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일본에서북한으로, 다시 한국으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다시 한국으로

  김 철 윤(가명)
2008년 4월 한국 입국

일본에서 북으로
나는 조총련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인 1963년 일본에서 태어나 유치원부터 조총련 산하 중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받으며 북한을 유토피아처럼 생각했었다. 김일성 세 글자만 들어도 눈물이 났고, 북한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김일성이 화면에 나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립박수를 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토목공사 사업을 하여 잘 살았고, 우리가 살던 시에서 시의원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조총련이 생기며 사상이 변해 모든 마음이 북으로 쏠렸다. 자신의 기업을 친구한테 넘기고 그 돈으로 조총련 학교를 지을 정도로 열성이었고, 조선인연맹의 초기부터 간부로 활동하였다. 나는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셔서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북한으로 귀국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뻤다. 1976년 내 나이가 만 13살 때, 태어난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그 당시 직책은 재일조선인총연합회 명예고문위원장이었다

북한에 도착해 초대소로 갔는데 귀국한 사람들이 북한을 보고 너무 실망하여 모든 것이 할아버지 책임으로 되어, 귀국자들에게 할아버지가 맞아죽을 뻔했다. 할아버지는 평양시 평촌구역에 사는 것을 승인 받았지만, 큰아버지는 1년 전 먼저 귀국해 황해도 신촌에서 살고 있어 가족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할아버지는 평양을 포기하고 황해도에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귀국하신지 1년 만에 돌아가시자 큰아버지는 나에게 일본에 계시는 부모님께 필요한 물품을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계속 쓰라고 했고, 일본에 있는 아버지는 물건을 계속 보내줬다.

학교 다닐 때도 애들과 키 차이가 많이 났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 놀렸는데 조선에서는 애들이 ‘쪽바리’라고 놀렸다. 나는 그 때 키가 커서 배구를 했었다. 해주에 있는 체육기관에서 나를 스카웃 해갔다. 그 이후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체육단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농구를 하며 2년 있었다. 그러다 나도 대학 졸업할 때 세이코 시계를 대학 담당에게 주었더니 바로 대학교원으로 가서 체육학과 1년을 맡았다. 이때가 1984년이고 결혼도 했다.

결혼하고 해주에 살고 있을 80년대 초, 일본에서 가져온 TV를 켰는데 나훈아, 조용필이 나왔다. NTS TV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해주에서 한국 프로그램이 나온다. 외국 영화로는 토요명화극장을 보기 시작하고 한국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여자 배구팀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총장이 승인을 해 주지 않아 대학을 그만두자 혁명화를 당했다. 그 때가 1986년도였다. 대학을 안다니겠다고 하니 도당 행정간부에서 나를 불러 비판서를 쓰라고 했다. 자아비판 하고 보름이 지났다. 그래도 ‘무조건 교원 해라, 안하면 광산으로 보내겠다’ 했다. 죽어도 안 하겠다 했더니 결국 해주항으로 보내졌다. 해주항에는 몰타에서 린(광물)이라는 형광물질을 실고 왔었는데 몇 만 톤 배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나르는 일을 주야 3교대로 했고 그야말로 강제노동이었다. 대학교원을 하던 사람이 가서 삽질해야 하니 그것이 혁명화였다. 그곳에서 20일 일하고 나니 황해도 앞 쪽 영매도라는 섬으로 보냈다. 북한 초기 외화벌이를 위해 대성무역이 생겼는데 그곳에서 대합조개를 엄청 많이 캤다. 대합이 너무 많아서 먹을 생각도 없었다. 대합 1톤에 흑색 텔레비전 한 대의 값이었다. 그 때 조선 노동당이 돈을 엄청 벌었다. 1986년에 다시 대학으로 갔을때 남조선 삐라를 처음으로 봤었다.

삐라에는 아가씨가 비키니 입고 ‘서울로 오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김일성 독재정권에 속지 마라’고 쓰여 있었다. 황해도에는 삐라가 엄청 많이 와 밤낮으로 삐라 주우러 다녔다. 그 때는 사람들이 삐라를 보지도 않았다.

1999년까지 그런대로 유지했는데, 자식들이 대학을 가기 시작했다. 큰애는 평양 의과대학, 작은애는 김일성종합대학에 보냈다. 내 처도 사범대학 나왔고 나도 사범대학 출신이다 보니 아는 사람들이 학교에 많았다. 큰애는 의학부를 원했는데 당 간부의 자식이 아니라서 약학부에 배치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500불을 중앙당에 줘서 기초의학학부로 바꿨다. 작은 애는 1000불 썼다. 둘째가 입학 할 때도 북한 대학 입학 가격이 정해져있었다. 지방학생이 중앙대학에 가려면 최소 1500불, 평양학생은 최소 3500불이 있어야 평양에 있는 대학을 갔다. 애들이 농촌지원 나간다면 예전에는 국가에서 쌀을 대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개인이 쌀과 옷 등을 모두 준비해야 하고 교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돈도 내야한다. 심지어 농촌까지 가는 차량을 학생들 돈으로 준비해서 농촌지원을 나간다. 아이들은 힘들게 보내주는 200불 가지고 겨우 한 달을 생활한다.

지금 김일성종합대에서 학부별로 줄서서 나오는 것 보면 학생들이 교복은 입지도 않고, 청바지는 안 되니까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가슴에 크게 영어로 ‘adidas' 라고 적혀 있는 옷도 입고 다닌다.

나는 국가과학원 정보과학 통역실에 있었다. 내가 일어, 중국어, 영어를 하니까 번역일이 기본이었다. 외국의 과학 서적을 조선말로 바꾸는 일이 나의 주 업무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북한의 과학원은 거의 마비상태였다. 돈이 없어 외국에서 책을 살 수가 없고, 과학자들은 실험을 할 수가 없다. 그곳에 있을 때 김일성이 핵을 성공했다는 말을 들으면 과학자들이 ‘플루토늄 1키로, 2킬로를 가지고 뭘 찍어대냐. 분명 빈껍데기만 있다’라고 말들을 한다. 들리는 소문에 젊은 과학자들 30명이 핵 실험을 준비하다 방사선에 오염되어서 죽었다고 했다. 핵실험 과학자들은 장군님께 드리는 충성의 맹세문을 처음에 쓴다. 죽어도 괜찮다는 내용이다. 과학자들 사이에 인공위성 하나면 황해도가 몇 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었다. 과학원에서는 할 일도, 연구 할 일도 없어 화학품 연구자들은 금광에 가서 전광석을 자기 돈으로 사서 전기로 녹여 금으로 만들어 팔곤 했다. 연구소에는 중간공장노동자까지 100명, 연구자 집단만 30명 있었다. 연구소는 해주시 해운동에 있다.

외화벌이
힘들어 지자 국가과학원을 그만두고, 마침 북한에서 달러 바람도 불고하여 외화벌이를 시작했다. 원산 쪽으로 일본 중고차가 많이 들어오는데 중앙당 문화지도부 소속에 국사봉이 있었는데 한 귀국자가 그곳에서 차장으로 있었다. 남포와 원산에 지점을 두고 중고차를 가져다가 차 판권을 김정일 승인을 받아서 팔았다. 나도 2500불 주고 2.5톤 트럭을 샀지만 망했다. 그리고 잣을 남포에서 중국에 내다 판다는 말에 나는 밀수선을 탔다. 2006년 처음으로 잣을 실은 배를 타고 남포에서 직진해서 중국 영해로 넘어가 중국 단동으로 갔다. 그 때가 10월 10일 전이었다. 보통은 북한 경비정들이 연료가 없어서 추적도 못하는데, 명절 전 뒷돈을 벌기 위해서 단속이 심해 우리 배가 단속되었다. 경비정 간부가 중국 갔다 들어오는 길에 꼭 들렀다 가라고 하면서 우리 배 허가증을 가지고 갔다. 배를 타고 중국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대개가 유산층이다. 그 사람들은 탈북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탈북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중국 영해에 들어와 북한 배를 정박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중국 배를 타고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나는 중국 땅에 내려서는 순간 하늘에서 준 기회라 생각했고 도망가고 싶었다. 장사도 잘 안되어, 같이 갔던 사람한테 돈을 다 주고 ‘나 여기 중국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우리 타고 왔던 배에 4명 정도 있었는데 이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일본에 친척이 있으니 중국 상인들도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기 있으라 했다. 그리고 중국 상인의 전화기를 빌려 일본 이모께 전화하니 크리스마스쯤에 중국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때가 11월 중순이었다. 그런데 같이 갔던 배 사람들이 ‘보위부에 바로 자수하겠다, 그러니 나오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귀국자는 돈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서 돈을 뺏어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중국 상인이 ‘그러지 말고 가라, 갔다가 다른 선으로 해서 와라’ 하여 결국 다시 북으로 들어갔다.

북에 도착하자 배 사람들이 협박이 들어왔다. 이들은 국가에서 공인 승인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없었다. 보위부에 ‘당신이 우리를 속이고 중국에 있었다고 말하겠다, 1,500불을 달라’ 했지만 당시 나에게 4,5백 불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크리스마스 때 중국에 오시겠다 해서 중국에 가고 싶은데 협박은 들어오고 정신이 없었는데 남포시의 어떤 분의 도움으로 해서 숨을 수 있었다. 그때가 2006년 겨울인데 홍역이 돌았다. 평양에 갔다가 상황이 좋지 않아 다시 돌아섰다. 다음 해인 2007년 5월 1일에 살던 곳을 떠나 회령을 통해 5월 4일에 탈북했다.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강을 건너 어떤 사람 집에 있으면서 일본에 전화해 ‘중국에서 살겠으니 돈을 보내달라’ 하고 기다리다 5월 14일(일요일) 10일 만에 잡혔다. 그런데 그 집이 전문으로 조선여자를 인신매매 하는 집이였고 마약도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공안이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던 집에 숨어있게 되어 재수 없이 잡히게 되어 취조 받고 사진 찍고 족쇄 채우고 바로 연길 간수소의 외국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사슬이 두꺼운 족쇄를 발에 채운 것이다. 그리고 볼트너트를 꽉 조였다. 15일을 차고 있었다. 걸어 다닐 때마다 발목이 다 까졌다. 20일 정도 있다가 도문 변방대로 옮겨졌다.

도문변방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사람들을 줄을 세우고 남녀 상관없이 한방으로 몰아넣었다. 나이는 3, 40대, 아줌마들이 대부분이었고, 21살짜리도 있었다. 남녀가 같이 있는 방에 간수들이 곤봉 들고 서있고, 간수하나가 고무장갑 끼고 옷 벗으라 했다. 이때 항문 검사하는데 장갑을 바꾸지도 않고 여러 사람 검사를 했다. 이때 돈도 다 빼가고 벨트도 다 빼간다.

도문에서 간수들이 밤마다 여자애들을 끌어내어 안마시키고 농간하고 보낸다. 어떤 때는 대낮에도 끌어낸다. 조사실에는 창살과 의자가 있는데, 심문하는 사람들은 창살을 사이에 두고 심문한다. 간수들은 대낮에 여자들 그곳으로 끌고 가서 아랫도리를 벗으라 한다. ‘속옷도 다 벗고 뒤로 돌아 앞으로 봐’ 하면서 본다. 거기서 20일 있었다. 2007년 육육절 날 나와서 남양으로 보내졌다.

지옥 같은 보위부
세관에 도착해 중국공안이 수갑을 풀어주고, 북한의 인계받는 사람들이 그때는 ‘수고했다, 고생 많았지’ ‘남양 여관에서 밥먹여 줄게’ 하고 상냥하게 대해준다. 중국공안이 문건을 넘기고 그들을 태운 차가 교두보 떠나는 순간, 군복 입은 보위부 군관 하나가 와서 우리를 발길로 차고 열 명이 모두 사슬로 연결되는 수갑을 채우고 무조건 때린다. 그리고는 안으로 몰아넣고 신발 벗고 무릎 꿇고 앉힌다.

제일 먼저 중국 가서 에이즈 걸려 왔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귀에 열을 잰다. 그런 다음 우리가 군부대 가족인지를 본다. 군부대 가족이면 바로 보위사령부로 넘어가고, 군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면 일단 자기 주거지를 말하고 여자 남자 족쇄 채우고 차에 싣는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짝이다.

6월6일 저녁으로 온성보위부로 향했고, 다음날 새벽 두, 세 시에 도착했다. ‘고개숙여’하면 고개를 숙이는데 잠시라도 머리를 들면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막 때린다. 수갑채운채로 내려서 보위부 건물 앞에 네 시간 정도 세운다. 나는 키가 크고 수염도 못 깎고 옷차림도 그렇고 해서 나에게 집중되었다. ‘넌 뭐하던 놈이야?’ 물어서 ‘황해도에서 왔다, 외화벌이 했다’ 하면 막 발로 찬다. 굴욕감이 말도 못한다. 보위부가 디지털카메라로 우리 사진 찍어서 컴퓨터에 저장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디지털카메라가 무엇인지 몰라 뭐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때 보위부원들이 사진이랑 문건이 컴퓨터에 입력되어 이제는 너희들 큰일이라고 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지도원이 ‘가라’ 하면 남녀 묶인 채로 간다. 남자는 그렇다고 해도 여자가 어떻게 손이 묶인 채로 칸에 들어가서 볼일을 볼 수 있겠는가? 나랑 같이 탈북 했던 아줌마가 생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가 같이 묶여있는 남자보고 ‘눈 감아요 아저씨’ 하며 앉아서 생리를 갈아야 하는데 그 상황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젊은 보위부 애들은 그것을 보고 웃는다. 그게 인간인가 싶었다.

온성 보위부에서는 심문을 안했다. 온성보위부에서 물자를 싣고 컴퓨터 모니터도 싣고 종성보위부로 갔다. 종성보위부에는 어두울 때 도착했다. 여기서도 여자들은 옷 다 벗고 펌프질 시키고 옷이나 짐을 다 뒤졌다. 밤에 보위부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사무실에 한명한명 불러서 이름, 직업, 거주지, 잡혀온 날을 간단히 심문한다. 간수가 ‘이제부터 너는 이름이 없어. 네가 1번이다. 알았나?’ 한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나가야 한다. 종성보위부 건물이 기역자형이다. 5미터 이상 판자로 된 울타리가 있다. 그것이 옥사이다. 가축을 기르는 곳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건물 하나 있고 건물 끝은 차고이고 그 옆에 창고가 있다. 긴 건물 안에 옥사가 있다. 거기 조그만 방이 있는데 옷을 다 벗긴다. 무릎꿇고 앉아서 벽을 보고 있는다. 간수들이 우리 혁대 다 빼고 고무줄 까지 다 뒤져보고 옷 검사한다. 돈이 없으면 맞는다. 난 혁대로 죽어라 맞았다. ‘혁대 누구꺼야?’ 물어봐서 ‘제껍니다’라고 대답하면 ‘간나새끼 어디 눈을 깔아’하면서 엄청 맞아 피도 났지만 그때는 무서워서 아픈 것도 몰랐다. 두시간 앉아 있었다. 그 때가 새벽 12시 - 1시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 옷 벗은 채로 옷을 들고 복도로 나간다. 간수가 먼저 들어가서 개구멍 같은 입구로 가서 ‘들어가라’ 하면 방으로 들어간다. 폭이 일미터 팔십인 방인데 거기서 많으면 18명이 있는 경우도 있다. ‘목욕시키라’ 하면 변기옆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거기서 쪼그리고 앉아 씻는다. 수건을 주는데 사람들이 목매지 못하게 수건을 절반만 잘라 준다. 씻는 것은 이가 생길까봐 위생상 아침마다 씻게한다. 

조사는 밤 10시, 11시에 부를 때도 있다. 밤에 여자들은 엄청 끌려가서 강간당하고 새벽 1시, 2시에 들어오면서 온다. 보위부 안에 있다 보면 시각, 청각이 발달해서 누가 나가는지 다 안다. 잠결에도 여자들이 나가는지 알 수 있다. 간수들이 여자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강제로 강간한다. 방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서러워서 우는데 간수들이 와서 운다는 이유로 족쇄 채워 때린다.

조사는 낮에도 부르고 밤에도 부른다. 유독 나만 키가 커서 그런지 발에 8미리 두께의 철로 바구니를 만들어줬다. 약 40~50cm정도 크기의 원형틀 이였다. 발 내밀면 그 바구니를 종아리부터 무릎 위까지 채웠다. 무릎을 굽힐 수가 없었다. 그걸 차고 쩔뚝거리며 조사실에 나간다. 내 조사 담당이 소장이었다. 심문실이 따로 없고 소장 사무실로 갔다. 심문을 받을때 의자 등받이가 앞쪽으로 하고 앉는다. 아마도 등을 때리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족쇄를 의자 틈에 끼워서 참나무 몽둥이로 때린다. 1m 20cm 정도 길이에 지름 5cm 정도 두께의 몽둥이다. 내가 질문에 인정 안할 때는 엄청 때린다.

처음 조사 때는 소장하고 일대일로 앉아서 묻고 답하면서 때리지는 않았다. 주로 하는 질문이 한국하고 접촉했는가, 일본하고 했는가, 일본이나 한국 가려고 했는지 물었다. 그러면 나는 무조건 아니라고 했다. 일본 영사관에 전화했었는데 그걸 절대 말 안했었다. 같이 잡혀갔던 여자도 내가 그랬던 것을 말 안 해줬다.

두 번째 조사부터 맞기 시작했다. 소장은 앉아 있고 소장이 ‘야’ 부르면 사람이 밖에서 두 명이 들어와서 뒤에 서 있는다. 소장이 ‘너 한국 사람들 안 만났어? 남조선 사람들 안 만났어?’ 하고 ‘아닙니다’ 하면 맞는다. 뒤 양쪽에서 때리는데, 쇠꼬챙이를 달궈서 때린 느낌이다. 조사는 한, 두 시간 정도 한다. 한번은 소장이 젊은 놈 불러서 책상에 손대고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때렸다. 중국 상인하고 얼마나 만났는지 계속 물어보는데 답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막 때린다. 최상의 고문은 몽둥이로 맞는 것이다. 종성지구에 사는 애들은 안 맞는다. 소장이 마지막에 나보고 핸드폰을 꺼내면서 ‘일본에 전화해라, 전화하면 돈을 보내줄 수 있어?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하지 왜 강을 넘냐? 보위부가 머저리 같아?’라고 말했다. 쉽게 설명하면 앞으로 또 잡히면 큰일이니 일본에 전화해서 돈을 가져 올 수 있으면 소장에게 이야기 하라고 했다. 소장은 65세 정도 되었는데 소장은 안 때리고 호통만 친다. 거기서 6월 6일부터 7월 22일까지 있었다. 조사는 일주일동안 받았는데, 무소식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종이와 나무 판대기를 주면서 비판서를 쓰라고 한다. 다른 때는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지만 조금 움직일 수 있는 비판서 쓸 때가 편하다.

식사는 옥수수 눈하고 썩은 콩인데 한 끼가 숟가락으로 눌러 딱 세 숟가락 정도 나온다. 국은 멀건 된장국인데 흙도 씻지 않은 무 밑뿌리만 넣은 것, 배추도 꼬리만 넣은 것을 준다. ‘야 1번 배고파?’ 하면 ‘예’ 하면 조금 더 주기도 한다. 눈물이 난다.

간수에 따라 운동시간을 주기도 하고 아예 안주기도 한다. ‘야 일분 쉬라’ 하면, 그 자리에서 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지 일어나지는 못하게 한다. 소장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감방을 돌면서 항문 검사를 한다. 철장쪽을 뒤로 하고 옷을 벗고 엎드린다. 영양실조 걸리면 항문이 힘이 없어 열린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항문 검사를 했다. 소장이라는 사람이 일광욕을 시키는데 팬티만 입고 나오라 한다. 팬티는 한국말인데, 팬티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보위부원이 비가 오면 심수봉의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을 부른다. 보위부원들은 방에서 한국영화를 보는데, 남한 노래, 남한 영화, 남한 말까지 이제는 남한의 문화가 북한사회에 침투해 있다.

조사 한지 한 달이 지나자 심문을 안했다. 그 때 나는 영양실조가 걸려서 한쪽 눈귀가 안 들리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어느날 아침 나를 나오라하여 산책 시키면서 보위부원이 알사탕을 먹으라고 주었다. 그 때 나는 의식도 마비되고 오직 먹을 것만 찾는 식충이가 되었다. 간수와 둘이 있을 때 ‘선생님 나갈 수 있습니까?’ 물어봤더니 ‘응 나갈 수 있다’ 했다. 그리고 2007년 9월 20날에 나왔다. 나와서 족쇄 채우고 온성 보위부로 왔다. 나랑 남포 아줌마랑 무산에서 장사 한다고 갔던 부부 네 사람만 온성 보위부에서 3일만 있다가 나오라 해 보안서에서 담당관이 와서 데려갔다. 그길로 청진 도집결소로 가 그곳에서 20일 있었다. 그 다음에 담당 보위원과 그 처가 와서 일주일동안 간식을 넣어주었다. 이곳에서 단련대 6개월을 받았다. 돈을 또 찔러줘서 단련대 안 가고 10월 말에 모든 것이 다 끝났다. 나온 후에 보니 처가 아들 친구 중 보위부원인 사람이 있어 돈을 주고 빼낸 것이다.

보위부에서는 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보안부에서 문건 읽어보더니‘ 너 굉장하구나, 너 이제 죽었구나’ 했다. 이대로면 최소 6년이라고 했는데, 담당 보안원이 문건을 다 불태웠다.

보위부에서 나와 집에서 생활하는데 하루에 두 번씩 전화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찾아와서 직접 나를 보고 하면서 감시가 심했다. 그리고 보위부원들이 자기 생일이나 가족 생일 등이 있으면 찾아와서 금품을 요구했다. 처음 한 두 번은 돈을 주었는데 자주 찾아오니 생활이 힘들어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일본대사관에 전화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위부 감옥에서 말하지 않았으니 댓가를 달라며 협박했다. 다시 잡혀갈까봐 불안하기도 하고 가족걱정에 감옥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도강하기로 하고 2007년 12월 27일 사리원에서 출발하여 2008년 1월 4일 중국으로 넘어가 연길에 있는 교회로 갔다. 그 곳에서 조선족 전도사를 만나 도움을 받아 북경을 거쳐 3월 5일 태국에 도착했다. 태국에서 약 한달 반 정도 있다 4월 25일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한국에 입국 후 보위부에서 맞은 것 때문에 허리고통이 심해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경추 4,5번 디스크가 나갔다. 지금도 손 떨림이 없어지지 않는데, 심장이 나쁜 건지 모르겠다. 심할 때는 손톱도 못 깎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