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인간 세상 속에서 죄수도 인간이다

[증언]

 

인간 세상 속에서 죄수도 인간이다
 

김 혁 (탈북청소년, 제12호 교화소 경험자)

출생 및 어린시절

나는 1982년 1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형 네 식구였습니다. 내가 네 살이 되던 1985년에 어머니께서는 무엇인가를 잘못 드셔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12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굶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로 나는 형과 함께 함경북도 고아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1998년 4월 고아원을 졸업했습니다. 고아원에서 지내는 4년간 하루에 320g 정도의 영양분이 하나 없는 옥수수밥과 다꽝 같은 것을 물에 끓여서 만든 국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반찬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고아원에는 70~8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고, 그 안에 학교가 있어서 고등중학교까지 마쳤습니다. 4년 정도를 이렇게 고아원에서 보내고 나왔을 때의 내 나이는 16세였습니다.

고아원을 졸업한 나는 림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갱목 만드는 일을 하였고, 나무를 베기도 했는데 약 6개월 정도 일을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일을 그만둔 후로 먹을 것이 없어서 중국을 넘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여자를 통해서 넘어갔고 그 이후로는 수도 없이 중국과 북한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수없이 굶어 죽던 시기라 나로서는 생계를 유지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98년 초겨울 나는 회사를 다니던 형에게도 같이 가자고 해서 형과 함께 중국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연길로 넘어가서 주로 과수일이나 농사를 도와주면서 잠자리도 제공 받고, 돈도 조금씩 받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안들이 자주 검사를 나오기 때문에 한 달 이상씩은 중국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함경북도 안전부 어느 한 구류장에 가다

그런 생활을 하던 1998년 11월, 나는 비법월경 혐의로 구류되었습니다. 구류장에 있던 사람들의 70~80%는 비법월경 혐의였고, 나머지 20~30%는 경제범이나 살인범이었습니다. 모두 10개의 감방이 있었고, 매 감방에는 보통 10~2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류장에서 지내던 어느날 오후, 계호원이 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직 17세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행여나 감옥에서 나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기대와 달리 머리를 깎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의 머리에는 이와 서캐가 많이 끼여 있었고, 계호원들의 교정보다 서캐나 이, 벼룩의 교정이 더 심한 정도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똑바로 앉아서 손을 무릎 밑에 넣고 있어야 하므로 벼룩이나 이들이 마음대로 기어 다녔습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해도 계호원들의 눈에 들키면 온 하루 벌을 서고 매까지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머리를 깎으려고 했고, 나도 시원한 마음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깎는다는 것 자체는, 나도 이제는 죄수이며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이라는 증표이므로 마음은 침침하고 괴로웠습니다.

구류장에서 나는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데다 폐렴까지 겹쳐 방안에서도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식사시간에 누가 나의 밥을 옆에서 덮쳐가도 그를 때릴 힘도, 욕할 힘도 없었을 정도 였습니다. 그 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생에 대한 미련이었고 더 강렬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17살 나이에 죽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이대로 한 많고 저주스러운 곳에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러던 3월 어느날, 나는 재판을 받았고, 9개월간의 감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온성 감옥생활

1999년 3월 24일부터 11월 중순 경까지 온성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누구나 감옥이라면 수치스러운 곳이라 생각할 뿐, 그 외의 생각, 즉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드뭅니다. 하지만 내가 본 감옥 생활을 인간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곳은 사람을 처량하고 힘들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현실을 맞닥뜨리고 보니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에 부딪혔습니다. 북한 같은 곳에서는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은 사람까지도 죄를 모면해줘야 할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 인권을 박탈당한 감옥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천대와 멸시가 뒤따랐습니다. 옛날 같으면 범죄인을 보고 침을 뱉거나 피했지만 지금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너무나도 퇴소자들이 많다 보니, 누구나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며 동정의 눈빛을 보내고 계호원들 몰래 먹을 것이라도 건네주곤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네 발로 기어서 가야했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도 벽을 잡지 않으면 일어서기가 힘들었습니다. 390g밖에 안 되는 강낭이 껍데기 밥을 먹어야 했고 국까지도 맹물에 염장 무우 몇 조각을 동동 띄워놓고 주는 것 고작이었습니다. 그 감옥에서는 누구나 세 달이면 허약자가 되었고, 네 달째 부터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정신적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100%중 90%가 허약자였습니다.

그들은 몸과 함께 마음까지도 허약해 졌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허약자라고 하면 그저 몸이 약한 사람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약자들의 다른 심정까지는 다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심정을 겪어보지 못하고는 그들의 마음 속 고통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최악에 다달은 그들의 심정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 힘든 경험을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땅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제쳐 놓고 일단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됩니다. 먹을 것 조차 없어 굶주리는 범죄인들, 그들도 인간입니다. 그들에게도 사랑이 있고, 양심이 있고, 도덕이 있는, 두뇌를 가진 인간입니다. 단지 악한 흐름 속에서 악하게 살아나야 한다는 잠시의 마음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고발하여 계호원들에게 먹을 것을 얻어먹는 행동을 하는 것도, 그들이 막다른 굽이에 이르렀기 때문에 택하게 되는 최후의 생명 유지 방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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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도 전거리 제12호 교화소

1999년 11월 경, 나는 3년 형을 받고 함북도 전거리 제12호 교화소로 갔습니다. 6개월만에 입소하러 가는 길이었고, 12명이 함께 갔습니다. 우리는 본소 앞에 있는 숙직실에 들어갔고, 계호 책임자가 가지고 있는 영수증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범죄를 지었기에 인간이 아니므로, 물건처럼 영수증으로 인계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범죄하게끔 만든 정권이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다니, 끝없이 저주스러웠습니다. 사람을 범죄자로 만든 것이 누구인데 자신들의 잘못은 찾지 않고 불쌍한 백성만 죽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여기에는 단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굶어죽느냐, 범죄를 해서라도 살아가느냐.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제도에 중독된 이들을 내놓고는 범죄라도 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후에는 어떻게 되던 지 바쁜 목을 열어야 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마지막 본질입니다.

그래도 교화소에서는 강낭쌀에다 콩을 넣어주기에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교화소 밥은 일명 가다밥이라고 하는데 서람밥을 가져다 콩과 함께 섞은 다음 고뿌만한 틀로 찍어서 공평하게 만든 덩어리 밥이었습니다. 국은 모래가 많은 염장 무우국이었습니다, 그 무우마저도 제대로 썰지않아 통째 둥둥 뜰 때가 보통이었습니다. 조절을 잘 못하다 보니 짜갑기도 했고, 어떤 때는 너무 싱거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맹물이었습니다. 밥은 너무 물이 많이 들어가고 딴딴하게 찍지 않아 그릇에 담기도 전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높이가 8~9cm정도 되었고, 7cm정도 직경인 둥근 원형밥이었습니다.

제12교화소에는 벌목반, 공무, 목공, 상하차, 건설, 낙후자, 창고, 차수리, 농산, 축산, 취사반, 병반, 신입반 등 있을 것은 다 있었습니다. 기본 생산품은 나무 절과, 가구, 성광가루, 가구목, 차부속 등 여러가지 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식량 때문에 교화소가 악화되고 생산량이 줄어 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미련마저도 떠나버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설사 살아서 나간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반겨 맞아주며, 나를 돌보아 주겠는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고, 사랑이란 말을 깨닫기도 전인 13살에 아버지는 사망하셨으니 나에게 의지가 되어 줄 만한 사람은 오직 형님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헤어진지 1년이 다 되었는데 그 큰 중국 땅 어느 곳에서 형을 찾는단 말인가 하는 마음에 몹시도 괴로웠고, 살기도 그렇게 달갑지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은 더욱 악쇠를 부렸습니다.

교화소에서의 생활은 7시부터 7시 30분까지 하루 총화를 하고 밥을 먹고 난 후 8시 경부터 학습을 하는데, 학습이란 생활 준칙과 10대 원칙 교화반 준칙을 모두 외우고 교화 신문을 독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잘하지 못해서 9시 10분 경부터 시작하는 선생님의 검열에 걸리면 온 교화반이 학습을 다시 해서 선생님한테 검열 받아야 했고, 검열에 걸린 사람은 난폭한 놈들한테 매까지 맞고 교화반에서 구박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지루한 교화소 생활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 해야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해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하게 가리워 앞이 보이질 않았고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언제면 교화소 정문을 나설는지 하는 생각이 항상 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억울한 교화 세상을 한탄하며 울었습니다. 내가 정말 도주 기도로 인정된다면 나는 말뚝감일 것이고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이 허약한 맘으로 1년 6개월 이라는 짧고도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너무나도 앞이 안보였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도 눈물, 힘든 일이 생겨도 눈물 그야말로 눈물의 지옥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떠나가신 부모님 생각, 행처 모르는 형 생각을 하며 잠이 들곤 했습니다. 행처 모르는 형은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까, 점점 흙이 되어간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까,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에 대한 섭섭한 막내의 마음이란 하늘을 찌를듯이 슬펐고, 눈물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형 어데 있니, 면회 와 봐, 죽기 전에 형을 보고 싶어. 죽어도 한이 없게, 형……” 이렇게 속으로 외치고 나면 다시 슬픔에 잠겼습니다. 형과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어느 하루도 슬픔에 잠겨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특대사로 풀려나다

2000년 7월 2일. 그 날은 나의 머리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대사령 집행일. 생각지도 않은 아침에 대사령이 발표된 것이었습니다. 보위과의 안전과 간부들이 모두 나왔고 대사령에 적용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끝날 때가 다 되어 가는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자 그 때 나의 심정이란 한마디로 말해 속상해서 재만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라-136, 뜻밖에도 내 번호가 불리워졌습니다. 그 때 대사령을 받은 교화생들은 약 1,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교화소의 1/3이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퇴소생 발령이 떨어진지 4일이 되는 2000년 7월 6일, 퇴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내 나이 22살에 이렇게 힘들고 고달프고 전혀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길고도 짧은 시간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았습니다. 그토록 그립던 바깥 세상에 나오니 참으로 감회가 깊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맘을 못 속이고 그런 맘은 한 편의 소설처럼 기록이 되니 무겁고 침침했던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습니다.

드디어 한국으로-마침내 찾은 자유

대사령을 받은 뒤, 다시 사회에 나와도 갈 곳이 없는 나는 또다시 몸을 회복할 사이도 없이 2000년 8월 11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갔습니다. 그 후로 북한에 3차례 넘나 들었고 그러다가 중국에서 한국 기독교 단체를 만나 기독교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신앙심은 대단했고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는 느낌까지 들곤 했습니다. 그 후 저를 보호해주던 집사님과 신앙을 심어주셨던 선생님의 권유로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국으로 가야하겠다는 결심은 보위부 감옥에서부터 계획한 것입니다. 나는 구류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앞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누구나 막굽이에 들어서게 되면 지나온 날과 앞으로 닥칠 자신의 앞날이 궁금해질 것이고 또 어떻게 나에게 닥친 이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나의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만약 사회에 나간다고해도 나는 의지할 곳도 없고 또 먹을 것이나 잠잘 곳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먹을 것을 가져다 줄 사람도 없었고, 잠자리를 제공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의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까지 겪은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육신적인 부담을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편하게 먹기도 하고 살수도 있고, 중국에서처럼 쫓기지도 않는 그런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같은 탈북자들을 받아주는 곳은 한국 이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말도 통할 것이고 같은 민족이니 잡아서 가두거나 이런 불쾌한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중국을 다니면서 한국으로 넘어갔다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나도 도중에 죽지 않는다면 모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1998년 초 부터 했던 이러한 생각들은 2001년 10월에야 겨우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2001년 7월 2일 나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한국을 향해서 출발했고 여러 나라 국경을 넘으며 마침내 2001년 9월 20일 경에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국정원에 도착한 우리는 조사를 거친 다음 사회 정착을 돕는 국가의 교육기관에서 두 달을 공부했고 그 후로는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수 없이 공포의 시달림 속에 살아온 나는 드디어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난 듯 싶고 신나게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