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 – 2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 ➁

(편집자)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은 북한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탈북했지만 중국에서 북송당해 요덕 수용소에 갇혔던 이금란 동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요덕 수용소에서 힘든 생활을 이겨낸 후 아버지와 함께 다시 탈북했다. 그 후 중국, 필리핀을 거친 고행 끝에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인간애을 찾기 힘든 공간인 수용소에서 모진 생활을 보내고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금란 동포의 이야기를 전한다.

요덕수용소로 가다

그렇게 심한 취조를 받은 지 3개월 후에 그들이 옷을 주어서 나는 내가 사회로 살아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는 중국으로 도망가지 않도록 개조하러 간다고 하며 나를 끌고 나가면서 “가서 일 잘하고, 생활 잘하고 오라”는 말까지 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달리고, 또 3시간 동안 산골로 들어갔는데, 그렇게 간 곳이 바로 요덕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곳이 요덕인줄도 몰랐고 요덕에 15호 관리소가 있는 지도 몰랐다.

관리소의 정치부장이 나에게 대뜸 왜 여기에 들어왔냐고 세차게 물으며 “남조선 가지고 했지? 남조선이 잘 사는 것 몰랐나!”하면서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 때 잘사는 ‘한국’과 내가 아는 ‘남조선’이 같은 나라인지도 몰랐다. 정치부장은 이어서 “너 머리 깨끗이 개조될 때까지 여기서 생활해”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렇게 외래에서 일주일 생활하다가 투입되었다. 내가 그 당시 잘 걷지를 못해서 잠시 요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여자들은 3중대에 배치되었는데 모두 20명이었다. 하는 일은 주로 콩, 강냉이, 호박과 같은 작물을 심는 농사일을 했는데, 겨울에는 산에 가서 특별히 통나무 해오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6미터 길이의 거대한 통나무를 끌고 가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여름에는 아침에 5시 군대식으로 기상해서 체조 10분, 마당청소 10분, 세수 10분을 하고 30분 간 아침을 먹은 후에 일하는 현장으로 뛰어서 간다. 식사는 강냉이 죽밥이랑 염장배추나 무, 염장 배춧국 등이었는데 일의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죽밥을 절반 뚝 잘라서 줬다. 계획대로 목표량을 달성해야지만 멀건 죽밥을 다 먹울 수 있었다. 오전 10시쯤 돼서 딱 10분 휴식하고, 다시 12시까지 일한 다음, 30분 점심시간 후 5분 쉬다가 1시에 작업을 나갔다. 그렇게 저녁 8시 30분까지 일했다.

겨울의 일과도 여름과 비슷했지만 아침 6시 기상,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 아침 7시, 저녁에는 6시에 일을 마친다는 것이 달랐다. 노동 후에는 씻고, 7시부터는 학습, 생활총화, 9시에는 모여서 인원을 점검하고 10시에 취침이다. 여름에는 9시 점검 끝나고 11시까지 도라지랑 더덕을 산에 가서 캐 와야 했다.

새끼줄도 꼬고 지게를 엮고, 만들고 그렇게 하루 계획을 모두 수행해야만 1시든, 2시든 잠을 잘 수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우리를 재우지 않고 일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죽는 사람도 참 많았다. 그것도 양반인 것이 구류장에 갇혀 판결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는 다 떨어진 식기에 마시는 죽 같은 것을 주었는데 수저조차도 없어 그릇을 입에 대고 마셔야 했다. 먹을 것이 부실하다보니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모두 극도로 허약해졌다. 나도 원래 몸무게인 53킬로그램에서 무려 10킬로그램이나 빠져 44킬로그램이었다. 그러다 보니 휘청거리며 제대로 걷지를 못해 맥없이 쓰러지곤 했다.

남자들 같은 경우는 맥이 없어 제대로 일을 못하니 매일 구타당했다. 그들은 설사병에 걸려도 개처럼 현장에 나가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불쌍한 그들을 동정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었다.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면 구류장으로 끌려간다. 갑자기 모두를 모이게 하더니 지프차에 태워서 대상자들을 데려간다. 그 사람들은 우리는 몰라도, 수용소에 있는 스파이들한테 걸려서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며, 구류장을 나올 때 까지 볼 수가 없었다. 구류장에 끌려갔다가 한 달 동안 갇혀 있으면 영영 못나오는 신세가 되어 거의 죽게된다.

언젠가 2명이 구류장에서 탈출하다가 일주일 만에 잡혀서 공개적으로 총살 처형을 당한 일도 있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로 다 보여줬다. 그런 마음 아픈 광경을 본 날은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연민을 표현할 수도 없었기에 속으로만 마음 아파했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며 지내던 중 교회 다니던 사람을 만났는데, 내게 한 주일에 성경 구절을 하나씩 외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추천해주었다. 사도신경만 속으로 암송하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돌이켜 보건데 그런 바람이 통해서인지 지금 대한민국까지 무사히 왔고 너무 감사한다.

첫 해에는 통나무 끌다가 다리를 다쳐서 석 달 동안 외래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치료하는 것은 없고 그냥 안정만 취할 수 있었다. 처음 수용소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아버지가 주신 비누를 사용했는데, 수용소에서 주는 것은 새까만 비누에 거품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생리대 같은 물품은 없었다. 2달만 생리를 했었는데 내 옷을 찢어 생리대처럼 사용했다. 한국에 와서도 2년 동안 생리를 안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갇혀 있던 여자 두 명이 임신 했었다. 소대마다 창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임신되었다. 어떻게 임신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가 신기하게 만나서 임신이 되었다. 태어난 아이는 안타깝게도 낳아서 산에다 묻었다. 아이의 엄마아빠는 죽이지는 않았고 6개월씩 수용소 구류 연장만 했다. 2003년 5월 2006년 5월에 나왔다.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눈이 펑펑 내리고 키만큼 쌓이는 산에 가서 나무 해오던 일이 생각난다. 눈 때문에 미끄러운데 산도 아주 험한 산이다 보니 걷지도 못하고 눈에 구르면서 갔었다. 내려올 때는 굴러서 울면서 내려왔다. 나무를 제대로 해오지 못한 남자들은 숙소 안에서 정말 많이 맞았는데, 우리도 맞을까봐 떨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자들은 때리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곳은 아이들은 없었고 군대 탈영하고 붙잡혀 온 20대가 가장 어린 아이들이었다. 나오기 일주일 전부터는 선생이 “밖에 안 내보내고 구내(생활하는 곳에서 헐한 일 한다)에서 일을 시켜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5월 30일, 안전원이 나를 불러 호송하더니 온성군 보위부까지 데려가 그곳에 인계했고, 내 동생이 온성보위부에 와서 나를 인계한다는 담보서를 써서 수용소 밖의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계속)

편집: 김소희<캠페인팀 간사>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