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 – 1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 ➀

(편집자)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은 북한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탈북했지만 중국에서 북송당해 요덕 수용소에 갇혔던 이금란 동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요덕 수용소에서 힘든 생활을 이겨낸 후 아버지와 함께 다시 탈북했다. 그 후 중국, 필리핀을 거친 고행 끝에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인간애을 찾기 힘든 공간인 수용소에서 모진 생활을 보내고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금란 동포의 이야기를 전한다.

북한에서의 생활

나는 6형제(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기관사셨기 때문에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기억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사탕 같은 물건도 집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 인맥 덕분에 학교 졸업하고 처녀 때 철도 교환수 일을 6년 동안 할 수 있었다. 철도 교환수는 북한 각 철도를 전화로 연결하는 일을 한다. 북한에서는 괜찮은 직업이었고 나 또한 그 일에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여자가 하기에는 좋은 직업이었다. 대학은 다니지 않았었다. 원래는 군대를 갈까 생각했었지만,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갈 수가 없었다.

미공급시기가 되면서부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등에 얹고 28살에 늦게 결혼했다. 남편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국당간부가 소개해준 부모 없는 남자였고, 직업은 돌격대 소대장이었다. 북한에는 결혼하는 딸에게 접시며 여러 가지를 보자기에 넣어서 보내는 풍습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장녀였기 때문에 시집갈 때 정말 신경써서 잘 챙겨 주셨다. 나는 결혼 이후 8개월 쯤 지나 임신을 했다.임신 후 남편은 강원도로 일하러 갔다. 아이를 낳아도 남편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남편은 엄마가 시집갈 때 챙겨준 그 보따리 때문에 미공급시기에도 잘 살았을 것이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이에게 먹일 음식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시래기 물을 먹이거나 통강냉이를 조금 얻어 와 주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소화불량에 걸려 버렸다. 하지만 아이에게 포도당 주사를 놔줄 돈이 없었다. 결국 내 옷을 다 팔아서 사탕가루를 사서 나오는데 어머니가 아이는 놓아두고 보따리만 들고 나에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1년 만에 자식을 잃고 말았다. 그 때가 1997년도였다. 아이를 잃고 다음 해 탈북을 위해 강을 건넜다.

흩어진 가족,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가다

현재 우리가족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국으로 나왔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우리 가족들이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까지는 정말로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미공급시기가 온 후부터 식량 사정이 곤란해지니까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고,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있는 용정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돼지 키우는 집에서 6개월간 있다가 연변 과학연구소에서 일한다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자신은 다른 지역으로 연수를 가기 때문에 나에게 더 이상 같이 살지 말고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3년을 산 뒤 나는 조양촌 이라는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갔다. 그 곳에서는 1년간 머물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내가 뒤따라갔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2002년에 한국으로 갔다.

조양촌을 나선지 반 년 만에, 나는 중국의 내몽골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한국으로 가기위해 창고 같은 방에서 8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 공안들이 방으로 들이 닥치는 바람에 전부 한 번에 잡혔다. 아마 미행이 붙었던 것 같다. 중국 공안들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들어왔는가?”, “왜 내몽골까지 들어왔는가?”, “누구를 통해서 들어왔는가?” 라며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물어보았다. 한족들은 내가 중국말을 할 수 있으니까 자꾸 나에게만 물어봤다. 그러나 나는 한족 말을 잘 알지 못했다.

그 후 몇일 뒤 기차타고 도문변방으로 가서 또다시 10일 간 취조를 받았다. 도문변방에서도 내몽골에서 붙잡혔을 때와 똑같은 질문만 계속 했다. 그러나 도문변방에서 취급 받을 때는 나무각자로 다리를 많이 맞았다. 방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우리 방에만 200명 정도가 있었다. 우리 방에 노부부가 같이 있었는데,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 계속 출혈을 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넘어갈 때 할머니가 피를 흘리는데도 질질 끌어서 할머니를 트랙터에 태워서 갔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우셨다. 그래도 도문변방에서는 할머니께서 약이라도 드실 수 있었지 북한에서는 개 취급을 당했다. 그 할머니는 이틀 후 돌아가셨다.

나는 도문변방에서 10일이 지난 후 버스타고 북한으로 끌려갔다. 도문변방에서 버스를 타고 북한으로 넘어갈 때 거의 700명 정도가 함께 갔다. 그 당시는 사스(SARS) 때문에 평상시에 비해 북한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 안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북한으로 넘어가서는 모두 온성구류장에 집결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 곳에는 사람이 몇 백 명 정도 있었다. 도착 후에는 모두 무릎 꿇고 앉아서 대기했다. 너무 덥고, 바닥에는 이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온성군 호송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인계받았다. 여성들은 여성 간수가 받아서 따로 모두 집결시켰다. 그들은 우리를 구류장으로 끌고 온 다음 옷을 다 벗겨 뽐뿌질 시키고, 머릿속, 심지어 자궁까지 다 뒤졌다. 그들은 “야이 간나, 돈 있는 거 솔직하게 다 말해라!”라고 윽박을 질렀다. 일주일간 취조 받다가 중국에서 같이 지내던 8명 중 한 명에게서 성경책이 나와 처음부터 다시 취조 받았다. 복도에서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릎 꿇고 앉아 취조 받았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허리, 다리를 잘 못 쓴다.

취조 받는 중에 나는 너무 맞아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아무데나 다 때렸는데 그때 맞은 머리가 아직도 아프다. 그들은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그들은 우리 가족들 중 엄마랑 남동생도 중국에 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가족들보다 내가 잡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재수사가 내려와서 다시 취조를 받았다. 결국엔 “다신 이런 일을 안 하고 교화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제 다 조사했으니까 혁명화로 보낼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 여기서 대기하라고만 했다. 나는 내가 요덕수용소로 가게 될지 몰랐다.(계속)

편집: 김소희<캠페인팀 간사>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1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