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우리 가족의 고난

[탈북자 증언]
이 글은 2004년도 총회에서 증언한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우리 가족의 고난

이 미 란
탈북여성
2003년 7월 18일 한국 입국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미란입니다. 저는 2003년 5월 30일 북한을 떠나서 같은 해 7월 18일 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에서 떠나게 된 동기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강원도 원산입니다. 그곳에서 한 24년 동안 살다가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시집와서 25년간 살았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북한에서 제일 살기가 곤란하고 그럴 때가 1990년대입니다. 그때를 배경으로 해서 말씀드리겠는데요, 1991년도부터 식량사정이 나빠져 배급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95년도까지는 그래도 식량을 몇 달에 한 번씩 보름치 씩 주고 그 다음에 명절날 그럴 때 한 이틀 치씩 주고 하던 것이 배급이 95년부터는 아예 끊겼습니다. 그래가지고 95, 96, 97, 98년도까지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길거리를 다니다보면 시체가 길옆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큰 역전 청진, 함흥, 청성, 평양 같은 대합실에는 시체가 너저분하게 있고, 말로 다 표현 할 수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96년도 5월 달에 남편은 병(감기)을 얻어 약도 한번 못쓰고 5월 달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도 사위가 돌아갔다 하니깐 시름시름 앓다가 그달에 그냥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는 아들, 딸이 있었었는데 그때 큰아들이 16살 작은 아이는 13살 이었습니다. 남편도 돌아가시고 살아가기가 막막해서 식량을 구입하러 사리원에 갔었습니다. 근데 사리원에 가는 게 차가 달리면 하루길입니다. 24시간이나 걸리는 거지요. 그때는 식량도 없지, 전기도 없지 가다가 차가 멈춰 섰는데, 함흥 근처에서 차가 멈춰 섰는데, 10일 동안 멈췄습니다. 그래서 내가 갈 적에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10일 식량치만 남기고 갔었는데, 가는 것만 10일 걸리고 오는데 10일 걸리고, 가서 있다 보니깐 거의 한 달이나 지나게 걸렸습니다.
장사하러 갔었는데 밑지고 왔습니다. 식량을 조금 얻어가지고 오니깐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친척도 없지 배는 고프지 그래 다 중국으로 가고 없었습니다. 그 때 생각하면 너무나 진짜 기가 막힙니다. 한 순간에 가족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남편, 친정엄마, 아이들까지 다 잃어버리고 혼자서 있었는데 살고픈 생각도 없고 해서 혼자 그렇게 꼼짝없이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중국으로

아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몰랐었는데, 큰 아이가 중국에서 먼저 잡혀 나왔습니다. 다시 북에서 살다가 보니깐 여전히 나아진 것이 없어 기가 막히고, 먹을 것도 없지 하니깐 다섯달인가 있다가 자긴 중국에 가야지 여기서 못살겠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도 “우리함께 같이 살아야지 어디 가겠냐고”하니깐 아들이 죽어도 여기서는 못살겠다고 하면서 다시 중국으로 2월 달에 또 갔습니다. 그런데 8월 달에 또 작은아이가 또 붙잡혀 나왔습니다. 여덟달인가 그렇게 같이 살아보니깐 밥도 못 먹지, 빌어먹어도 중국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엄마보고 조르는 겁니다. 너희 다가면 엄마는 어떻게 살겠는가.. 그랬더니 여기서 더 이상 못살겠다. 그래 붙잡혀 와서 8개월 동안 같이 살다가 중국으로 다시 건너갔습니다. 그 다음엔 영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잡혀 나오지 않았으니깐 중국에 잘 있겠지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1년 반 동안 혼자서 장사하면서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 한국행

2003년 작년 5월 29일 남자하고 여자하고 둘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보낸 거라며 요만한 종이에 “어머니에게”라고 쓰여 있고, “동생하고 둘이 중국에 잘 있으니까 중국에 와서 연변까지 와 달라고, 그러면 우리가 돈을 좀 드리겠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씨를 보니깐 우리아이 글씨가 맞고 해서 무작정 그 사람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 두 사람들이 어디 사람들인가 하니 온성에 있는 사람들인데 무산의 저를 데리러 왔던 것입니다. 무산에서 온성까지는 하룻길이면 됩니다. 그래 온성으로 가니깐 이 사람들은 북한 사람을 데려다가 중국에다 이송시키고 돈 받아먹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천막으로 데리고 갔는데 온 식구가 그곳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돈 받고 중국에 넘기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 도착했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란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겠는데, 지금 아들하고 딸하고 한국에 가있는데... 어머니를 한국에 데려 갈거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조선이란 게 사람 못살 곳이다, 거지가 득실거린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난 무서웠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보고 안 가겠다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아 어머니 참 모르신다”고 하면서 날 계속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안가겠다고 우기니깐 아들하고 연락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면서 아들하고 전화로 통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 목소리 들으니깐 너무 꿈만 같아가지고 “기철아 너 어디가 있냐.” 그러니깐 “어머님 나는 여기 지금 한국에 와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뭐야” 그러니깐 “어머님 한국은 남조선이라고, 북한에서 말하는 남조선” “그런데 너 왜 거기 갔느냐고” 하니깐 “어머님 여기 좀 와보십시오. 와 보면 알거라고 여기가 천국이라고” 아이가 한참을 설득했습니다. 하루 있다가 그 사람들이 안내해서 5월 30일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밤에 6시 반에 그 사람 손을 붙잡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에 와서 잡힐까봐 민가에도 못 내려가고 산속 움막에서 10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여기 숨어서 지낸다는 말을 했고 사람이 데리러 왔습니다. 연변이고 산속에서 한 40일 동안 숨어서 나가지도 못하고 숨어 있다가 여권이 왔는데 중국으로 해가지고.....작년 7월 18일 날 한국에 입국하게 됐습니다.

경제개혁 이후 북한생활

제가 2003년 5월 달에 왔으니깐 북한실정은 뻔합니다. 식량이란 건 98년도까지 사람들이 죽고 그랬는데, 99, 2000, 2001 2002년까지는 우리는 그냥 힘들게 그렇게 살았습니다. 배급은 매 1년에 큰 명절 설날 이틀, 2월 16일 김정일 탄생일 날 2일분주고 4월 초에 2일분주고 그 다음에 1년 내내 배급이란 건 없고, 자체로 생활해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도 눈이나 굴리고, 장사를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입에다 풀칠이라도 하면서 살아가기는 합니다만 고난하게 삽니다. 2003년도부터는 식량사정이 더욱 나빠져 그래서 1월 달에는 풀도 없어서 못 뜯어 먹었습니다. 북한에서는 4월 말부터 풀이 돋아나거든요. 풀이 돋아 날 때부터 사람들이 산이고 들이고 풀을 뜯어 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풀은 그저 토끼풀이건 돼지풀이건 닥치는 대로 뜯어서 삶아가지고 풀 죽을 쑤어 먹고, 옥수수가루를 100g정도 조금 섞고 그렇게 해서 가마에다 부어 놓고서 쪄 먹고. 그런 실정입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식량 사정은 말할 수 없습니다.

쌀밥이란 건 못 먹어보고 최고로 먹는다는 게 옥수수국수입니다. 삶아가지고 그것도 금방 먹는 게 아니라 물에다 불려서 풀 섞어가지고 물 잔뜩 부어서 쪄먹는 것이지요. 밥줄이나 먹는 사람들이라면 간부, 안전부 그런 사람들이지, 일반 사람들은 죽에다 풀 먹고 산다는 거 그렇게 인식하면 됩니다.
북한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게 뭔가 하면 땔 나무가 없습니다. 나무가 아주 귀합니다. 무산이라고 심심산골인데 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몇 년 전부터 베어 먹어가지고 산이 벌거숭이입니다. 산꼭대기까지 몽땅 옥수수, 기장, 콩 그런 거 심어서 먹습니다. 산으로 나무를 하자면, 한 5~60리 가야지 한 가지 해옵니다. 사람둘이 사는 가까운 곳에는 나무를 다 베고 없습니다. 남편이 살아 계실 때에 나무 한 짐 하자면 아침 일찍 5시 반에 집을 떠납니다. 5~60리 가서 요만한 거 한 가지 끌고서 오면 저녁 4시 5시 됩니다. 그걸로 며칠 살고, 또 해오고 그렇게 생활을 합니다. 여름에는 더우니깐 나무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겨울에 나무 한단 말입니다. 1년 땔 것을 겨울에 하니깐 온 집안 식구가 5명이면 5명, 6명이면 6명 몽땅 나무를 합니다. 나무에 끈 매가지고 5~60리 길을 끌고 오다가 그게 평평한 길이 아니고 몇 개의 민둥산을 넘어가지고 올려 매가지고 또 올려가지고 산을 몇 개 넘어가지고, 그렇게 나무를 해온단 말입니다. 식량도 식량이거니와 땔 게 정말 큰 야단입니다. 먹을 것도 그렇고 땔 것도 없고, 전기도 없지, 전기도 공급입니다. 1월 1일 날 2일 주고, 2월16일 2일, 4월 15일 2일 그렇게 주면 끝이고, 이모저모로 북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여기 와서 보니까 가로등이나 켜놓고 있는 것 보면 아 아깝다. 북한에 보내줬으면 하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북한 생활을 원시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책도 보고. 밤에 TV도 보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암흑천지에서 진짜 겨울 같은 때는 5시부터 날이 어둡는데, 등잔불도 없습니다. 등잔불도 기름이 아까워가지고 켜지 않고 5시부터 일찌감치 누워서 자고 한잠 자고 일어나면 밤 10시 된다고 합니다. 겨우 잤는데.... 그러니깐 긴긴밤을 암흑세상에서 새우고, 아침에는 불도 없는데서 밥이라도 해먹고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고 하니깐 학교는 안가고 엄마를 따라 댕기면서 장사를 하고, 그리고 농사짓고 산골 같은 데는 온 집안 식구가 다 달라붙어서 농사를 짓습니다. 1년에 700kg, 800kg정도 한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이라도 쑤어가지고 그걸 먹고, 팔고 그럽니다. 농사도 못 짓고 장사도 못하고 그런 사람들은 굶어 죽어도 누가 눈 깜짝도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작년에 5월에 나올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질의응답>

“위생지, 화장지, 화장실 사용은?”
화장지는 생각도 못했고, 이런 것은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은 아마 중앙당 그런 간부들이나 쓸까. 학생들이 학습장을 쓴다면 그것으로 휴지하고, 농촌에선 강냉이 깐 속청으로 휴지를 대신해서 씁니다.
북한에서는 제일 큰 신문이 로동신문인데 그것도 종이가 없어 발간 못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많아야 되는데 나무도 다 없으니까 종이를 오사리 껍질로 생산하는데 그것도 생산이 잘 안되고, 그 오사리가 맥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쓰다 보면 투덜투덜해가지고 흡수도 잘 안되고...

“사리원에는 식량이 많습니까?”

그 전에는 많았는데 지금은 사리원 사람들도 식량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무산에서 쌀이 100원정도 한다고 하고 거기 가면 50원 한다고 합니다. 무산에서 중국물품을 사가지고 거기 와서 비싼 값에 판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북쪽에서 그곳으로 물품을 가지고 가서 팔고 쌀을 사서 배낭에다 지고 옵니다.

“농사가 안되는 이유를 아십니까”

땅은 많은데 땅이 척박해서 농사가 안 되고, 비료도 없습니다. 그런 땅에다가 곡식을 심으니깐 곡식도 안 되고, 그 땅에서 350만 톤만 생산하면 북한 사람들은 먹는다 하는데 100만 톤도 못 생산하고,,, 여기처럼 경제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수출도 하고 그래서 쌀도 사오고 그래야 되는데, 기본 돈이 없으니까 쌀도 사오지 못하고, 식량이 거의 다 바닥난 것 같은데.. 제 생각입니다.

“김정일 정권이 언제 망할 것 같아요?”

망하긴 망할 텐데.... 김정일이가 죽는다 해도 또 김정일 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북한 정권이 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게 일반 시민들은 못 먹고 굶주리지만 군대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 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그렇게 굶주려 보지 않았으니깐 정권이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죠.
평백성만 빨리 통일 되어야지 잘 산다고 그러지, 높은데 올라앉은 사람들은 그런 거 바라지 않습니다. 다 지위가 있지, 그럭저럭 지내지 하니깐 굶주리는 그런 사람들이나 통일을 바라고 그러지, 간부들 그런 사람들은 당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되는 거니까.

“총 쏴본 적이 있나요? 언제 어떻게 쏴봤어요?”

예. 붉은 청년 근위대라고 있습니다. 고등중학교 5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보름씩 붉은 청년 근위대가 돼서 훈련하는데 훈련 마지막 때 실탄 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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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이후 여성에게 주는 부담은? 사회주의체제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것은?”

식량공급이 중단되면서부터 남자들은 직장에 출근했다가 일하고 내려오고. 직장에 가도 돈도 안타오지, 배급표를 타와도 식량도 배급소에서 안주지. 그러니깐 그 다음부터 여자들이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겁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모계 씨족 사회가 돌아왔다고 말하면서 남자들은 집을 지키는 멍멍이, 낮 전등, 풍경화 이렇게 부릅니다. 그러니깐 남자들이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성들이 장사일이든 뭐든 쫓아 나섭니다.
국가에서 배급을 조금 줄때에는 장사를 정말 못하게 했습니다. 장사하면 붙잡아서 수용소에 보내고, 감옥에 보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굶어 죽고 그러니깐 조치를 취해가지고 그러면 농산물만 팔라. 그러니깐 일체 공업품은 팔지 못하고 농산물만 팔라고 이렇게 지시 내렸었는데, 국가에서 가만히 놓고 보니깐 사람들이 장마당을 운영해서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는 것은 사실이란 말입니다. 국가에서 배급을 안 줘도. 이거구나, 장마당을 운영해야지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낫겠다. 장마당에서 대대적으로 중국물건 팝니다. 예전에는 중국 물건이란 게 놓고 팔면 싹 회수 했습니다. 상무가 나와 가지고 다 회수하고 그랬는데. 몇 년 전부터는 다 팔게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깐 너도 나도 북한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은 편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직장으로 출근하면 되는 거고... 장마당에 남자들은 하나도 못나옵니다. 다 여자들이 장사하고 가정 먹여 살리고 이런다 말입니다. 그전에는 국가에서 주는 것만 먹던 게 장사해야 살겠구나. 이런 인식이 솟아나니깐 개인이기주의라 할까 그런 게 움트고, 장사가 좀 잘돼서 돈이 들어오면 ‘장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하여간 의식이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벌어서 잘 살아야 되겠다. 이런 의욕이 강해지고 말하자면 자본주의 그런 게 머리에 움트기도 하구요. 80%가 아주머니들이 장사하고 노력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가정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여맹활동은 어떻게 하나요.”

그날은 꼭 참가해야 돼요. 일주일에 두 번이에요. 여맹활동은 생활총화, 학습강연회 이런 것인데 오전에만 하니깐 오전에 참석하고 오후에 장마당에 나가 장사합니다.
조직생활에 꼭 참가 해야지 참가 안하면 여맹단련대 그런데다 보내고 그러니깐 조직생활은 꼭 참가하고 그 다음에 장사를 해야 됩니다.

“북한사정이 앞으로 나아질 전망이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공장도 안 돌아가고 생산하는 게 없고, 원료가 없지, 전기가 없지 하니깐 돌아가는 건 무산광산 하나만 돌아가고 소기업들이 많은데 소기업들은 다 닫아버리고. 나아지는 그런 게 없고 군대만 계속 강화하는데 군대만 강화해서 어떻게 하겠는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보낸 각 종교단체나 사회단체의 구호물품을 받아본 적 있는지?”

한 번도 없습니다. 공업품은 하나도 못보고, 약품도 감기약 하나 받아본 적 없습니다.

“정주영씨 소 방북에 대해서 보거나 들어본 적 있는지?”

정주영 씨가 소하고 쌀하고 한번 보낸다고 해서 TV뉴스에 났는데, 그 전에는 일체 남한에서 뭐 보냈다는 소리는 요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남한에서 쌀 보냈다는데, 타 먹은 적은 딱 한번, 정주영씨가 보냈다는 거 그것도 배급으로 돈 내고 보름치 한번 타 먹고. 그 다음에 이내 일반인한테는 쌀 보냈다는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모릅니다. 남한이 잘살아서 보낸다 하면 거기 사람들이 의식이 다 바뀝니다. 미군들, 여기에 대해서는 계속 나쁘게 선전하고 있으니까 TV도 못보고, TV도 중앙통로 하나만 딱 연결해서 보니깐 국제 돌아가는 시세 하나도 모르고 하니깐 철창 없는 감옥과 같습니다. 정해진 틀에 박혀서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하고 ‘예예'하고 수긍 안 하면 정치수용소 그런 대로 끌려가고. 그러니깐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굶어도 시키는 데로 하고 죽어도 시키는 데로 하고,공산당이니까. 북한에서는 체제가 그러니까. 남한에 와서 알았는데 쌀이나 보내 준다는거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관광지 건설한다.” “정주영 씨가 금강산 관광을 꾸린다.”그 정도입니다.

“남쪽 사람들이 관광을 간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예. 못 들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한다는 얘기는 TV에 몇 번 나오기는 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편지를 왕래 하는 그런 경험이 있는지?”

92년 그 전에는 편지도 넘어가고 전보도 오고가고 했는데, 식량이 절단되고 나선 우편 그런 거 다 마비되고 편지도 몇 달씩 걸립니다.

“북한에서 편지 쓸 때 받는 사람한테 반드시 초장하고 종장에 친애하는 xxx 그런 것을 꼭 써야 됩니까?”
사사로운 편지에다가는 그렇게 안 씁니다.

“저는 고향이 북입니다. 14년 전부터 3국을 통해서 편지가 오고가고. 편지 중에 어떤 것에는 철저하게 초장과 종장에 "친애하는 xxx가 꼭 나와요....검열을 하는지?”
가족끼리는 북한에서 북한으로 가는 것은 검열이 없는데, 만약에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중국에 보낸다던가. 미국에 보낸다던가. 그런 것은 꼭 검열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북한은 57년부터 호적을 없앴다고 합니다. 자원봉사하면서 물어보니 10명 중 반은 호적이 뭔지, 족보가 뭔지 모른다고 합니다. 호적과 족보가 뭔지 아십니까?”
호적이라는 것은 주민대장입니까. 족보라는 것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