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어느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이야기 – 3

(편집자)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일까? 주어지는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말을 할 수 있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북한에서 평범하게 태어난 지성호씨. 그가 사회적,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으며 운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역경을 딛고 이사회에서 자리매김하는 지성호씨의 북한에서, 그리고 탈북해서 한국까지의 긴 여정을 소개한다.

동생이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그 후에 제가 떠났습니다. 저와 함께 떠난 팀은 저를 포함해 4명이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과 아이들 2명이어서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으로 온 것이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중국에서 출발하여 라오스, 메콩강을 건너서 태국까지 가는 경로를 걸어갔습니다. 정말 힘들고, 왜 이렇게 살아서 만리타국으로 가야 되는 지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이런 힘든 역경을 이겨내면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처럼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북한사람들의 처지가 한심스러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떠난 길이고, 여기서 달아난다고 해서 딱히 갈 곳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참고 버텼습니다. 드디어 태국의 난민수용소로 들어간 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는 많은 북한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한 전역에서 탈북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전혀 몰랐습니다.

 이렇게 탈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다 북한에 사람이 남아날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북한당국이 국민들을 그렇게 대하니 누가 남고 싶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태국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북한에서 부터 남한으로 넘어갈 작정을 했기 때문에 계획도 미리 세워두었었고, 도와주는 사람도 준비해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넘어온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기적같은 일은 한국에서 꿈에도 그리던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된 일이었습니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을 퇴소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계속 잠만 자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의 힘든 탈북과정과 라오스와 태국으로의 여정, 난민수용소에서의 삶 등을 거치고 한국에 도착하다보니 심신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날 며칠 잠을 자도 아무도 나를 깨우는 사람도 없고, 시비 거는 사람도 없었기에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소소한 일이지만 이런 것이 자유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을 잠만 자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사회에 나가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런 일도 북한에서 온 저에게는 조금 어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한국에서 겪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 문화 등 모든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고,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사회에 적응하던 시기에는 때때로 집 주소도 기억이 나지 않아 고생한 적도 많았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무엇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다는 강한 중압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육열이 높고, 대학생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라에서 내가 공부를 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한다. 배워야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라고 다짐하면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고 처음으로 학원문을 들어섰을 때 학원에 탈북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죽어 있고 소극적으로 학원을 다닌다면 머리에 남는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저는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먼저 다가가고 저 자신을 오픈시켰습니다. 원장선생님께 전 북한에서 왔고, 장애인이지만 컴퓨터를 배워야겠다고 설명했습니다. 학원에 있는 다른 수강생들에게도 처음부터 나는 북한에서 와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행운이었던 것은 컴퓨터를 함께 배우는 사람들이 정말 다 좋으신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솔직한 태도로 다가가자 그런 나를 많이 도와주고 거리낌 없이 친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분들이 얼마나 좋은지 형, 누나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가장 행복한 추억은, 점심을 모두 함께 먹는 일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도시락을 같이 먹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에서 생활하는 법을 아주 조금씩 터득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학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학원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4-5시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녁에는 포장마차를 하여 부수입을 벌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묵과 호떡을 팔았습니다. 이 당시 사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저 같은 장애인도 노력하면 이렇게 즐겁게 살 수 있구나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복한 생활을 이어나가다 조금 더 큰 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대학에 간 탈북친구들도 알게 되다보니 저도 대학에 가고 싶어진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고 싶고, 도시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에서 오라고 하는 사람도,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용기를 내서 충정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계속)

※ 『북한인권』 198호. 2015년 4.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