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은화 이야기 – 2

은화 이야기 ②

편집자 주: ‘은화이야기’는 2005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온 세 명의 탈북청소년 중 한 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다. ‘은화이야기’는 앞으로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과정, 중국에서의 생활, 남한 정착 이야기를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다양한 장사경험

나진 선봉에서는 정말 다양한 장사를 했다. 공장에서는 쇳줄을 많이 버리는데 이것을 주워 다가 못을 만드는 곳에 팔면 돈을 벌 수 있었다. 나는 20키로의 쇳줄을 짊어지고 선봉까지 두 시간정도 걸어서 날랐는데, 그렇게 하면 하루에 200원 정도 벌 수 있었다. 돈은 많이 벌 수 있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돈을 규모 있게 쓸 줄 몰랐다. 돈을 흥청망청 썼기 때문에 1~2년 후에는 돈이 다 떨어져 다른 장사꺼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나리를 팔기 시작했다. 산에서 미나리를 뜯어서 강에서 씻고 봉투에 넣어 25원씩 팔았다. 처음에는 장사가 정말 잘되어서 400~500원 정도 돈을 모을 수 있었지만, 점점 비가 많이 오면서 장사가 잘 안되자 많은 좌절을 겪었다. 그 뒤로 악착같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본격적으로 야채장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중국인들이 버린 페트병을 팔면 개당 10~20원씩 남길 수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장사를 하면서 한족과 연변사람들과 다들 친하게 지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나를 예쁘다고 잘 봐주었던 것 같다.

‘비파’라는 지역은 너무 추워서 보통 사람들이 10월까지만 일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겨울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미역을 받아다가 파는 일을 했다. 당시 내가 13~14살이었는데 20kg나 되는 미역을 짊어지고 다니며 일을 했다. 처음에는 미역을 짊어지고 다니다가 물이 흘러서 옷을 다 버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시장 할머니들과 많이 친해져서 리어카를 빌려 미역을 나를 수 있었다.

미역장사는 하루에 국수 한 그릇 값도 안될 만큼 돈이 남지 않아서 국수장사를 같이 했다. 국수를 가지러 가기 위해 뇌물을 주고 초소를 넘었고, 돈벌이 하는 화물차에 30원을 주고 타 은덕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은덕에서 나진 선봉으로 나르는 도중에 국수가 말랐기 때문에 역시 돈을 남기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수익이 있다는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킬로로 넘기는 장사로 시작했으나 사과는 하루가 지나면 수분이 빠져서 킬로가 줄어들어 수지가 안 맞았다. 사과를 한 개씩 정성들여 닦고 광을 내어 팔았던 기억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계속 할 수 없었다. 달리기(물물교환)도 했다. 칫솔, 치약 같은 것들을 나진 선봉에서 길주까지 가져가서 시세차익을 남기고 팔았다. 이 장사는 수지가 맞았지만 그것도 한 때에 불과했다. 엿을 팔기도 했다. 킬로 당 45월 씩 팔았는데, 쌀이 킬로 당 59원이었으니 수지가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장사하던 청진에는 엿 장사가 워낙 많아서 39원씩 밑지고 팔 수 밖에 없었다.

엿을 팔다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여러 친구들과 엿을 넘겨받아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오후 4시 즈음이었는데, 보통 그 시간에는 선봉으로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을 수 없었을 뿐더러, 계단에라도 자리를 잡으면 영광일 정도였다. 어렵사리 계단에 자리를 잡아 엿이 담긴 배낭을 계단 옆에 묶었는데, 문뜩 지나고 보니 같이 갔던 한 오빠의 배낭이 잘려나가 있었다. 알고 보니 꽃제비들이 600백 원 정도하는 엿 덩어리를 잘라간 것이었다. 엄마에게 혼날까봐 우리더러 돈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 오빠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14살 되던 해 겨울에는 꽃 파는 송월과 은주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은덕에 들어가 돼지 한 마리를 사서 해부를 했다. 팔 수 있는 것들은 빼내고 남은 것들은 우리가 먹었더니 고기가 몇 십 킬로 정도 나왔다. 나와 송월이 돼지고기를 나눠들고, 은주가 머리와 피를 들고 도시락을 싸서 기운을 내 초소까지 걸어 나왔다. 돼지고기를 들고 초소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아 새벽을 이용해 12시에서 1시 즈음 나왔다. 마침 중국에서 들어온 돼지 전염병 때문에 돼지고기 단속기간이어서 초소에 군대가 있었다. 초소를 건너는 도중 들켰으나 나는 우는 연기를 했고, 다행히도 돼지고기 5키로 정도를 주고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1킬로에 179원했던 돼지고기였으니 5키로는 꽤 비싼 가격이었다.

그렇게 은덕을 빠져나왔으나 나진 선봉 초소에서는 절대 잡히면 안 되는 곳이었다. 나와 은주는 돼지고기를 각각 25kg, 47kg씩 들고, 머리와 피는 둘로 나누어 머리에 이고 초소를 지나갔다. 그 때가 아침 6시 반, 밥시간 때였다. 우리는 방학이라 할머니 집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면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송월은 군대에 잡혀서 노동일과 밭일을 하면서 하루 정도 있다가 풀려났다. 우리 셋은 우여곡절 끝에 나진 선봉으로 가서 고기를 팔았고, 피와 머리로는 순대를 만들어 팔았다.

장사를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기 때문에 한 그릇에 백 원 정도 하는 개고기를 사 먹을 수 있었다. 두부 밥도 많이 먹었고, 순대를 먹었던 기억도 많이 남는다. 벌었던 돈으로 1,500원 짜리 옷을 입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번은 어느 장애인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보고는 그림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식비만 남기고 남은 돈으로 한 장에 200원 정도를 주고 그림을 구입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오다가 안전원에게 그림을 다 뺏기고 말았다. 안전원이 따라오라고 했지만, 잡히는 즉시 집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을 주고 얼른 달아났다.

북을 떠나 중국으로

내가 장사를 잘하니 중국인들이 중국으로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에 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어 다시 북한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상미 언니의 말에 넘어가서, 결국 은주와 은희, 상미 언니와 함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갔는데 마침 비파에서 알던 사람을 만나 그 집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그때가 2001년 1월이었다. 운이 좋았던 우리는 머물고 있던 집 아저씨로부터 중국으로 넘어가는 길을 들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북한 군대 초소에 붙잡혀도 뇌물을 주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우리는 의심받지 않게 오후에 나무를 하러 가는 척 하고 두 명씩 나누어 강을 건너기로 작전을 세웠다.

저녁이 되어 강둑에 숨어서 강을 넘어갈 틈을 보고 있다가 군인이 초소에 들어간 틈을 타서 상미 언니와 은희가 강을 먼저 건거갔다. 이제 내가 강을 넘을 차례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주춤거리는 사이에 은주가 강을 향해 먼저 달려가고 이내 나도 막 뛰기 시작하여 어느새 은주를 제치고 강을 건너갔다. 우리 네 명은 조용한 풀숲에 잠시 숨어 있다가 언니가 이끄는 대로 교회를 찾아갔다. 막 도착한 교회에서는 개고기국에 약과 쌀을 주었다. 교회 관계자분은 단속이 심하니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냐고 물었으나, 생각해보니 나진 선봉을 다시 돌아가도 돈이 안 남을 것 같아서 중국에 남겠다고 했다.

중국으로 넘어가는 길에 상미 언니가 우리에게 기도하자고 했지만 당시 나는 기도가 뭔지를 몰랐다. 그래도 당시 언니의 기도 덕분인지, 화룡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초소를 지나갔지만 때마침 초소가 식사시간이라 우리는 운 좋게 통과할 수 있었다.

중국 시내에 들어온 우리는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에서 만난 어느 여자 분이 우리에게 중국에서 살 건지 북한에서 살 건지를 물어봤다. 북한으로 가겠다고 하면 수용소에 갇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머물겠다고 하자, 어떤 남자분이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그 남자를 따라 중국 조양촌으로 가게 되었다. (계속)

정리: 송다솜(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 155. 2011년 6월. pp.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