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은화이야기 – 1

은화이야기 ①

편집자 주: ‘은화이야기’는 2005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온 세 명의 탈북청소년 중 한 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다. ‘은화이야기’는 앞으로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과정, 중국에서의 생활, 남한 정착 이야기를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은덕에서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추억과 오빠의 죽음

어렸을 적,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공치기나 땅따먹기, 땅에 사방치기처럼 그림을 그려 노는 사사십육놀이나 고무줄놀이 등을 하며 놀았다.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가서 노래도 부르고 도시락도 나눠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내 애칭은 귀엽다고 ‘콩새’였다. 나를 제일 귀여워해준 사람은 우리 아버지셨다.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던 아버지는 내 유년 기억 속 가장 커다란 존재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어딜가나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나를 똑똑하다고 자랑하셨고, 비행기를 태워주시고 노래도 부르며 함께 놀아주셨다. 한 번은 밥을 해보라고 하셔서 밥을 하다가 다 태웠는데도 기분이 좋았을 만큼, 아버지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은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엔 여느 집처럼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오손도손 살았던 추억이 없다. 어머니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던 기억만 가득 서려있는 어린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아는 사람 집에 맡겨두고 떠나셨다. 버려졌다는 생각에 일주일 내내 서럽게 울었던 나는, 이내 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그때 난생처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화학공장 반장이셨고, 집에는 새어머니와 오빠, 갓난아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서먹서먹했지만 혼자 외롭게 지내다 많은 가족들 품에 있으니 점차 안정이 되어갔다. 하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나는 새어머니의 미움을 샀고, 그 마음을 알아챈 나 역시 새어머니를 좋아할 수 없었다.

새어머니와는 항상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아침에 밥을 하면 점심까지 먹어야 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내 밥의 반이 없어져 있던 것이다. 서운한 마음에 말을 하지 않아 새어머니를 불편하게 했고, 그 때문에 많이 맞았다. 평소에도 새어머니에게 자주 대들고 맞으면서 그 분풀이를 네 살 터울인 여동생에게 했다. 새어머니와는 집을 나올 때까지도 끝내 관계가 좋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달리기 장사를 했다. 달리기는 우리 지역에 있는 물건을 다른 지역에 가서 파는 장사였는데 보통 도자기(밥그릇)이나 비료를 많이 팔았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중학교 2학년까지 새어머니를 따라 어머니는 20Kg을, 나는 10kg되는 짐을 등에 지고 장사를 다녔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학교를 빠지면서 일을 다녔지만, 점차 아이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학교 다니기가 힘들어졌다. 더욱이 나를 건드리는 아이들을 대신 때려주었던 오빠가 계모학원에 가게 되는 바람에 학교생활이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교생활이 무척이나 재밌었다. 못된 성격 탓에 싸움을 많이 했지만 항상 배경이 되어준 오빠가 있어서 어깨를 으쓱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아버지가 퇴근 후 공부를 가르쳐주신 덕분에 최우등 학생이 될 만큼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가 3,4학년, 오빠는 중학생 즈음, 생활이 너무 힘들어지게 되면서 오빠와 나를 계모학원에 보내고자 했지만, 같이 산지 얼마 안 된 나를 보내기 싫어하신 아버지 때문에 오빠만 계모학원으로 보내졌다.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새어머니는 항상 오빠만 예뻐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무척이나 힘썼지만 동시에 내 안에는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싫어하는 감정이 가득했다.

그러한 감정은 오빠의 죽음까지로 이어졌다. 2월의 어느 날 오빠가 허약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모학원에서 집으로 돌아 온지 이틀 뒤, 오빠는 숨을 거두었다. 오빠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은덕을 떠나 나진 선봉에서의 생활

학교는 고등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고, 공부를 꽤 잘해서 늘 우등을 했었다. 북한의 식량난으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새어머니는 성냥 몇 개를 주며 감자와 바꿔오라고 하셨다. 장평에 갔지만 성냥을 감자와 바꾸지 못했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면 혼이 날 것 같아 그길로 집을 나왔다. 며칠 힘들게 고생한 끝에 샛별에서 성냥을 감자와 바꿀 수 있었고, 아는 집에서 잠을 자며 지냈다. 몸은 고되고 힘들 때 마다 산에 올라가 혼자 울기도 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집에 있을 때 보다 편했다. 그러다가 나진 선봉에 가면 돈을 불 수 있다는 말을 얼핏 듣고는 선봉에 가기로 결심했다.

나진 선봉을 많이 다녀본 언니들과 함께 화물차를 얻어 타고 꼬박 하루가 걸려 도착했다. 나진 선봉은 외부인 출입금지 지역이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철조망에 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몰래 넘다가 많이들 타 죽었다. 하지만 이 지역이 산이라 철조망 밑으로 땅을 파서(개구멍) 사람들이 넘나들었다. 나는 초소 근처의 탁자 밑으로 들어가 도망칠 수 있었다.

나진 선봉의 첫 느낌은 막막함이었다. 언니들과 함께 산에서 비닐 막을 치고 살면서 옥수수를 따다가 펑펑이를 튀겨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펑펑이는 길고 가벼워서 나 같은 어린아이들이 짊어지고 팔러 다니기 딱 좋았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해 숙박업소에서 잘 수 없었기 때문에 역전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며칠 지내다 보니 아는 언니가 생겼다. 언니는 선봉의 중국인들이 호텔을 짓고 있는 비파도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번 것 같던 그 언니는 하루에 10원하는 숙소에서 묵기도 했고, 내게 50원, 100원씩 주기도 하였다. 나도 고민하다가 비파에 갔다. 공장 주위에 따뜻한 물이 흐르는 배관에서 잤는데 그곳에서 가끔씩 묵다가, 은덕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은주와 은주 어머니를 만났다.

하루는 선봉 시장에 갔다가 꽃제비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때부터 성격이 많이 약해져서 사람들과 정말 많이 싸웠다. 누가 내 흉을 보면 30~50대 아주머니든 아저씨든 상관없이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하며 싸웠다. 싸우다가 돌로 머리를 맞기도 하고, 바다에 내던져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 번은 나진 선봉에서 순대를 만들어 팔았다. 선봉에는 30~40대 꽃 파는 언니들이 있었는데, 그 중 송월이라는 언니와 저와 동갑이었던 은주(14살)와 저는 함께 추운 겨울에 은덕에서 돼지를 가지고 와 나진에서 팔아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시작했다. 아무리 남는 게 없다 해도 최소한 100원은 남는 장사였는데 언니는 남는 게 없다고 우리에게 1원도 안주는 것이었다. 속으로 욕하다가 연변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많아서 장사가 잘되는 ‘성월’이라는 곳에 언니 욕을 적어 놨더니, 누군가가 언니에게 고자질을 했다. 언니가 나를 불러서 때렸는데, 나도 “사기꾼”아, “꽃 파는 여자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뜯고 싸웠다. 이때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것을 본 이후로 나를 무서워해서 말을 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혼자라 내가 죽어도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은주와 싸웠을 때도 “야, 이 계집애야 너는 엄마도 있잖아” 라고 말할 만큼 부모 사랑을 못 받은 것이 못내 서러웠었나 보다. 그 당시에는 어딜 가나 제일 어렸고,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악을 쓰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국에서 만난 아메(아주머니)가 사람을 만들어준 덕분에, 지금은 마음이 많이 약해져서 그렇게 싸우지는 못한다. (계속)

정리: 송다솜(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 154, 2011년 5월. pp.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