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은화이야기 – 3

은화이야기 ➂

편집자 주: ‘은화이야기’는 2005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온 세 명의 탈북청소년 중 한 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다. ‘은화이야기’는 앞으로 은화의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과정, 중국에서의 생활, 남한 정착 이야기를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조양촌에서의 생활

2001년 1월, 내가 16살 때 조양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어디선가 내린 우리를 인상이 좋게 생기신 한 아주머니가 맞아주셨다. 아주머니와 함께 우리가 지내게 될 한 건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경미라는 이름을 가진 뚱뚱한 북한 여자아이가 지내고 있었고, 북한의 집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에 그 집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첫 날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입을 옷, 수건, 사탕, 귤 등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주셨다. 특히 계란을 넣고 죽처럼 먹었던 칼국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서 꽤 오랫동안 생활한 경미는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은덕 출신이었다. 그곳에 같이 갔던 류미 언니가 우리가 어려보이니 나이를 속여서 말하라고 하였다. 언니가 먼저 나이를 속였고, 당황한 우리도 따라서 나와 은주는 89년생, 은희는 90년생이라고 속였다. 88년생이라고 했던 경미도 나중에 알고 보니 85년생이었다. 나는 원래 류미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경미는 중국어를 곧잘 해서 중국어도, 성경도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질투심이 나서 항상 싸움을 일으켰다. 어린 내가 너무 독하게 구니 아주머니는 항상 내 편을 들어주시지 않았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 점이 늘 섭섭했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찬송을 불렀는데, 특별히 ‘기뻐하며 경배하세’라는 찬양이 생각난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성경책을 한권씩 나눠주었고, 우리는 모두 둘러앉아서 아주머니의 기도를 들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성경구절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우리가 쓰는 말과 사뭇 달라서 이해할 수 없었고,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냥 읽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성경구절을 외워 쓰는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은주가 항상 1등을 했고 류미 언니와 경미도 꽤 잘했다. 성경공부를 일찍 시작한 류미 언니나 경미와는 경쟁상대가 안 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계속 되는 질투심으로 경미의 볼펜을 끊어놓는 못된 짓도 종종했다.

  은희와 은주는 워낙 착해서 뭐든 잘 따르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반박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1등한 사람에게는 두껍고 좋은 노트를 한 권 주었고, 2등은 그것보다 조금 얇은 노트를 주었는데, 좋은 노트를 받고 싶은 마음에 다들 자고 있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성경구절을 외우곤 했다.

신앙이 생긴 계기

  오기로 성경 구절만 외우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전무했던 내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예쁜 옷들을 입을 수 없었고, 그 옷들은 키가 큰 류미 언니의 몫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어는 날 꿈에서, 평소 내가 입고 싶었던 예쁜 옷을 류미 언니에게 빌려 입고 놀러 나갔다. 한참 놀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났고, 놀고 있던 아이들이 도망을 가서 다행히도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그날 오후 2시 쯤, 나는 꿈에서 입었던 그 옷을 진짜 빌려 입고 나가서 조양촌에서 생활하고 있는 북한남자애들과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났다. 속으로 ‘하나님 살려주세요!’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남자애들은 많이 잡혀갔는데, 우리는 모두 무사했다. 신기하게도 아침에 꾼 꿈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날 그 꿈을 꾼 이후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신건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경책을 읽고 성경구절을 외우면서 지내는 동안 류미 언니는 자신을 길러준 분이 계신 심양으로 떠났고, 류미 언니가 떠난 후 다른 많은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어느 날 평소에 잘난 척을 많이 했던 ‘재수 없는’ 아이 한 명이 들어왔는데, 중국어를 곧잘 했던 그 아이는 종종 경미와 중국어로 대화를 했고, 나는 그게 싫어서 많이 싸움을 일으켰다. 어는 날 그 여자 아이도 떠나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아이들을 받지 않고 우리 넷이서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3-4년경 경미도 한국에 가 계셨던 경미 어머니를 통하여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미가 떠난 후부터는 은주, 은희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셋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평소에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었다. 주로 미국‧한국인 목사님, 선교사님, 전도사님들이었다. 방문하시면 기도도 많이 해주셨고, 특히 미국 분들은 먹을 것을 엄청 사가지고 오시기도 하여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지내는 동안 종종 한국 목사님들이 방문하셔서 한국에 가겠냐고 물어오셨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불타올랐던 2004년쯤엔 한국에 들어가지 않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북한에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또한 한국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총살당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기 때문에 절대 한국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러던 중 아주머니가 4,5월 달 쯤에 갑자기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돌아온 아주머니가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들려주셨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라고 했다. 큰 돼지들이 내게 막 달려오는 꿈을 꾸었었는데, 그 꿈 때문인지 아니면 내 예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손님들이 오면 왠지 “대박”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주머니에게 이번에 한국 사람들이 오면 뭔가 많은 것을 줄 것 같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5월 7,8일쯤 손님들이 왔는데, 정말 많은 것들을 갖고 오셨다. 간식뿐만 아니라 한 사람당 100달러씩 용돈도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잘하냐고 묻기에, 방석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방석과 커버를 만들면 팔아주겠다고 해서, 정말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석과 커버를 팔아 중국 돈을 꽤 많이 벌 수 있었다. 번 돈으로 신발도 사고, 아주머니 몰래 수요예배시간에 떡볶이와 양꼬치를 사먹기도 하였다. 또 은주의 뺨에 작은 혹이 있었는데 그것이 항상 스트레스였던 은주는, 번 돈으로 그 혹을 없애기도 했다. 그렇게 재밌게 지내긴 했지만, 마음은 항상 불편했고 불안해서 울면서 기도를 많이 했다.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심

  경미도 한국에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았고, 아주머니도 한국에 가는 게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점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계속 살다보니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이렇게 사느니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나을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2005년 2월 어느 날 꿈을 꿨다. 꿈에서 4월달 쯤에 우리가 한국에 간다고 했고, 우리는 힘들게 한국으로 가고 있었다. 이렇게 꿈까지 꾸다보니 마음이 더욱 심란해져서 우리는 셋이서 손을 맞잡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

  2005년 8월쯤 아주머니는 우리가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 그 전에도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이뤄졌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막상 떠나려니 섭섭하긴 했지만, 한국행을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차분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혹시 한국으로 가다가 잡히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기도하면 되지 무슨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대꾸했다. 앞날이 어떻게 딜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에 아주머니가 그렇게 얘기를 하실 때면 정말 싫었다.

  어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국에 간다는 말은 결코 듣지 못했다. 10월 어느 날 우리가 곧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 동안 모아놓은 중국 돈 몇 백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이 너무 불안하여 1분 1초도 빠짐없이 기도를 했다. 또 중국에 있는 동안 아주머니께 은혜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은혜를 갚을 기회를 달라는 기도도 쉬지 않고 했다. (계속)

정리: 송다솜(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156. 2011년 7월. pp.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