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 – 3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 ➂

(편집자)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은 북한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탈북 했지만 중국에서 북송당해 요덕 수용소에 갇혔던 이금란 동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요덕 수용소에서 힘든 생활을 이겨낸 후 아버지와 함께 다시 탈북했다. 그 후 중국, 필리핀을 거친 고행 끝에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인간애을 찾기 힘든 공간인 수용소에서 모진 생활을 보내고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금란 동포의 이야기를 전한다.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동포들에 관하여

나는 요덕에서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당사자 들을 만났었다. 은철이(김은철)와 허영일이라는 사람을 안다. 내가 요덕에 들어가고, 은철이가 6월에 퇴소했다. 그리고 허영일이라는 사람은 같이 일하면서 알게되었다. 수용소 안에는 여자가 총 20명, 남자가 총 180명 정도 있는데, 남녀 간에 거리는 두지만 일을 하다가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러시아에서 잡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요덕 수용소에 나보다 일 년 먼저 들어왔으며 내가 기억하는 허영일은 키는 보통에,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안타깝게도 허영일의 처는 요덕에서 죽었다.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에 대한 간략한 소개

(편집자) 북한 인권문제의 심각성과 탈북난민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국제적 협력 메커니즘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 사건이다. 1999년 겨울(11월) 중국에서 러시아로 국경을 넘어 온 허영일, 방영실, 리동명, 장호영, 김광호, 김성일, 김은철 총 7명의 탈북 동포들이 러시아 연해주 국경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이에 북한인권시민연합과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유엔난민기구(UNHCR)가 체포된 7명을 난민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에게서 제 3국행 희망의사를 확인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출국비자를 받아 한국행을 확정짓는 듯하였다.

그러나 1999년 12월 30일, 러시아는 탈북자 7인을 중국으로 돌려보낸 후에야 한국 총영사관에 이와 같은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한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법률에 의해 불법 월경자는 국경을 넘어온 국가로 다시 돌려보내야 하고, 러-중 국경을 탈북자들이 한국행 루트로 이용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7인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도록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는 중국 장쩌민 주석에게 호소문을 보내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2000년 1월 12일 중국정부는 탈북자 7명 전원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시켰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으로부터 송환된 인원은 7명이 아닌 6명이며, 그 중 허영일, 방영실 부부는 함경북도의 한 창고를 털고 불을 질러 국가에 10억원의 손실을 끼친 죄로 각각 9년, 5년에 해당하는 노동 교화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연 단위 국제 사회의 대북원조 규모와 맞먹는 가치의 창고가 함경북도에 있을 리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그 외 나머지 네 명에 대해서는 그냥 풀어주었다 하였으나 북한은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마침내 2002년, 2005년에 걸쳐 다른 탈북 동포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당국이 훈방했다던 4명을 포함, 7명 전원이 북한의 주장과 다르게 완전통제구역이나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오기까지

앞에서 말했지만 수용소 안전원이 나를 온성군 보위부까지 데려갔고, 내 동생이 온성보위부에 와서 나를 인계한다는 담보를 쓰고 나서야 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수용소를 나올 때부터 북한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는다는 담보를 했지만 보위부원들도 나를 계속 감시했다. 요덕 수용소에서 사회로 나왔다고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밑천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장사도 못하고, 그저 아버지랑 남동생이랑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았다. 결국 나는 어머니(2002년에 이미 한국에 계셨음)의 연락을 받고 3개월 후 다시 도강했다. 이웃이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계속 받아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미행인줄 알고 절대 받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받아보라고 권해 마지못해 받았는데 정말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한국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 주었지만 나는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미 한번 수용소에 갔다 왔기 때문에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 도강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회령 학포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학포를 건너니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강 건너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국경을 넘고 중국에 도착해서는 안면이 있는 친척 언니 집에 있었다. 그다음 위조여권을 이용하여 북경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한국까지 오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영사관에 들어가서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었다. 6개월 후 나는 아버지와 같이 한국으로 갈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에 도착한 다음 그 곳에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나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중국보다 못 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공항에 내리니까, ‘정말 이런 곳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하나원에 사람이 너무 많고, 내 경우에는 먼저 온 가족이 있다 보니 일주일 만에 하나원에서 조기 퇴소 할 수 있었다. 퇴소 후 어머니를 만나니까 그동안 하도 울어 눈물이 말라 울음도 안 나왔다. 어머니께서도 내가 잡혀갔을 때 눈도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67세의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 다리가 좋지 못하신 상태셨다. 이제 한국에 온지 6년이 되었다. 비록 지금까지 요덕 수용소에서 겪은 고초 때문에 전신이 아파 병원에 다니며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천사같은 아들이 있다. 요즘은 아들 키우는 재미에 빠져 지낸다. 나에게 이런 소소한 행복을 깨우치게 해준 한국, 나는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끝)

편집: 김소희<캠페인팀 간사>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