 번 다시 그 젊은이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15일 지난 후, 거의 모두가 밤차를 탔다. 출발 직전까지 본인들도 자기가 어디에 가는지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이제 앞으로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경희는 학교에 가게 되어 그곳 선생님과 학생 두 명이 마중을 왔다.(계속)

※ 『북한인권』187호. 2014년 5.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