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은화이야기 – 4

은화이야기➃

편집자 주: ‘은화이야기’는 2005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온 세 명의 탈북청소년 중 한 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다. ‘은화이야기’는 앞으로 은화의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과정, 중국에서의 생활, 남한 정착 이야기를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북경으로 

떠나기 전날, 모두들 배낭 하나씩을 챙기며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나는 예전에 받아두었다가 아껴두었던 100달러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다음 날,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불안감이 가슴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연길까지 직접 배웅해주셨는데, 우리가 기차에 올라타려고 하자 아주머니와 은희, 은주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는 눈물이 나지 않지만,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기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차에 올라타자, 우리 집에 종종 오셨던 연변 사람 한 분이 함께 동행해주셨다. 북경에 도착해서 시내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와중에도 불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북경은 굉장히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안가나?’라며 은근히 기대심을 품기도 했었다. 북경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지루한 시간을 거쳐 곤명에 도착했다. 우리를 데려다준 분께서 이곳에서 잡히면 끝장이라며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셨다.

 

곤명-라오스에서의 여정

곤명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사람은 ‘영석형’이란 분이었다. 우리를 최대한 편하게 대해주셨지만, 우리 마음이 너무도 불안했기 때문에 결코 편하게 지낼 수 없었다. 그곳에서 김희선과 성룡이 주연했던 영화도 보았는데, 마음이 너무도 불안하여 영화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기도만 했다. 영화를 보고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시 흩어져서 우리끼리만 버스를 타고 어느 지역에 갔다. 그 땐 동행자가 없어 우리가 전부였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간절히 기도를 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이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고, 사람들이 마중 나와 있어서 그들의 도움으로 어느 한 집에 가게 되었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산을 넘기 시작했다. 산을 넘는 내내 잡힐까봐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는지 모른다. 당시 은희가 관절염을 앓고 있어서 제대로 걷지 못했고, 은주는 굉장히 왜소했기 때문에 나와 인철이(우리와 함께 왔던 남자아이)가 번갈아가며 은화를 업으며 힘겹게 산을 넘기 시작했다. 우리를 데리고 갔던 중국 사람들도 나중에는 그런 우리가 안쓰러워보였던지, 은희를 대신 업어주기도 하였다. 중간 중간에도 계속 숨어가며 어렵사리 산을 넘어서자 어떤 차 한 대가 우리를 대기하고 있었다. 다 헐어진 옷을 갈아입고 차를 타고 어떤 좋은 곳으로 가서 푹 쉬었던 기억이 난다. 여정 속에서 계속 남자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 많이 불편했지만, 국장님을 만나 한숨이 놓였다. 어렵사리 도착한 라오스에서 비로소 안심하며 며칠을 보냈고 어느 날 새벽, 기회를 엿봐 쪽배를 타고 태국으로 건너갔다. 태국에서도 국장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태국에서의 3개월

태국의 한 교회에서 3개월을 지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북한인들이었다. 위층은 남자들 숙소였고, 아래층은 여자들끼리 생활했다.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낌은 ‘정말 암담하고 처량하다’였다. 중국에서는 계속 돌봐주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잘 지낼 수 있었지만, 이곳은 완전히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이 교회에 머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남자들 때문이었다. 남자들이 우리에게 시비를 많이 걸었는데, 은희와 은주는 착해서 웃으면서 잘 넘겼지만 나는 까칠하게 굴면서 그들을 ‘남자 새끼들’이라고 불렀다. 괴롭힘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이 소굴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정말 기도를 간절히 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어느 날 새벽,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순간 그 자리에서 푹 쓰러지고 말았다. 할머니들이 나를 눕혀놓고 더운 물 찜질을해주면서 돌봐준 덕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국으로의 입국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06년 2월, 드디어 한국에 들어왔다. 인천공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의 느낌은 ‘크고 멋있다’였다. 한국에서의 국정원 생활은 그럭저럭 재밌었지만, 그곳 선생님들 태도에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많이 서려있다. 일주일씩 독방을 쓰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나는 첫 조사 때 성경책을 들고 들어갔다. 물어보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했지만 그곳 선생님은 절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냐?’며,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내가 너를 믿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결국 나는 거짓말 테스트까지 받아야했고, 결과가 잘 나왔음에도 계속 내 말을 믿지 않는 선생님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서 인사도 없이 조사실을 나왔다. 은주와 은희는 담당 선생님이 너무 잘 대해주었고, 정말 편하게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왜 나만 그런 수모를 겪었을까, 라는 생각에 정말 서글펐다. 담당 선생님이 너무 미워서 조사를 받는 내내 ‘내가 왜 여기 한국에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해야되나…’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나원은 참 예뻤고, 또 굉장히 넓은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해서 북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왔다하는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면서, ‘이제 우리도 자유롭게 한국 땅에서 잘 지낼 수 있겠구나’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처음 반을 배정받을 때 내 위치가 조금 애매했다. 나이 상으로는 성인이었지만,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소년 반으로 가야할지, 성인 반으로 가야할지 애매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성인 반으로 들어갔지만, 은주와 은희가 청소년 반에 들어가게 되어 같이 청소년 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진행된 한겨레 학교에서는 정말 열심히 참여했다. 내가 워낙 열심히 하니까 원장님께서 계속 그곳에서 생활하라고 하셨다. 우리를 도와주었던 미국에 계신 할아버지께 그 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니, 그곳은 불교학교이니 거기가면 인연을 끊겠다고 단단히 못 박으셔서 결국 우리는 기독교 대안학교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은 체계가 너무 잡혀있지 않아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이 너무도 싫었다.

 

나의 꿈, 나의 소망

중국에 있을 때, 기도하면서 ‘한국에 들어가게 되면 돈을 모아서 중국에 계신 아주머니께 집을 사드리자’고 종종 얘기하곤 했었다. 한국에 들어와 아주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집을 샀는데 집값의 반은 아직 지불을 못했다고 하셨다. 우리가 매달 돈을 모아서 1년 동안 정성껏 돈을 부쳐드렸더니, 결국 아주머니가 집을 사실 수 있게 되어서 너무도 기뻤다. 아버지를 찾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굴뚝같지만, 북한에서 새어머니와 이북동생과 잘 살고 계실 텐데, 갑자기 끼어들기가 좀 그렇다. 새어머니가 왜 그토록 모질게 대했는지 마음으로는 조금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다시는 새어머니와 만나고 싶지 않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북한에 있을 때 나의 꿈은 군대에 들어가고,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나는 항상 아버지처럼 똑똑한 사람이 되기를 선망해왔다. 나진 선봉에 있을 때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새어머니 못지않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중국에서는 선교사가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하고 싶었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공부를 끝마쳐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지금은 현재 공부하고 있는 세무사가 되고 싶다. 일단 세무 회계 자격증을 따고 세무서에 취직해서 1-2년 정도 경력을 쌓은 다음, 형편이 나아지게 되면 꼭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 그리고 돈을 많이 모아 50대가 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 내 꿈이다. (끝)

정리: 송다솜(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157. 2011년 8월. pp.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