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어느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이야기 – 2

어느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이야기②

  (편집자)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일까? 주어지는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말을 할 수 있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북한에서 평범하게 태어난 지성호씨. 그가 사회적,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으며 운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역경을 딛고 이사회에서 자리매김하는 지성호씨의 북한에서, 그리고 탈북해서 한국까지의 긴 여정을 소개한다.

석탄을 파는 것도 리어카에다가 석탄을 싣고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석탄을 사겠냐고 물으면서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밖에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일생을 바꾼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석탄을 훔쳐서 판매를 하고 다니던 시절의 1996년도였습니다. 그날도 역시 달리는 열차에서 석탄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너무 배고프고 힘들다 보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열차에서 떨어진 줄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팔과 다리가 열차에 잘려 있었습니다. 만약 그곳이 한국이었다면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면 팔과 다리를 어떻게든 붙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의학기술도 좋지 않았고, 제가 가진 돈도 없었기 때문에 즉시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제 나이 16살 되던 해에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북한을 영영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점은 처음 중국으로 간 후였습니다. 20살, 2000년도에 너무 배가 고파 친구랑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는데, 그곳은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제가 태어난 북한이랑 비교한다면 중국은 자유로운 환경이었고, 그 때문에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번에 제가 살고 있던 북한이라는 곳이 한심하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갈 방법을 모르니 중국에서 일단 적응하며 지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 후 중국 연변지역으로 갔는데, 연변지역에는 탈북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 지역 사람들을 우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 먹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중국에 남아있었지만, 실제로는 힘든 삶을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어쩌다 알게 된 중국에 있는 지인들도 중국에 있으면 미래가 없다고, 곧 죽을 것이라고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리고, 경험이 별로 없었던 저였기에 할 수 없이 곧 북한으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몰래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저는 다짐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사는 것이 쉽지 않으니 어떻게는 내 나라에 정을 붙이고 한 번 다시 잘 살아보자라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마자 보위부원(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중국에 가서 한국사람과 접촉했느냐? 기독교인들과 접촉했느냐?’등을 물으면서 취조를 받았는데, 이 때 매도 무척 많이 맞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북한 당국이 중국에서 잡힌 탈북자라고 해도 웬만해서는 노동단련대만 보내고 다시 집으로 보내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중국에서 잡혀서 북한으로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큰 잘못이 없으면 일주일 정도 지나면 집으로 보내줘야 했습니다. 솔직히 탈북자들이 워낙 많다보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정말 가벼운 범죄에 속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 오랫동안 취조하고, 고문을 하니 정말 불만이 가득 생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저에게 왜 이렇게 악랄하게 대하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근 한 달이 다되어 결국엔 제가 악에 받쳐 물어보았습니다. ‘나한테만 왜 이렇게 심하게 구는가?’그러니까 보위부원들이 대답하기를 ‘중국에 거지꼴을 해가지고 구걸하러 가서 국가를 망신시키고, 국가의 격을 떨어뜨렸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한은 전세계에 자기네 주민들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는데, 저 같은 장애인들이 거지꼴을 해서 다니니까 국가 이미지가 훼손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북한에 다시 돌아온 제가 바보같이 느껴지고, 그냥 중국에서 도망 다니더라고 그곳에서 살껄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북한에서 살다가 기회가 되어 바로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두 번째로 탈북 할 때는 남동생과 함께 나왔습니다. 이때는 처음 탈북했을 때와는 다르게 아주 치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오기 전부터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계획 했었고, 탈북을 도와줄 인맥들을 미리 찾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런 철저한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한국에 간 친구 덕분이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한국에 갔던 친구가 있었는데, 북한에 있을 때 그 친구가 몰래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한국에 와보니 북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활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위험부담은 있지만 넘어오면 좋은 일들이 많으니까 너도 온다면 자기가 도와주겠다가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북한에 대한 정이 다 떨어지고 탈북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렇게 나름 만만의 준비를 했지만, 두만강을 건너서 북한을 나온 직후 든 생각은 딱 하나 였습니다. ‘쉽지 않겠다.’ 저는 막연히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로 한국으로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건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중국에서 여러 경로를 거쳐 정말 힘들게 가야만 했습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 보조기구를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건강한 상태로 나온 것도 아니게 때문에 이처럼 힘든 경로를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서 한국에 도착할 확률이 굉장히 낮다고 생각했기에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동생과는 중국에서 헤어졌습니다. 저와 동생, 둘 중 한 명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계속)

※ 『북한인권』 197호. 2015년 3. pp. 26~27.